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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우리 회사는 안 된다 카이, 내가 만약 한다 카믄 대가리가 뿌사지도록 할끼다.”
“내가 빨갱이라믄 개병대 시절부터 이를 갈던 놈이다. 인제 이런 거 필요 없어. 노조고 지랄이고, 젖비린내 나는 빨갱이한테…, 그놈의 중소기업 진흥 공단 충남 지역 본부 주인 주인 고마해라, 씨팔 우리가, 공돌이가, 세상의 주인이가? 밤낮 뺑이 치는 주제에.”
“글쎄 내사 모르겠다 카이, 이놈 말 들으면 이게 맞는 거 같고, 저놈 말 들으면 저게 맞는 거 같고, (담배를 물고 밤하늘을 쳐다보며) 하늘엔 참 별도 많십니더….”
“우리도 퍼뜩 해치워버리자고, 이런 가시나아들, 아니 아니 여 대학생 생활비 대출 자들도 만드는데 불알 찬 놈들이….”
강렬한 부산 사투리 속에 쌍욕과 19금, 비속어가 넘쳐난다. ‘대가리가 뿌사지도록’ 한다 했다가, ‘젖비린내 나는 빨갱이’라면서 안 한다 했다가, ‘이게 맞는 거 같고, 저게 맞는 거 같고’ 하면서 헷갈리다가, ‘가시나아들도 하는데 불알 찬 놈들이’라면서 다시 하자고, 처음 자리로 돌아온다. 하네 마네 사회초년생 적금 , 하는 것은 노동조합이다. 거기에 “정신들 차려! 아, 나라가 망해가고 있어요. 노조? 그 무슨 개뼉다구 같은 소리야?” 하는 사장의 일갈은 어제처럼 귀에 익다. 노태우 정부 시절, 그 겨울공화국에서 꿈과 체념 사이를 오락가락 흔들리는 노동자의 모습이 이토록 리얼하다. 야전 잠바를 걸치고, 담배를 꼬나물고, 어깨가 건들거리는 걸음걸이 하며, 곱슬머리에, 비은행예금취급기관 광대뼈에, 찢어진 눈매, 한대 맞으면 바로 어디가 부러질 것 같은, 첫눈에 깡패다. 1990년 장산곶매가 제작한 우리 독립영화의 전설 ‘파업전야’, 해병대 출신 금속공장 노동자 재필이다.
배우 홍석연(63). 중학교에 다닐 때 공부를 잘해 부산상고에 들어갔다. 금방 학업은 팽개치고 삼류 건달 흉내를 내다가 겨우 졸업장을 땄다. 친구들은 대 해운대대신저축은행 부분 은행에 들어갔다. 그는 장사를 배운다고 상경하여 남대문시장 포목점 점원을 했다. 노래를 곧잘 했다. ‘고향역’을 부르면 나훈아 필이 난다면서 사람들이 좋아했다. 인천 스탠드바 밤무대를 뛰었다. 피크타임에서 이은하가 ‘밤차’를 부르고 내려가면 술을 시키는 매상 타임을 지나 새벽 1시, 땜질 가수를 했다. 하루는 몇곡 부르니 손님 테이블에서 오라 한다. 검은 양복의 패싸움 장면 전문 주먹 배우들이었다. 무술 감독이 “야, 너는 그 얼굴에 가수 안 된다”면서 액션 배우를 권했다. ‘고래사냥’을 보고 배우를 꿈꾸던 시절이 있었다. 오래 생각하지 않는 그는 가수보다 배우가 낫겠다 싶어 그날로 그 길에 합류했다.
“패싸움하면서 치고받고 도망치고 쫓아가고, 적성에 딱 맞아요. 하루 8시간씩 사흘을 찍었어요. 영화가 개봉돼 친구들 다 불러 극장엘 갔는데 몇초나 될까, 어느 장면에서 나오는지 내가 나를 못 찾겠더라고요. 이건 아니다 싶어 때려치우려고 몇번을 그랬지요. 그렇게 ‘으악새’ 배우를 몇년 했어요. 우리는 대사가 없어요, 이대근씨가 한방 치면 피를 물고 있다가 ‘으악~’하고 쓰러지거든, 그게 슬피 우는 으악새 배우라.”
그래도 살다 보면 때가 온다. 어느 날, 장동홍 감독과 친한 후배가 ‘파업전야’ 얘기를 꺼냈다. 해병대 출신의 험상궂은 ‘재필’역을 못 찾고 있다고. 그는 다방 오디션에서 바로 캐스팅됐다. 구사대가 아닌 노동자 역, 배역은 좋은데 개런티가 없다 한다. 1989년 겨울, 인천 한독금속 공장에서 덜덜 떨면서 40여일을 찍었다. 영화가 초반에 지지부진했는데 경찰이 저지에 나서면서 갑자기 뜨기 시작했다. 뿌연 최루탄 속에서 ‘파업전야’는 영화를 보는 자체가 투쟁이었다. 2층 난간에서 구호를 외치다 ‘대가리가 뿌사지며’ 피 흘리고 쓰러지는 재필의 모습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인터뷰에, 사인 공세에, 그는 일약 스타가 되었다.
