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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장한가(長恨歌) - 백거이(白居易)|

장한가(長恨歌)


백거이(白居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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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가(長恨歌)는 당나라 때 백거이가 지은 장편 서사시이다.  헌종 원화 원년인 806년에 지어졌다. 당 현종 이융기와 그의 비 양귀비와의 사랑을 읊은 노래이다.


당 현종(712-756)이 죽은 지 50년이 지나 백거이 나이 35세에 친구 왕질부(王質夫)와 진홍(陳鴻)이 그를 찾아와 선유산에 놀러 갔다. 거기서 당 현종 이융기와 양귀비와의 로맨스가 화제에 올랐다. 왕질부의 제의로 백거이는 시인의 상상력을 발휘해서 시로 진홍은 산문으로 그들의 사랑 이야기를 신화적인 내용으로 애절하게 썼다.


장한가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첫 부분은 양귀비가 총애를 받고,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 양귀비가 죽는 장면, 둘째 부분은 양귀비를 잃고 난 후의 현종의 쓸쓸한 생활, 셋째 부분은 죽어서 선녀가 된 양귀비와 만나보는 장면으로 되어 있다.

특히, 마지막 구절은 작가적인 상상력을 최대한 드러내 애절함을 고조시킨다.


在天願作比翼鳥 (재천원작비익조)

하늘에선 날개를 짝지어 날아가는 비익조(比翼鳥)가 되게 해주소서

在地願爲連理枝 (재지원위연리지)

땅에선 두 뿌리 한 나무로 엉긴 연리지(連理枝)가 되자고 언약했지요


▶비익조(比翼鳥): 암수가 다 눈이 하나, 날개가 하나인 새. 

늘 날개를 나란히 하고 난다하여 부부의 금슬이 좋음을 이르는 말


▶연리지(連理枝): 뿌리가 다른 두 그루의 나무의 가지가 서로 맞닿아 나뭇결이 통하여 서로 떨어지지 않는 것을 말하며 상사수(相思樹)라고도 한다. 부부간의 아름다운 사랑을 이야기 할 때 나오는 말이다. 


어원은 송나라의 마지막 왕 폭군 언(偃) 때 그의 무도한 행위로 인하여 죽은 한빙(韓凭)과 그의 처 식씨(息氏)가 묻힌 각각의 무덤에서 가래나무가 자라 그 가지가 서로 합해졌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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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청지(華淸池)


장안(長安) 화청지는 당 현종이 양귀비에게 지어주었고, 온갖 희로애락을 누렸던 여산온천이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이곳에서 장한가 공연이 매일 있다. 이 공연은 2007년 정비되어 2008년부터 본격적인 선을 보이고, 있다. 화청지의 장한가 공연은 여산 전체를 무대로 사용하여 벌이는 엄청난 스케일의 서양식 기획과 중국식 오페라극 공연으로, 압도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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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청지(華淸池, 중국어: 华清池 화칭츠[*])는 중화인민공화국 산시성 시안 시의 동쪽 35km 떨어진 '여산' 아래에 위치한 곳으로, 북으로는 위수를 마주하고 있다. 이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온천이 있어서, 43도의 온천수가 샘 솟는다. 온천이 드문 지역이다 보니 3,000년 전인 주나라 때부터 그 역사가 거슬러 올라간다. 주나라 때는 '여궁', 진나라 때는 '여산탕', 한나라 때는 '이궁'으로 당나라 때는 '화청궁'으로 불렸다.

당 현종이 양귀비에게 지어준 '해당탕'이 있는 곳이며 이때 전성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당 현종 말기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 화청지는 대부분 불타고 후에 청나라와 중국 정부에서 30%만 복원하는데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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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가(長恨歌)는 당현종(唐玄宗)과 양귀비(楊貴妃)를 주제로 한 담화시(譚話詩)다. 현종(玄宗-685~762)은 당(唐) 나라의 6대 황제로써, 이름은 이융기(李隆基)이고, 45년 동안 재위에 있었다. 학문과 문재(文才)가 뛰어났다. 즉위 초에는 정사에 온 힘을 경주하여 개원(開元)의 치(治)를 이루어냈다. 그러나 총명했던 현종도 만년이 되자, 정사에 점점 게으르게 되고 사치와 애욕에 빠지면서 아첨만을 일삼는 신하들을 가까이 하여 나라를 거의 파탄지경까지 끌고 갔다.

