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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소한 말이었다. 꽃을 따라서 걷는 길이란 뜻일까 싶어 계양산에 어떤 꽃이 폈는지 기억을 더듬어봤다. 좀처럼 떠오르는 게 없었다. 인천 11산 종주를 '인천대간'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는데 그런 식으로 만든 단어인가 싶기도 했다.
일단 사진을 보내달라고 요 생활안정자금대출 청하자 금방 한 장의 사진이 돌아왔다. 계양산 지도가 보였고, 그 위에 확실히 꽃이 있었다. 다만 그 꽃은 여느 꽃과 다르게 발로 피워낸 것이었다. 지도 위에 발로 그리는 아트, 즉 GPS 아트(GPS 궤적을 이용해 지도 위에 그림을 그리는 예술 행위)로 만든 꽃이었다.
박 부산 학원강사 병철씨가 계양산 꽃종주 GPS 트랙을 보여 주고 있다.
국가정보원에서 복무하며 운동 배웠다
박병철씨는 이처럼 계양산 꽃종주에 여념이 없는 젊은 산꾼이다. 부모님은 경북 안동 출생인데 그는 인천에서 태어나 자랐고, 직장도 인천인지라 인천 계양산에 대한 마음이 무척 깊다고 했다. 그는 제일은행이자율 한 건설사 관리자로 일하고 있으며, 현재는 인천발 KTX 건설 현장을 감독하고 있다고 했다.
"아무래도 건설업을 하다 보니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일했어요. 가장 멀리로는 거제도에 갔었죠. 현장을 아는 사람이면 모두 공감할 텐데 여기 있는 사람들은 술을 매일 마시다시피 해요. 스트레스가 워낙 많고 일이 고되기 때문이죠. 하지만 저는 술이 잘 풍산개 안 맞아서 그러지 못했죠. 그래서 선택한 게 운동입니다."
운동은 몸에 잘 맞았다. 가족력이 좋았다. 어릴 때 잔병치레 없었고 덩치가 컸으며 뼈도 굵었다. 누나는 농구선수로 운동하기도 했다. 가족 모두 단단한 몸이었다. 선택한 운동은 헬스. 군 시절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군복무를 좀 특이한 곳에서 한 것이 주된 계기였다. 일반병으로 입대 수호지 10등급 했는데 국가정보원 건물 경비를 맡았다. 간부들이 모두 특수부대 출신의 엄청난 엘리트들이었다. 그들에게 자극받아 운동을 배웠다.
회사에 건의해 사내 헬스장을 만들기도 했다. 직원들하고 같이 운동하기 위해서다. 업무가 힘든 만큼 끝나고 그대로 남아 운동한다는 게 보통 의지가 아니고선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사비를 들여 헬스 기구를 살 만큼 열의를 갖고 꾸준히 운동했다.
그러다가 러닝에 관심을 가졌다. 동아마라톤, 송도국제마라톤 등에 나가 풀코스를 여러 번 완주했다. 그는 "기록은 4시간 30분 정도로 다른 동호인들의 기록 수준을 생각하면 자랑할 만한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고려해야 할 점이 있다. 그의 체중은 약 90kg에 달한다. 대부분 러너들이 평균 60kg, 체구에 따라 간혹 50kg대의 체중을 유지하는 것을 생각하면 그가 완주를 위해 얼마나 노력했을지 헤아려볼 수 있다.
계양산에 오른 박병철씨. 평소 헬스를 통해 다부진 몸을 유지하고 있다.
계양산 정상만 400번 넘게 올라
운동을 좋아하는데 코로나가 찾아왔다.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 자연스럽게 등산을 시작하게 됐다. 혼자서 서울 근교산 위주로 다녔다. 그러다 여러 산행기를 찾아보니 서울에 불수사도북이라는 40km의 장거리 코스가 보였다. 2020년, 홀로 한 번 도전해 봤다. 20시간 정도 걸려서 완주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혼자서 오래 걸으니 지루하고 지겨웠다. 돌이켜보면 러닝이나 헬스 등 항상 했던 운동들이 다 혼자의 운동이었다. 그래서 2021년 한 인터넷산악회에 가입하고 활동하게 됐다. 그리고 거기서 삶이 바뀌는 경험을 했다.