곧바로 들어온 출연 섭외. 홍기선 감독의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1992). 원양어선을 타고 갔다가 속아서 온 길재, 배우 조재현과 함께 찍은 비중 있는 역이었다. 이어 정지영 감독의 ‘하얀전쟁’ 장 하사 역에 전격 캐스팅된다. 베트남에서 두달 넘게 찍었다. 안성기 이경영 심혜진 독고영재 허준호에 이어 ‘나오는 사람들’ 앞쪽에 이름을 올렸다.
“나는 그때 이미 스타지. 사람들이 독고영재 형보다 나를 먼저 알아봤어요. 근데 독고 형 진짜 열심히 하데. 비 오는 날도 대본을 읽고, 혼자 바닷가에 나가서 연습하고, 독하게 하데. 나는 속으로 웃었지. 스타가 연습하냐? 맨날 어울려 술 먹고, 고스톱 치고….”
그에게 ‘하얀전쟁’은 무덤이었다. 독고영재는 대종상 남우조연상을 받았고, 그에게는 전화 한통 걸려 오지 않았다. 술자리에서 여자 팬티 꺼내는 장면이 있는데 내가 봐도 어색하더라고 그는 말했다.
이듬해 백기완 선생 주례로, 배우 안성기를 하객으로 결혼했다. 그래도 전화는 오지 않았다. 첫딸을 낳고 퀵 배달을 시작했다. 몇해를 근근이 살았다. 상업영화에서 잊혀진 그는 독립영화를 찾았다. 29초짜리 휴대전화 영화도 찍고, 20분 이내 단편영화도 찍고, 하루에 두편도 찍고, 닥치는 대로 찍었다. 출연료는 대개 10만원. 퀵 배달을 마치고, 중앙대 학생 감독 앞에서 15분 단편영화 오디션을 보던 날, 그는 남몰래 울었다.
“‘하얀전쟁’에서 허준호가 상대역으로 많이 나와요. 영화 거의 찍고 담배 피우는데 옆에 와서 그럽디다. 형, ‘파업전야’를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볼 때 참 힘들겠다, 앞으로 배우 할라면 연기공부 많이 해야 되겠다, 대놓고 그래요. 성질이 나서 콱 개머리판으로 찍어 버리고 싶더라고. 근데 내가 이렇게 되니까 그 말이 떠나지를 않아, 맞는 말이잖아요? 30년 세월 내가 그 말을 잡고 버텼어요.”
그는 스스로를 ‘똥배우’라 했다. ‘명배우’가 ‘똥배우’가 될 때, 꼭 그런 때가 되어서야 세상은 작은 문을 하나 열어준다.
형편없는 작품이 없다, 학생 감독이 단편 하나 찍는데도 대본 쓰고 고민하고 사력을 다하는데 누가 그것을 졸작이라 하는가, 나는 필요로 하는 곳에 나를 갖다 드린다, 그렇게 생각을 고쳐먹었다. 부르면 갔다. 매주 한두편, 장편 20여편을 포함하여 지금까지 찍은 독립영화가 1000편을 넘는다.
세상은 인연 따라 돌고 도는 법. 내가 하찮게 여기는 것이지, 세상에 가벼운 인연은 없다. ‘파업전야’를 본 학생이 독립영화 감독이 되었다. 독립영화 감독은 드라마 감독이 되고 상업영화 감독이 되었다. 그들은 재필을 잊지 않았다. 조역 단역이지만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도둑의 딸’을 비롯하여, ‘카인과 아벨’ ‘유나의 거리’ ‘꽃길만 걸어요’, 그렇게 드라마 50여편에 출연했다. 영화 ‘영원한 제국’ ‘개 같은 날의 오후’, 그리고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에서 삼일사 재단사 역을 했다. ‘넘버 3’ ‘친구’ ‘도가니’ ‘국제시장’ ‘남한산성’ ‘도굴’ 등 흥행에 성공한 영화에도 많이 나왔다. 대개 잠깐 나왔다 사라지거나 악역이었다. 에로 ‘애마부인 7’에서는 비중 있게 나온다고 한다.
“‘그것만이 내 세상’에서 윤여정의 남편으로, 이병헌의 아버지로 나와요. 처자식 패는 패륜 영감인데 이병헌이 교도소로 면회를 옵니다. 나보고 감옥에서 나오지 마라 그래요. 그런데 눈물을 글썽글썽하는 거라. 대사에도 지문에도 없는데, 나를 진짜 아버지로 보는 거야, 정신이 번쩍 듭디다. 내가 선배인데 질 수야 없지, 그 순간 아들로 보입디다. 상대를 끌고 자기 세계로 들어가 버리는, 이병헌을 최고로 칩니다.”
버스로 퀵 배달을 마치고 오는 길이라 했다. 그 독기와 주먹은 흰 머리와 주름 사이로 넘어가고, 인사동 밥집에서 만난 재필은 어느덧 재필의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신부님 역을 맡아도 좋을, 느긋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액션 멜로 에로 스릴러 다 찍어 봤는데 딱 하나, ‘부귀영화’를 못 찍어 봤다는 말에 우리는 웃었다. ‘쇼생크 탈출’에 나오는 모건 프리먼 같은 역할을 해보는 것이 꿈이라 했다. 곧 독립 장편 ‘안동’이 개봉하는데 40년 배우 인생에서 처음으로 딸을 걱정하는 좋은 아버지로 나온다고 한다.
길이 없어도 오래 다니다 보면 길이 난다. 독립영화로 가는 작은 길, 재필이 걸었던 잡초 무성한 그 길을 재필의 아버지가 걷고 있다.



이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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