736년 장구령(張九齡) 등의 현신들을 대거 내쫓고, 간신 이임보(李林甫)를 기용했다. 임보(林甫)는 그의 간사스럽고 교활한 재주를 발휘하여 무혜비(武惠妃) 및 환관(宦官)들과 결탁, 황제(皇帝)를 미혹시켜 국정(國政)을 어지럽혔다. 얼마 후 무혜비가 죽자(745), 현종(玄宗)은 무혜비 사이에서 난 그의 아들 수왕(壽王) 이모(李瑁)의 비(妃)인 양(楊)씨를 빼앗아 귀비(貴妃)로 삼았다. 현종이 양귀비를 총애(寵愛)하여 그녀의 일족도 모두 높은 관직에 등용되었다. 현종은 양귀비의 6촌 오빠 양쇠(楊釗)에게는 국충(國忠)이라는 이름을 직접 하사하고, 이임보(李林甫)의 뒤를 이어 재상(宰相)으로 임명했다.

이 때부터 현종(玄宗)이 정사를 게을리 함으로써 당나라의 국정은 문란하게 되어 지나친 향락과 사치로 국고가 바닥이 나고, 백성들에게는 중과세를 부과하게 되니 백성들의 생활은 곤궁해졌다. 두보(杜甫)의 <自京赴奉先縣詠懷(자경부봉선현영회 : 장안에서 봉선으로 가면서 회한을 노래함)>라는 시의 “朱門酒肉嗅(주문주육취 : 붉은 대문 안의 궁궐에는 고기와 술 썩는 냄새가 진동하고) 路有凍死骨(로유동사골 : 봉선으로 가는 길 위에는 얼어 죽은 자의 해골이 가득하구나!)” 이라 읊은 것은 그 당시의 학정과 백성들의 고통스러운 생활을 한탄한 것이다.

문(文)을 숭상하고 무(武)를 천하게 여겼으므로, 지방 절도사(節度使)에는 이민족의 무장들을 기용했다. 그 때문에 당나라 조정은 지방절도사들을 통제하지 못한 결과, 결국은 ‘안록산(安祿山)의 난(亂)’이 일어나게 되어 당(唐)나라는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안록산(安祿山)은 영주(營州)의 유성(柳城-河北省)에 살던 호인(胡人)으로, 성격이 굳세고 용감하면서도 사람들의 뜻에 영합하기를 잘 했다. 환관(宦官)에게 뇌물을 주어 현종(玄宗)의 신임을 얻어, 평려(平麗)의 절도사에서 범양(范陽-幽州), 하동(河東)의 절도사를 겸하고, 또 이임보(李林甫), 양귀비(楊貴妃)에게 잘 보여 동평왕(東平王)이 되었다.

그러나 양국충(楊國忠)이 재상(宰相)이 되자, 그와 의견이 같지 않아 드디어 범양(范陽)에서 반기를 들었는데, 천보(天寶) 14년 기원 755년) 11월에, 15만의 병력으로 하북(河北)을 평정하고, 다음 해 장안(長安)을 점령하자, 국호(國號)를 대연(大燕), 연호(年號)를 성무(聖武)로 하여 스스로 황제라 칭했다.

현종(玄宗)은 서둘러서 도성(都城)을 빠져 나와 촉(蜀)으로 달아나던 중, 백여 리 되는 마외파(馬嵬坡)에 지날 때, 황제의 근위대가 ‘난(亂)의 원인이 된 양국충(楊國忠)과 양귀비(楊貴妃)를 죽이라.’고 요구하니, 현종(玄宗)은 할 수 없이 두 사람을 사사(賜死)했다. 양귀비(楊貴妃)는 마외파(馬嵬坡)의 불사(佛寺)에서 고력사(高力士)에 의하여 교살되었다.

현종(玄宗)은 태자(太子) 이형(李亨)에게 양위(讓位)하고 국권 회복에 전념하게 하여, 태자(太子)는 756 년 영무(靈武)에서 즉위, 숙종(肅宗)이 되고 현종(玄宗)은 상황(上皇)이 되었다. 뒤에 곽자의(郭子儀)가 장안(長安)을 탈환하고 757 년에 숙종(肅宗)은 상황(上皇)과 함께 장안(長安)으로 환도하였다.