"한걸음산악회란 곳입니다. 처음 같이 간 산행지가 계양산이었어요. 아무래도 고향의 산이니 특별했죠. 여러 사람들이랑 같이 걸으니까 무척 재밌더라고요. 그간 혼자 운동할 땐 못 해본 경험이었어요."
대신 몸은 더 힘들었다. 혼자일 땐 내 페이스로 가면 되지만, 같이 갈 땐 그럴 순 없다. 보조를 맞춰야 한다. 그러니 몸은 더 힘들었다. 하지만 같이 걷는다는 사실로 인해 마음은 더 가벼웠다. 마음이 더 가벼운 것이 발걸음을 더욱 가볍게 만들었다.
"한걸음산악회에서 여러 산을 산행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산행은 설악산 대종주입니다. 힘들었던 걸로 따지면 지리산 화대종주나 서울 불수사도북과 맞먹는데 설악은 기암괴석도 많고 경치가 좋아서 스트레스를 하나도 안 받고 걸을 수 있었어요. 솔직히 고백하면 다른 장거리 길은 이따금 지겹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었거든요. 조망도 없고 같은 길만 지루하게 이어질 때요. 하지만 설악산은 그런 곳이 하나도 없었어요."
박씨는 주로 서울 근교 산 위주로 산행한다고 했다.
그만큼 설악을 매력적으로 느꼈지만 가장 좋아하는 산은 계양산이다. 그는 "지금까지 계양산은 200번 넘게 오른 것 같다"고 했다. 또한 하루에도 여러 번 정상을 오르곤 해서 들머리에서부터 정상을 찍은 것만 따지자면 400번 정도 된다고 했다.
"집에서 가까워요. 지하철을 20분 정도 타고, 그 다음 역에서 들머리까지 또 30분 정도만 걸어가면 바로 등산을 시작할 수 있거든요. 그리고 등산로가 굉장히 많아서 내키는 대로 오르락내리락할 수 있어서 좋아요."
꽃종주는 사실 처음엔 계획하지 않았던 산행 방식이었다. 원래는 지하철역에서부터 계양산 정상을 왕복하는 방식으로 운동량을 채웠다. 한 코스만 왕복하는 것이 어느 순간 문득 지겨워져서 그냥 이쪽에서 저쪽으로 한 번 올라갔다 내려왔다가, 다른 쪽으로 내려갔다 올라와 봤다. 그걸 몇 번 반복하다가 한 번은 맘먹고 정상으로 가는 모든 길을 하루 안에 다 밟아버렸다.
정상에 도착한 횟수만 꼬박 11번. 그래도 길이 모두 달라서 지겹지 않았다. 계양산 하나만으로 산행거리 40km, 누적고도 3,000m 이상을 뽑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산악회에 공유하니 회원들이 "GPS 트랙이 마치 꽃 모양 같다"고 했다. 그렇게 꽃종주가 탄생한 것.
"산악회에서 열심히 활동해 대장을 맡게 된 이후 처음 모집한 산행이 바로 이 계양산 꽃종주였어요. 감사하게도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셔서 90명 가까이 왔죠. 심지어 비 오는 날이었는데도 말이죠!"
산행 시 인원이 많으면 관리가 어렵다. 산행 능력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선두와 최후미에 선 사람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간격이 너무 벌어지지 않도록 조절하는 것이 포인트. 하지만 계양산 꽃종주의 경우에는 그렇게 신경을 많이 쓰지 않아도 된다. 자기 능력에 맞는 만큼 걷다가 얼마든지 어디로든 하산하면 되기 때문이다. 또 한 코스를 마치고 내려올 때마다 편의점이나 카페를 이용해 마음껏 물과 식량을 보급할 수 있어 배낭이 한결 가볍다. 화장실 문제도 해결된다. 그러니 부담 없이 긴 시간 등산할 수 있다.
