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비(楊貴妃)
“다시는 여성이 정사를 농락하는 일이 없게 하라”
서양의 클오파트라와 더불어 동양의 미인 양귀비 楊貴妃 37세의 나이로 756년 미인박명 (본명:양옥환/옥반지)
당현종의 사랑인 양귀비는 실은 그의 18번째 아들인 수왕(壽王)의 세자비로 궁에 들어왔다. 마침 아내 '무혜비'를 잃고 외로워 하던 현종이 양귀비가 절색이라는 말을 듣고 마음이 동하던 차에 한번 그 자태를 보고는 반해 버리고 만다.

양귀비가 현종의 마음을 흔들어 740년 양귀비가 21세 때, 54세이던 현종은 그녀를 수왕의 품에서 떼어냈고 정식 황후는 아니었지만 '귀비'라는 칭호를 주었다. 현종은 양귀비를 "말하는 꽃"이라며 애지중지했다.
양귀비가 현종의 사랑을 독차지 하면서 양귀비의 친척들은 모두 고관대작에오르며 천하를 호령하게 된다.어려 부모를 잃은 양귀비로서는 그나마 있는 자신의 친척에 대한 애착이 더욱 커질 수 밖에 없었다. 6촌 오빠인 '양소'라는 이는 현종으로부터 '국충'이라는 이름을 받아 재상의 자리에 까지 오르게 된다. 말을 타고 수십일 걸리는 남방산에서 나는 여지 (혹은 여주)라는 과일을 가져왔다는 얘기, 양귀비와 두 언니가 지나간 자리엔 금은 보화가 굴러 다녔다는 등 사치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수 왕비는 미모만 발군인 것이 아니라 노래와 무용에도 뛰어났다.
현종과 수 왕비 사이에 불륜이 시작되는데 현종의 나이 56세, 수 왕비 나이 22세 였다. 아들에게는 신발 바꿔주듯 다른 처녀를 주어 아내로 삼게 했다.
양귀비의 언니도 상당한 미인으로 자유로이 궁궐을 드나들었는데 현종과 눈이 맞아 관계를 가졌다. 이를 안 양귀비는 현종에게 앙탈하다 궁궐 밖으로 쫓겨났지만 천신만고 끝에 다시 들어온다. 현종은 양귀비를 만나기 전까지는 정사도 잘 챙기고 부지런히 나라 일을 보았는데 그녀와 음탕한 놀음을 즐기면서 정사를 아주 멀리했다.
이 충격적인 간통은 그칠 줄 모르고 타 올랐다. 현종은 그녀의 호를 태진(太眞)이라고 지어주고 간통한지 6년 만에 귀비(貴妃)의 칭호를 내렸다. 황후가 죽고 없으니 그녀는 사실상의 황후가 된 것이다.
원래 양귀비는 고아 출신이다. 양씨 가문에 양녀로 들어가서 성도 갖게 된 것이다.일단 귀비가 되고 나서 그녀는 정사에 손을 뻗기 시작한다. 양씨 집안 남자들은 모조리 벼슬 한 자리 씩 주었다. 그녀의 6촌 오빠인 양국충(國忠)이라는 간신은 재상이 되어 정치를 좌지우지하였다. 국충이라는 이름도 현종에게서 하사받은 것이다.
인류사에서 가장 찬란했다는 당나라 문화가 그 절정에서 하강할 무렵인 서기 750년 전후의 당나라는 부패하고 무능한 황제 현종이 재위하고 있었다. 그는 간신 이림보에게 정사를 맡겼는데 이자는 충직한 정적들은 모조리 숙청했고 심지어 황태자도 그의 눈치를 볼 정도였다고 한다. 또 환관 고력사라는 자가 궁내의 모든 일을 좌지우지 하면서 나라는 궁 안팍으로 침몰하고 있었다
현종이 나라 일을 등한히 하고, 양국충이 현종의 양아들이었던 안록산과 사사건건 대립하면서 결국 756년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게 된다. 755년 안록산이 군사를 일으켜 수도인 장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현종은 여름날 새벽 양국충등 신하와 얼마 안 되는 궁중 나인들을 데리고 피난길로 올랐다. 얼마가지 않아 이들을 호위하던 병사들이 양국충 양귀비등 양씨 일가를 모두 죽이지 않으면 호위하지 않겠다고 버티었다.
결국 양국충과 그의 일가는 모두 목이 잘리고 양귀비는 자살을 강요당하였다. 그녀는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경국지색(傾國之色) 양귀비 나이 38였다.나라를 망쳐 먹은 여자, 양귀비는 명주천을 꼬아 만든 줄로 목이 졸려 죽는 액살(縊殺)형에 처해진다. 물론 이 명령을 내린 것은 현종이었다.
'미인박명(美人薄命)'이란 말도 여기서 생겨났다. 박명이란 일찍 죽는다는 뜻이다. 여자가 예쁘면 이사람 저사람 입에 오르내리고, 그러다 보면 '팔자'가 사나워 진다는게 옛날 우리 어른들의 생각이었고.'미인은 복이 없다' 일직 죽는다'도 바로 '조용한 현모양처'를 바라는 가부장적 심리에서 나온 말일 수도 있다.
양귀비가 궁에 들어온 것이 16세때, 혹 이때 바로 사랑에 빠졌다면 그의 나이 49세. 그리고 그녀가 죽은 것이 37세니까, 둘의 사랑은 21년이 유지됐다. 그 기간 동안 두 사람의 사랑은 식지 않은 것은 물론 황제가 장안 재탈환한 후에도, 영혼과의 사랑이 이어졌다고 전해진다. 현종은 남은 생애 내내 양귀비의 그림을 보면서 아침 저녁으로 눈물을 흘렸다는 데, 현종은 꽤나 로맨티스트였던 것 같다.