현종(玄宗)은 그 후 실의에 빠져 외롭게 지내다가, 78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한편 안록산(安祿山)은 그의 아들 안경서(安慶緖)에게 살해 당하고 그 부하들이 얼마간 항거를 계속했으나 결국은 란이 발생한지 8년만에 진압되었다.

양귀비(楊貴妃)는 지금의 사천성인 촉주(蜀州)의 사호(司戶) 양현염(楊玄琰)의 딸로서 일찍이 고아가 되어 숙부(叔父)인 하남(河南)의 부사조(府士曹) 양현경(楊玄璥)의 집에서 자랐다. 후에 황태자 수왕(壽王) 이모(李瑁)의 비가 되었다.

현종은 수왕의 비가 절세미녀라는 소리를 듣고 사람을 시켜 술자리에 불러오도록 시켰다. 현종이 보니 수왕비는 미모가 빼어날 뿐 아니라 음악이나 가무에도 뛰어난 재주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술자리에서 현종이 직접 작곡한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이라는 악보를 보자 그녀는 즉석에서 곡에 맞추어 노래와 춤을 추었다. 현종은 이로써 양귀비에게 혼백을 빼앗기게 되었다. 현종은 우선 양귀비를 여도사(女道士)라는 관직에 임명하고 태자궁에서 남궁(南宮)으로 옮겨 살게 한 다음 태진(太眞)이라는 호를 내리고 다시 남궁을 태진궁(太眞宮)이라 고쳐 부르게 하였다. 이때 귀비의 나이는 22 세, 현종(玄宗)은 56세였다.

백거이는 시(詩)에서 불륜(不倫)의 사실은 건드리지 않고, 아름다운 연애(戀愛) 이야기만을 다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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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가-백거이(白居易)

漢皇重色思傾國(한황중색사경국) : 황제 미색을 귀히 여겨 미인을 생각했으나 
御宇多年求不得(어우다년구부득) : 천하를 다스린 지 몇 년 지나도 찾지 못했다.
楊家有女初長成(양가유녀초장성) : 양씨 집안에 딸이 있어, 이제 막 성숙하여
養在深閨人未識(양재심규인미식) : 깊숙한 안방에 있어 사람들은 알지도 못했다.
天生麗質難自棄(천생려질난자기) : 타고난 아름다운 본능을 스스로 어쩌지 못해
一朝選在君王側(일조선재군왕측) : 하루아침에 뽑히어 임금 곁에 있게 되었다.
回眸一笑百媚生(회모일소백미생) : 눈동자 굴리며 한번 웃으면 온갖 교태 생겨
六宮粉黛無顔色(육궁분대무안색) : 육궁의 화장한 미녀들이 얼굴빛을 잃었다.
春寒賜浴華淸池(춘한사욕화청지) : 봄 날씨 쌀쌀하여 화청지에서 목욕하는데