"그래서 각자 다른 목표를 갖고 올라요. 누구는 네잎클로버 모양을 만들려고 걷고, 누구는 전체 완주를 목표로 삼기도 하죠. 아무래도 등산로가 다양하고 복잡한데다 모두 정비공사가 잘돼 있어서 가능한 일입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니 저도 더 신나서 같이 걷게 됐죠."
대청봉에 오른 박씨.
스스로 정한 상한선, 50km
이제 남을 인솔하는 역할까지 맡게 되자 더 책임감을 갖고 산행을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다. 그리고 자기가 처음 산에 들었을 때를 생각했다. 그래서 산행에 참가하는 이들에게 최우선으로 강조하는 것이 있다. 바로 배려심이다.
"제가 공지하는 산행은 주로 힘든 장거리 코스들입니다. 어느 정도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큰 걱정 없이 참가하지만 이제 막 장거리 걸음마를 뗀 사람들은 아무래도 불안한 마음이 있어요. '나 때문에 전체 산행 일정이 늦어지면 어떡하나'하는 마음이죠. 그래서 참석 안 하는 분들도 꽤 있어요. 저는 그런 사람들을 다 품어서 끝까지 같이 가려고 해요."
이렇게 배려를 최우선으로 강조하며 산행하는 건 천성적인 성격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부모님을 닮아서 그렇다"고 했다. 상대방 마음을 이해하고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도록 늘 교육받았다. 좌우명이 아예 '적을 만들지 마라'다. 천성적으로 둥글게 살면서 항상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려고 한다. 그래서 산악회 닉네임이 '일조박'이다. 일체유심조 박을 줄인 말이다.
"행복한 마음이나 불행한 마음이나 모두 사람들이 만들어낸 감정일 뿐이라고 생각해요. 매주 30km 이상 거리의 산을 오르는 건 일반 사람들 눈에는 무척 힘든 고행으로 보일 수 있겠죠. 하지만 저는 늘 즐거운 마음으로 점점 건강해진다고 생각하며 걷습니다."
그는 행복의 첫 번째 조건으로 '건강'을 꼽았다. 일단 몸이 건강해야 웬만한 어려움도 잘 견딜 수 있다는 것.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이다.
박씨는 한걸음산악회에서 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등학교 때 축구를 좋아했는데 헛발질 한 번 했다가 디스크에 문제가 생긴 적이 있어요. 제대로 일어나지도, 움직이지도 못했죠. 그러니 바로 살이 찌더라고요. 모든 병원에선 수술을 권했어요. 일단 수술을 하면 예전 몸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란 걱정, 그리고 높은 수술비용, 부모님께 미안한 마음 등 때문에 수술을 거부했어요. 안 아픈 척 하고 약국에서 몰래 진통제를 사서 먹었죠. 그렇게 하루하루 버티니까 조금씩 재활이 되고, 나중엔 완치되더라고요. 처음에는 벽을 잡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일어날 수 있었는데 말이죠."
그는 자신의 상한선을 정확히 정해 뒀다. 50km다. 그 이상의 코스를 한 번에 걸으면 직장생활에 피로감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몇 번 이 규칙을 어기고 강남 16산 종주, 불수사도북 왕복 등을 시도해 보려고 한 적도 있다. 그런데 그때마다 당일에 비가 왔다. 그래서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또 50km 이상의 등산은 그동안 쌓아올린 헬스의 노력도 무너뜨릴 수 있다.
"평일에는 주로 웨이트트레이닝을 합니다. 사실 헬스 열심히 하는 분들은 등산을 잘 안 하려고 해요. 등산을 오래하면 몸 안의 단백질을 소모하기 때문에 근력이 줄어들거든요. 저도 어떻게 보면 주말 등산으로 빠진 근력을 평일에 다시 채우는 거죠.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근육을 채우는 거죠."
"산행에 어려움을 더하면 더 귀한 경험 된다"
그에게 사람과 산에 대해서 물었다. 그는 산보다 사람을 앞에 뒀다. 산에서 자연을 감상하기보다 산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더 좋다고 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아예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산에서 사람들과 있을 때 비로소 꽃이 피고 지는 아름다움을 느낀다고 했다.
