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도민일보>의 '반성문' 얘기를 한 김에 이 얘길 하나 더 할랍니다.
동서고금을 통털어 반성문 류의 글들은 참 많습니다.
참회록, 사죄문, 공개사과문, 고백록 등이 아닐끼 싶습니다.
대표적으로는 로마시대에 아우구스티누스가 쓴 '참회록'이 가장 유명하며,
루소가 자서전 형식으로 쓴 '참회'도 있는데, 이는 나중에 고백문학의 선구로 불리죠.
한국인으로서는 일제말 저항시인 윤동주가 쓴 '참회록'이라는 시가 인구에 회자되며,
춘원 이광수가 해방 후 자신의 친일을 속죄하며 쓴 '나의 고백'이라는 글도 있습니다.
(* 춘원의 '나의 고백'은 진실한 속죄라기보다는 자기변명에 가까와 실망스럽습니다)
이들 가운데는 제가 읽어본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만,
그간 제가 읽은 반성문 가운데 가장 '울림'이 컸던 것이 하나 있는데요,
지난 2008년 작고한 이항녕(전 홍익대 총장) 박사의 반성문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박사는 1915년 충남 아산 태생으로, 1940년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시절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이 가장 선망했던 고등고시에 합격해
1941년부터 해방 때까지 경남 하동, 창녕 두 곳에서 군수를 지냈습니다.
그의 말대로라면 당시 군수는 고등관이니 그도 '친일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울 정릉 자택에서 필자와 인터뷰하는 생전의 이항녕 박사(1998. 9. 24, 필자 촬영)
일제에 협력한 부일배 등 '친일파'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와 같은 관료도 있고, 이광수 같은 문화계 인사도 있고, 박흥식 같은 기업인도 있습니다.
기준을 뭘로 잡느냐에 따라 그 대상자 숫자는 엄청나게 차이가 납니다만,
개인적인 제 생각으로는 어림잡아도 수 천, 수 만 명은 된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해방 후에 자시의 친일행적을 글이나 말로 사죄한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얼핏 기억나는 인물로는 이항녕 박사 외에는 현석호, 신현준 정도입니다.
현석호는 제2공화국 때 국방부장관을 지낸 인물로 일제말기 전남도 산업부장을 지냈으며.
신현준은 만주군관학교 출신으로 간도특설대에도 근무한, 만주군 장교 출신입니다.
벌써 10년도 넘은 얘깁니다.
당시 저는 대한매일(현 서울신문)에서 ‘친일파 군상’을 연재하고 있었는데요,
그가 양심적이라는 소릴 들은데다 친일파 중 생존자도 몇 안돼 그를 꼭 한번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인명록을 뒤져 그의 자택전화를 찾아 무작정 그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마침 그와 전화연결이 돼 무작정 인터뷰에 응해달라고 부탁들 드렸지요.
그런데 뜻밖에도 그는 첫 마디에 집으로 찾아오라고 하더군요.
저는 그길로 정릉 그의 자택을 찾아가 두어 시간 인터뷰를 했는데요,
이런 일로는 그게 아마 그의 마지막 인터뷰가 아닌가 싶습니다.
친일파들의 대다수는 해방후 미군정, 이승만 정부에 협력하면서 기득권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들과 좀 달랐습니다.
해방직후 미군정에 사표를 던진 그는 범어사로 향했습니다.
그리고는 낮에는 인근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밤에는 수행을 했습니다.
그 나름의 '속죄'이자 '근신'이었던 게지요.
그것만으로도 부족했던지 그는 수필과 자전적 소설을 통해 자신의 친일을 사죄했습니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글과 말을 통해 지속적으로 자신의 친일 죄과를 반성했습니다.
[참조 : '친일' 참회한 총독부 군수 출신 이항녕 박사]
참고로, 그의 반성(反省)은 다음 몇 가지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첫째, 그는 유명한 법학자요, 대학총장 출신임에도 체면 불구하고 반성한 점,
둘째, 그 누구도 그에게 반성을 요구하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자진해서 반성한 점,
셋째, 반성의 내용이 아주 구체적이고 솔직하여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점,
넷째, 여러 차례에 걸쳐 지속적으로 반성했으며, 그 내용이 일관돼 있다는 점.
이제 그가 1980년 1월 한 일간지에 기고한 반성문을 소개합니다.
- 이항녕 (전 홍익대 총장)
역사(歷史)의 전환점(轉換點)에 서 있는 오늘에 있어서 나의 심정은 매우 착잡합니다. 온 세상이 민주화(民主化)를 위한 정치발전 작업에 들떠 있지만, 나는 그것보다도 나 자신이라는 인간이 싫어졌고 나의 처세에 구토를 느낍니다.
민주주의를 위해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갖은 고난을 겪은 사람들이 이제 내 앞에 서 있습니다. 그들이 어려움을 참을 때에, 그들이 지조(志操)를 지킬 때에, 그들이 순교(殉敎)하고자 할 때에 나는 도망을 쳤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을 때 나는 입맛이 없다고 아내가 정성껏 마련해 준 음식을 타박하고, 유명한 음식점을 찾아 식도락(食道樂)을 즐겼고, 많은 사람이 생계비(生計費)도 못되는 보수를 받고 허덕일 때 나는 판공비(辦公費)가 모자라서 일류 요정에 나가 미인의 손을 자주 못 만져보는 것을 불만스럽게 생각했고, 많은 사람이 버스도 제대로 못타고 교통지옥에 시달릴 때 나는 고급 승용차의 폭신한 쿠션에 앉아서 그 교통지옥을 영화처럼 감상했습니다.