溫泉水滑洗凝脂(온천수골세응지) : 온천물이 미끄러워 살에 낀 기름을 씻는다.
侍兒扶起嬌無力(시아부기교무력) : 예쁘고 가련하여 무력하여 시녀들이 부축하여
始是新承恩澤時(시시신승은택시) : 이 때에 바로 새로 임금님 은혜를 받게 된다네.
雲鬢花顔金步搖(운빈화안금보요) : 구름머리, 꽃 얼굴, 걸으면 흔들리는 금장식물
芙蓉帳暖度春宵(부용장난도춘소) : 연꽃 장식 휘장 속에서 따뜻한 봄밤을 보낸다.
春宵苦短日高起(춘소고단일고기) : 봄밤은 너무 짧아 해가 이미 높이 솟으니
從此君王不早朝(종차군왕부조조) : 이 때부터 임금님은 아침 조회에 가지 않았다.
承歡侍宴無閑暇(승환시연무한가) : 기뻐 잔치를 벌임에 한가한 시간이 없었다.
春從春游夜專夜(춘종춘유야전야) : 봄에는 봄 따라 놀고 밤에는 새도록 놀았다.
後宮佳麗三千人(후궁가려삼천인) : 후궁에 미녀가 삼천 명이나 되지만
三千寵愛在一身(삼천총애재일신) : 삼천 미녀의 총애가 오직 한 몸에 머물렀다.
金屋粧成嬌侍夜(금옥장성교시야) : 금빛 궁궐에서 화장하고 교태로 황제 모시는 밤
玉樓宴罷醉和春(옥누연파취화춘) : 옥루의 연회가 마치자 취하여 봄날처럼 따뜻했다. 
姊妹弟兄皆列土(자매제형개렬토) : 형제자매가 모두 봉토를 나누어 받았으니
可憐光彩生門戶(가련광채생문호) : 부러워라, 광채가 가문에 생생하였다.
遂令天下父母心(수령천하부모심) : 마침내 세상의 부모 된 사람들 마음이
不重生男重生女(부중생남중생녀) : 아들 낳는 일보다 딸 낳은 일을 귀하게 여겼다.
驪宮高處入靑雲(려궁고처입청운) : 여궁의 높은 곳으로 푸른 구름 모여들고
仙樂風飄處處聞(선낙풍표처처문) : 신선의 음악이 바람에 날려 곳곳에서 들려온다.
緩歌慢舞凝絲竹(완가만무응사죽) : 느린 노래, 느린 춤이 악기에 어울려 행해지니
盡日君王看不足(진일군왕간부족) : 종일토록 보아도 황제는 다시 보고 싶어 했다.
漁陽鼙鼓動地來(어양비고동지내) : 어양 땅에서는 전쟁의 북소리가 땅을 울리니
驚破霓裳羽衣曲(경파예상우의곡) : 그 놀라움에 예상우의곡도 소리가 끊기었다.
九重城闕煙塵生(구중성궐연진생) : 구궁궁궐에서 전쟁의 연기와 먼지 일어나
千乘萬騎西南行(천승만기서남항) : 수천수만 수레와 말들이 서남으로 피해갔다.
翠華搖搖行復止(취화요요항복지) : 화려한 깃발 흔들거리며 가다가 다시 서며 
西出都門百餘里(서출도문백여리) : 서쪽으로 대궐문을 나와 백여 리를 나갔다.
六軍不發無奈何(육군부발무나하) : 모든 군대가 움직이지 않으니 이를 어찌하나
宛轉蛾眉馬前死(완전아미마전사) : 아름다운 양귀비가 임금 말 앞에 죽는데
花鈿委地無人收(화전위지무인수) : 꽃비녀가 땅에 떨어져도 줍는 사람 없었다.
翠翹金雀玉搔頭(취교금작옥소두) : 취교와 금작과 옥소두 같은 장신구도 버려졌도다.