"어떤 기록을 세운다거나, 저 사람보다 빨리 가고 싶다거나 하는 그런 마음을 비워내야 등산의 즐거움을 알 수 있어요. 저는 뚜렷한 목적 없이 함께하는 산우들과 땀 흘리면서 순수하게 산행할 때, 그럴 때 비로소 산이 아름답게 느껴져요."
등산을 시작하기 전에는 마라톤을 취미로 즐겼다.
술, 담배를 일절 하지 않고 매일매일 운동하는 삶이 만든 몸이기에 그의 등산장비는 단출하다. 몸이 장비다. 스틱도 안 쓰고, 무릎보호대도 안 한다. 배낭도 몇 년 전에 산 작은 러닝배낭을 계속 쓰고 있다. 큰 산에 갈 땐 아버지께 물려받은 배낭을 쓴다. 등산화도 안 산다. 마라톤 때 사용한 러닝화를 신는다. 그래도 지금껏 계획했던 산행은 모두 100% 완주에 성공했다. 백 마디 조언보다 일상 중 꾸준한 몸 관리가 산행에 더욱 필요한 요소란 걸 증명하는 셈이다.
"지난 10월 중순 설악대종주를 갔어요. 친한 산악회 사람들과 함께 안내산악회를 이용해서 갔죠. 같은 코스를 가는 사람들만 버스 두 대가 가득 찼어요. 그런데 시작할 때부터 비가 오니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중도에 탈출했어요. 우리 팀원들은 계양산 꽃종주로 다져진 탓인지 모두 무사히 완주할 수 있었죠. 대장으로서 산행을 계획할 때도 물론 행복하고 재밌긴 한데 이렇게 어려운 길을 완주했을 때가 가장 행복한 것 같아요."
그는 개인적으로 목표 삼고 있거나 도전하고자 하는 건 일절 없다고 했다. 오로지 흘러가는 대로 산에 들었다가 나간다. 마치 파도처럼. 주말이 되면 밀물처럼 산으로 들어갔다가 날이 저물면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물론 여러 사람과 늘 함께한다. 혼자 해외 장거리 트레킹을 간다거나 사색에 잠겨 오래 걷는 그런 건 영 성미에 맞지 않는단다. 이렇게 관계지향형 산행을 즐기는 건 어쩌면 그의 직장 특성 때문일지도 모른다.
"건설 현장을 매번 옮기다 보니 인간관계의 잦은 단절을 겪었어요. 현장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서 숙소생활을 하며 친해졌다가도 공사 끝나면 또 제각각 집으로 돌아가죠."
설악산에서 일출을 바라보고 있는 박병철씨.
하지만 산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산에서 만난 사람들을 제2의 가족으로 삼았다. 원체 앞에 나서는 걸 좋아하다 보니 이들을 이끌고 싶어 대장도 자처했다. 산행의 즐거움을 전파하는 것이 좋았다. 계양산에 오르면 사람들에게 마니산과 북한산, 인천과 서울, 롯데타워와 영종도가 어디인지 알려 주기 바쁘다.
"같이 산행을 다닌 사람 중 어떤 사람은 처음에 계양산을 한 번 오르는 것조차 힘들어했죠. 그러다가 하루에 3번, 5번 정상에 오르며 꽃종주도 하고 이어서 불수사도북까지 해낸 거예요. 그렇게 체력이 좋아진 거죠. 그걸 보면 마음이 정말 뿌듯해요. 그가 저에게 감사하다고 하는데 그런 말을 듣는 재미 때문에 대장을 계속 하죠. 사실 산악회 대장이란 게 산행을 공지했는데 생각보다 참석자가 적으면 마음이 싱숭생숭하고 뭔가 잘못했나 싶어 움츠러들고 그렇거든요."
그가 공지하는 산행은 일반적인 산행에 비해 항상 난이도가 높다. 약간의 힘듦과 어려움을 산행에 더하면 그것이 마음속에 끈기와 우직함, 인내심의 씨앗이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것이 뿌리가 내리고 자라나면 삶을 지탱하는 기둥이 된다고 믿는다.
인천 시내를 배경으로 선 박병철씨.
월간산 12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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