중국의 문장가 중의 하나인 백거이는 '장한가'라는 애절한 한시,
진홍은 '장한가전'이란 이야기를 남겨 후대에 전해진다.
장한가는 봉래산에 숨은 양귀비 영혼의 입을 빌어
"우리가 죽어 하늘 나라로 가면 비익조가 될 것이요
이 땅에 영원히 살며 연리지가 됩시다." 라고 읊는다.
비익조는 암컷, 수컷이 날개가 하나씩이라 언제나 함께 날아 다니는 새,
연리지는 두 나무의 가지가 하나로 합쳐진 것을 말한다.
결혼식장 중에 '연리지 예식홀'이라는 곳이 있는데, 두 단어 모두 영원한 사랑을 의미한다. 장한가가 발표되자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싯구를 외우는 것이 일대 유행이었다.
수천년간 미의 대명사로 불렸던 양귀비. 대체 얼마나 예뻤던 것일까.
물론 그녀의 사진이나 제대로 된 초상화 한 장 전하고 있질 않다. 그런만큼 그녀의 미모를 추정하는 사람도 많다. 각종 문헌과 상상력을 합쳐 그녀의 미모를 가늠해보면 통통한 동양적 미인의 전형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양귀비상과 초상화에서 나타난 그녀의 몸매는 6등신 정도가 된다. 흔히 서양미인의 기준인 8등신에는 턱없이 모자란다.
동양에선 '부 드러운 곡선 미'를 으뜸으로 쳤다. 통통한 몸매에 10센티도 채 안된다는 작은 발. 당시 당나라에선 삼백(하얀 이마, 코 ,턱)과 삼홍(붉은 입술, 뺨, 손톱)은 당시 미인의 기준이었는데, 그녀를 묘사한 기록의 대부분이 이런 점을 말하고 있다. 붉은 입술과 손톱은 건강의 상징으로 양귀비가 얼굴이 하얀 건강 미인이었음을 말해준다.
스캔들은 없었을까?
당대의 시인 이백(李白 701~762)이 있다. 742년은 양씨가 귀비로 책봉된 해이자 이백이 궁궐로 입궐한 해이다 황제는 그 혼자 식사하는 칠보어상에 평민인 이백과 합석할 만큼 그를 아꼈다는데, 양귀비와 각별한 사이가 아니고서야 가능했겠느냐는 이야기가 나온다.
현종의 양자인 안록산도 양귀비와 염문설이 있었다. 안록산은 때로 현종보다 귀비에게 먼저 인사를 드리고, 궁에서 밤을 새우는 일도 많아 세상엔 두 사람의 추문이 퍼지기도 했다. 그러나 현종은 그를 추호도 의심치 않았다. 양귀비의 정절을 추호도 의심치 않았다는 데 과연 그 심리의 저변에 무엇이 있었는 지는 알 길이 없다
안록산은 원래 오랑캐 출신인데 일 개 병졸에서 절도사까지 승진하여 궁궐에 마음대로 출입하는 실력자였는데 얼마 후 양귀비의 양아들이 되었다. 당나라 궁궐에서 40대 후반의 아들과 20대의 엄마가 탄생했으니 해괴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안록산은 거구에 배가 나왔는데 ‘엄마, 엄마’하면서 양귀비의 젖을 빨아 먹었다. 양귀비는 아들을 더운 욕탕에 뉘어놓고 하얀 살결을 씻어주며 아이 엄마 같은 즐거움을 맛보았다고 한다.
양귀비가 친척들을 끌어들여 갖은 악정에 관여했으나 안록산과의 간통이 당나라를 망가뜨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안록산이가 수상하다, 안록산이가 군사를 일으키는 것 같다고 현종에게 보고가 들어오면 그 때마다 안록산을 위하여 거짓 반론을 하여 현종의 판단을 흐리게 하였다는 것이다.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간통으로 시작한 놀음이 며느리가 오랑캐인 안 록산과 음탕한 짓을 하며 화려한 당나라 문화를 더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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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에게 반해 버린 시아버지. 아무리 황제라 하드라도 이건 인면수심이다.
우리나라도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이가 자기의 며느리와 관계를 맺어 아들이 자살하고 호적은 파헤쳐졌다. 구약 성경에서는 롯이 딸들과 관계를 하여 아이들을 낳고, 며느리 타마르는 시아버지 유다와 간음을 하고 시인 바이런은 이복 누나와 관계를 하였다.
우리나라 역사상 근친상간이고 다른 상간이고 닥치는대로 짐승처럼 황음을 저지른 사람이 있다. 고려 28대왕 충혜왕이다. 아버지의 후궁들을 건드렸고 아버지 계비인 숙공 회령공주를 강간했고 이모와도 간통했다. 그는 원나라에 소환되어 귀양길에 죽었다. 짐승이나 다름없는 인간이 수많은 여인들을 버려놓았다. 어디서 임질을 얻었는데 그녀와 상관한 여자들은 거의가 이 병으로 고생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지금부터 200년 전 만해도 결혼하면 여자가 시집에 와서 사는 것이 아니라 남자가 장가가서 처가살이 하는 것이 오랫동한 전해내려온 풍습이었는데 이 때는 장모와 사위가 간통하는 수가 많았다. 발각이 되면 중벌은 면하는 대신에 딸과 사위는 이혼해야 됐다고 한다.
근친상간은 인간에게는 염산 날부민(마약의 일종) 같은 것. 한번 중독에 걸리면 헤어 나오지 못한다. 돌로 쳐 죽여도 목을 쳐 죽여도 인류가 존재하는 한 도도히 흐르는 물줄기처럼 멈추지 않는 인간의 본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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