君王掩面救不得(군왕엄면구부득) : 임금은 얼굴을 가리려 했으나 어쩔 수가 없어
回看血淚相和流(회간혈누상화류) : 돌아보니, 피눈물이 서로 엉기어 흘러내렸다.
黃埃散漫風蕭索(황애산만풍소삭) : 누런 흙먼지 흩어져 자욱하고 바람은 스산한데
雲棧縈紆登劍閣(운잔영우등검각) : 구불구불한 잔도를 지나가서 등검각에 올랐다.
峨嵋山下少人行(아미산하소인항) : 아미산 아래에는 다니는 사람 드물고
旌旗無光日色薄(정기무광일색박) : 깃발들은 빛을 잃고 햇빛도 엷어졌다.
蜀江水碧蜀山靑(촉강수벽촉산청) : 촉 땅의 물빛은 보석 같고 산은 푸른데
聖主朝朝暮暮情(성주조조모모정) : 임금에게는 아침마다 저무는 마음이었다.
行宮見月傷心色(항궁견월상심색) : 행궁에서 보는 달도 상처받은 양귀비 얼굴빛
夜雨聞鈴腸斷聲(야우문령장단성) : 밤비에 들리는 방울소리도 애간장 끊는 소리였다.
天旋地轉廻龍馭(천선지전회용어) : 난리가 평정되어 임금님 수레 돌아오는데
到此躊躇不能去(도차주저부능거) : 여기에 이르러서는 머뭇머뭇 차마 떠나지 못한다.
馬嵬坡下泥土中(마외파하니토중) : 마외역 언덕 아래 진흙 땅 속에서도
不見玉顔空死處(부견옥안공사처) : 옥 같은 얼굴은 보이지 않고, 죽은 곳만 쓸쓸하다
君臣相顧盡沾衣(군신상고진첨의) : 임금과 신하 서로 돌아보니 눈물이 옷을 적시고
東望都門信馬歸(동망도문신마귀) : 동쪽으로 여러 대궐문 바라보며 말 가는 대로 돌아간다.
歸來池苑皆依舊(귀내지원개의구) : 돌아오니 연못과 동산은 옛날과 같고
太液芙蓉未央柳(태액부용미앙류) : 태액의 부용, 미앙궁의 버드나무도 그대로였다.
芙蓉如面柳如眉(부용여면류여미) : 연꽃을 봐도 양귀비 얼굴, 버들을 봐도 양귀비 눈썹
對此如何不淚垂(대차여하부누수) : 이런 정경보고 어찌 눈물을 흘리지 않으리오.
春風桃李花開日(춘풍도리화개일) : 봄바람에 복숭아꽃, 오얏꽃 피는 날이요
秋雨梧桐葉落時(추우오동섭낙시) : 가을비에 오동나무 잎 떨어지는 때이로다.
西宮南內多秋草(서궁남내다추초) : 서궁 남쪽 안에는 가을 풀이 무성하고
落葉滿階紅不掃(낙섭만계홍부소) : 낙엽이 계단에 붉게 가득 쌓여도 쓸지 않는다.
梨園子弟白發新(이원자제백발신) : 이원의 자제들 이미 늙어 백발이 새롭고
椒房阿監靑娥老(초방아감청아노) : 초방의 태감도 젊은 궁녀도 모두가 늙었구나.
夕殿螢飛思悄然(석전형비사초연) : 저녁 궁궐에 반딧불 나니 양귀비 생각 처량하고
孤燈挑盡未成眠(고등도진미성면) : 외로운 등불 돋운 심지가 타버려도 잠이 오지 않는다.
遲遲鐘鼓初長夜(지지종고초장야) : 느리고 느린 종소리를 처음으로 길게 느낀 밤
耿耿星河欲曙天(경경성하욕서천) : 밝고 밝은 별과 은하수, 하늘이 밝아오는구나.
鴛鴦瓦冷霜華重(원앙와냉상화중) : 원앙새 장식 기와가 차가워 서리꽃은 더욱 짙고
翡翠衾寒誰與共(비취금한수여공) : 비취빛 찬 이불을 누구와 함께 하나
悠悠生死別經年(유유생사별경년) : 아득한 생사의 이별은 해가 지나가도
魂魄不曾來入夢(혼백부증내입몽) : 그 혼백은 아직 돌아와서 꿈에도 들지 않는다.