나는 고작해야 잡문(雜文) 나부랭이나 쓰는 주제에 다른 동료들이 학문적 연구가 부족하다고 짜증을 내었고, 나는 내가 조석(朝夕)으로 직접 거느리고 있는 친자식들에게 조차 아무런 감화(感化)를 못 미치면서도 다른 교수들이 학생지도를 소홀히 한다고 나무랐고, 나에게는 나라를 생각하고 부모를 중히 여기는 생각은 없으면서 학생들에게는 忠-孝를 강조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는 대학총장이라는 영화를 잘 누려왔습니다. 생각해보면 희극(喜劇)이요, 만화(漫畵)입니다.
첫째는 내가 학자랍시고 강단에서 행세했다는 것이 희극입니다.아니 희극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비극이라는 것이 옳겠지요. 나는 학자로서의 소양을 갖추지 못한데다 게을러서 내 전공과목에 관한 기초적인 지식도 불충분합니다.
나는 대학에서 영어나 독일어를 배우기도 하였지만, 통 공부를 안 해 외국원서(外國原書)를 독파(讀破)할 능력이 없어서 고작해야 일본어 책에서 겨우 얻은 얄팍한 밑천으로 억지로 학자 행세를 해왔습니다.
나에게는 아무런 새로운 학문체계도 없고 어떠한 독창적인 견해도 없으면서, 조그만 밑천을 값싸게 팔아넘기고는 오히려 세태를 초월하여 성실하게 진리만을 탐구하는 독학자(篤學者)를 시세(時勢)에 어둡다고 얕잡아보고 비웃었습니다.
나는 겸손보다는 오만스럽게 구는 것이 나의 권위를 높인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사람이 버젓하게 학자행세를 할 수 있었고, 이런 사람이 이 교육계의 원로라고 떠받침을 받아왔으니 어찌 비극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학생을 교육한다는 것도 희극입니다. 교육한다는 것은 조금이라도 나은 사람이 조금이라도 모자라는 사람에게 모범을 보여 그대로 따라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명색이 교육자이지 학생보다 눈곱만큼이라도 나은 것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들만도 훨씬 못하며 아무것도 모범을 보일 것이 없습니다. 내가 누구에게 가르쳐주며 누가 나에게 무엇을 배우겠습니까!
나는 학생들처럼 순진하지 못하고 너무나 타산적입니다. 나는 학생들처럼 솔직하지 못하고 너무나 위선적(僞善的)입니다. 나는 학생들과는 달리 세속적 출세경쟁에 바쁩니다. 나는 학생들처럼 인류와 나라와 학문에 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이해(利害)관계가 더 큰 관심사입니다.
그런 나 같은 사람을 모범으로 하여 학생들이 그것을 닮는다면 장차 우리나라가 어떻게 될 것이며, 인류의 장래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가 소위 사회의 지도층에 속한다고 하는 것도 만화요, 웃기는 일입니다, 나는 멸사봉공(滅私奉公)이라는 말은 자주 했어도 그것을 실행한 일은 없습니다. 나는 한 푼의 세금이라도 덜 낼 궁리는 쉴 새 없이 했어도 사회를 위하여 단 한 푼의 희사(喜捨)를 한 일이 없습니다.
나는 의식주의 걱정이 없건만 나보다 더 잘사는 사람을 미워했고, 나는 한 끼의 점심 값으로 수천 원을 쓰고도 하루 종일 뼈아프도록 일하고 겨우 1천 원도 못되는 삯을 받는 청소부 아주머니를 동정해 본 일이 없습니다. 이런 내가 무슨 지도층에 속한단 말입니까!
나의 최대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하루라도 더 오래 안일한 생활을 계속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더러운 욕망은 하필 오늘의 나의 철학이 아니라 일제시대부터 내가 만고불멸(萬古不滅)의 철칙으로 알고 내려온 나의 확신(確信)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나는 이 확신을 저주합니다.
나는 한일합방(韓日合邦) 때에 절개를 지킨 애국자의 자손들이 곤궁(困窮)하게 살고 있는데 친일파의 자손이 지금까지도 잘 사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나는 일제시대에 그들에게 아부한 사람들이 잘 살았고, 그 자손들이 좋은 교육을 받아 지금까지도 영화를 누리고 있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나 자신이 바로 그 한 사람입니다.
나는 일제 때에 그들에게 붙어서 민족의식을 상실한 것을 해방 직후에는 부끄럽게 생각했었으나 그 뒤 얼마 안가서 나의 일제행각(日帝行脚)에 대한 정당한 변명을 마련했습니다.그것은 시세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이었지요. 나는 4.19 이후에 그때까지의 비교육자적인 처신을 일시 후회했었습니다.
다시는 역사와 민족 앞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겠다고 맹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나는 다시 곡학아세(曲學阿世)의 길을 걸었습니다. 나는 학원(學園)의 영원한 발전보다도 일시적 무사를 택했습니다.
오늘의 우리나라에 진정한 학문이 없고 진정한 교육이 없는 것은 모두 나와 같은, 파렴치한(破廉恥漢) 때문입니다. 나는 이것을 깊이 참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새사람이 되기를 결심도 합니다. 그러나 이 결의가 과연 얼마나 오래갈는지 도무지 자신이 없습니다. 나는 심한 건망증환자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또다시 그 더러운 처세철학을 소생시켜 추(醜)한 사람이 되지 않도록 동료들은 나를 꾸짖어 주시고 제자들은 나를 손가락질 해 주기를 바랍니다.
<조선일보 1980. 1. 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