臨邛道士鴻都客(임공도사홍도객) : 임공의 도사로서 도성에 머무는 길손 있어
能以精誠致魂魄(능이정성치혼백) : 정성으로 혼백을 불러들일 수 있다고 하는구나.
爲感君王展轉思(위감군왕전전사) : 황제의 잠 못 드는 처지가 가련하여
遂敎方士慇懃覓(수교방사은근멱) : 마침내 방사를 시켜서 은근히 찾아보게 하였다.
排空馭氣奔如電(배공어기분여전) : 구름에 올라 공기를 타니 빠르기가 번개 같아 
升天入地求之遍(승천입지구지편) : 하늘에 오르고 땅을 들며 두루 찾아보았다.
上窮碧落下黃泉(상궁벽낙하황천) : 위로는 하늘 끝까지 아래로는 황천까지 찾았으나
兩處茫茫皆不見(양처망망개부견) : 두 곳이 너무 넓어 어디서도 찾아보지 못했다.
忽聞海上有仙山(홀문해상유선산) : 바다 위에 신선이 사는 산이 있다는 말 들었으나
山在虛無縹緲間(산재허무표묘간) : 아득한 사이에 산은 텅 비어 있었다.
樓閣玲瓏五雲起(누각령롱오운기) : 영롱한 누각에 오색구름 피어나고
其中綽約多仙子(기중작약다선자) : 그 안은 아름다운데 선녀들이 많이 있었다.
中有一人字太眞(중유일인자태진) : 그 중에 한 사람 있었으니 이름은 태진인데
雪膚花貌參差是(설부화모삼차시) : 눈 같이 흰 피부, 꽃 같이 고운 얼굴이 양귀비 같았다. 
金闕西廂叩玉扃(금궐서상고옥경) : 황금 대궐 서쪽 행랑에서 옥대문을 두드려
轉敎小玉報雙成(전교소옥보쌍성) : 여종인 소옥에게 전하여 쌍성에게 알려주었다.
楣漢家天子使(문도한가천자사) : 한나라 황제의 사신이 왔다는 말 전해 듣고
九華帳裏夢魂驚(구화장리몽혼경) : 아홉 겹의 깊은 휘장 속에서 잠자던 혼이 놀랐다.
攬衣推枕起徘徊(남의추침기배회) : 옷을 잡고 베개 밀어 제치고 일어나 배회하다가
珠箔銀屛迤邐開(주박은병이리개) : 주렴과 은병풍이 스르르 열리더니
雲鬢半偏新睡覺(운빈반편신수교) : 구름 같은 머리 반쯤 기운채로 막 잠이 깨어
花冠不整下堂來(화관부정하당내) : 화관도 정제하지 못한 채로 방에서 내려온다.
風吹仙袂飄飄擧(풍취선몌표표거) : 바람이 부니 신녀의 소맷자락이 날리어
猶似霓裳羽衣舞(유사예상우의무) : 예상우의곡으로 춤추는 듯 하였다.
玉容寂寞淚闌干(옥용적막누란간) : 옥 같은 얼굴에 고독이 깃들고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梨花一枝春帶雨(이화일지춘대우) : 배꽃 한 가지가 봄비에 젖은 듯이
含情凝睇謝君王(함정응제사군왕) : 정을 품고 눈물을 머금고 황제께 감사하였다.
一別音容兩渺茫(일별음용량묘망) : 한번 이별 뒤에 아련해진 황제의 음성과 얼굴
昭陽殿裏恩愛絶(소양전리은애절) : 소양전각 안에서의 임금의 은혜 끊어진 뒤로
蓬萊宮中日月長(봉래궁중일월장) : 봉래궁전 안에서의 세월은 길기만 하였습니다.
回頭下望人寰處(회두하망인환처) : 고개 돌려 인간 세상을 내려다보니
不見長安見塵霧(부견장안견진무) : 장안은 보이지 않고 티끌과 안개만 자욱합니다.
唯將舊物表深情(유장구물표심정) : 오직 지난날 쓰던 물건 가져다 나의 깊은 정 보이려 
鈿合金釵寄將去(전합금채기장거) : 자개함과 금비녀를 부쳐 보내려합니다.
釵留一股合一扇(채류일고합일선) : 비녀 한 개와 함 한 쪽을 증거로 남기려
釵擘黃金合分鈿(채벽황금합분전) : 비녀는 황금을 쪼개고 상자는 자개를 나누었다.
但敎心似金鈿堅(단교심사금전견) : 우리의 마음을 금비녀와 금상 자처럼 굳게 가져서
天上人間會相見(천상인간회상견) : 천상과 인간세상에서 서로 만나보려 합니다.
臨別殷勤重寄詞(림별은근중기사) : 떠나려 함에 은근히 거듭 부탁의 말을 하니
詞中有誓兩心知(사중유서량심지) : 말 가운에 서약함이 있으니 마음으로 알리라.
七月七日長生殿(칠월칠일장생전) : 어느 칠월 칠석 날 장생전에서
夜半無人私語時(야반무인사어시) : 사람 아무도 없는 깊은 밤에 사사로이 나눈 말
在天願作比翼鳥(재천원작비익조) :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기를 원하고
在地願爲連理枝(재지원위련리지) :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었기를 원하였다.
天長地久有時盡(천장지구유시진) : 높은 하늘도 장구한 땅도 다할 때가 있지만
此恨綿綿無絶期(차한면면무절기) : 이들의 한은 이어져서 끊어질 때가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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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귀비(楊貴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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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귀비(楊貴妃, 719년 6월 26일 ~ 756년 7월 15일)는 당 현종의 후궁이자 식부이다. 성은 양(楊)이고 이름은 옥환(玉環)이며, 귀비는 황비로 순위를 나타내는 칭호이다. 당 현종에게 총애받았지만, 과도해 안사의 난을 일으키는 원인이 돼서 경국지색이라고도 부른다.

서시왕소군초선과 더불어 중국의 4대 미인 중 일인이다.


출생

양옥환(楊玉環)은 719년 당 현종 집권 초기에 쓰촨성 촉주(蜀州)(현 두장옌 시)에서 태어나 포주(蒲州)의 영락(永樂)(현 산서성 융지 시)에서 자랐다. 양옥환의 고조부인 양왕(楊汪)은 수 양제 양광이 통치하던 시대에 중신이었다. 수나라의 멸망 이후 정나라의 왕세충을 모시고 살았다. 621년 당에 의해 왕세충이 패배할 때 양왕도 살해됐다. 양왕은 원래 산서성 화현(현 웨이난 시) 출신이었는데, 양왕 일가는 용락(현 윈청 시)에 이주해 기반을 다졌다.

양옥환의 부친 양현염(楊玄琰)은 촉주에서 호구를 조사하는 하급관리였고, 양현염의 가족은 양현염과 촉주로 이사했다. 양현염은 아들이 없었고, 양옥환과 양옥환의 언니를 세 명 낳았다. 양현염은 양옥환이 어렸을 때 죽어서 양옥환은 하남성 낙양에서 하급관리로서 근무하던 숙부 양현교(楊玄璬) 슬하에서 자랐다. 숙부는 가정교육에 엄격해 사서삼경을 가르치고 많은 시문을 외우게 했는데, 총명했던 양옥환은 숙부 집에 있던 기생 출신 하녀에게서 호선무(胡旋舞)를 몰래 배웠다.[1] 당시 감찰어사를 맡던 양옥환의 친척 양신명(楊愼名)과 양신명의 처는 양옥환을 자신들의 집에서 열리는 연회에 자주 초청했는데, 연회의 손님들 중에는 당 중종 이현의 딸 장녕공주도 있었다.[2] 장녕공주의 첫 번째 남편 양신교는 본래 양옥환과 같은 홍농 양씨 출신이었는데[3] 마침 장녕공주와 양신교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양회가 당 현종 이융기가 가장 총애하는 딸 함의공주(咸宜公主)와 혼인하게 되었다. 장녕공주는 이 혼례에서 빼어난 미모로 소문난 양옥환에게 들러리를 부탁했고, 양옥환은 함의공주와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함의공주처럼 혜비 무씨(惠妃 武氏)의 소생이었던 제18 황자 이모(李瑁)는 양옥환의 미모에 매료됐고, 함의공주의 주선으로 무씨도 양옥환을 마음에 들어 해 이융기에게 양옥환을 이모의 비로 달라고 청했다.[4] 무씨는 측천무후 무조(武曌)의 조카라는 이유로 황후에는 봉해지지 못했지만, 이융기에게서 가장 큰 총애받는 후궁이었기에 이융기는 무씨가 한 부탁을 들어주었다.


입궁과 수도


733년 개원 23년 16세 양옥환은 이모와 혼인했다. 이모는 무씨와 이임보의 후원으로 황태자에 추천됐으나, 무씨 사망 후 익년 환관 고력사(高力士)의 추천으로 이여(李璵)가 황태자로 책봉됐다.

무씨 사망 후 실의에 빠진 이융기를 위로하고자 고력사는 무씨와 닮은 양옥환이 이모와 화청지(華淸池)로 피서한다는 사실을 알고 이융기에게 화청지로 가라고 권했다.[5] 그 날 이후로 무씨를 닮은 미모에 시와 노래까지 능한 양옥환에게 감정이 생긴 이융기는 고력사와 이 일을 상의했다. 고력사는 양옥환을 만나 이융기의 의중을 암시했고, 이융기는 양옥환을 화산의 도사로 출가시켜 아들인 이모에게서 떼어놓고 궁내에 도교 사원인 태진궁(太眞宮)을 짓고 양옥환을 다시 이곳을 관리하는 여관(女冠)으로서 불러들였다. 이때 양옥환은 22세, 이융기는 57세였다.

745년 양옥환이 27세에 귀비가 되면서, 당은 서서히 끝자락을 달리게 된다. 이융기가 재위한 초기에는 개원의 치를 이룩할 정도로 어질게 정치했지만, 양옥환이 등장한 후 양옥환 일가의 전횡이 시작되면서, 당은 힘을 점점 잃게 된다. 양옥환의 세 오빠에게 모두 높은 벼슬을 주었고, 언니 세 명을 국부인에 책명할 정도로 이융기는 양옥환을 총애했다. 그중 양옥환의 사촌 오빠인 양소는 이융기에게 이름 ‘국충’을 하사받고 승상까지 올라 국정을 전횡한 인물로서 환관 고력사와 담합해 이융기를 정치에서 관심을 멀어지게 한다. 양옥환에게 셋째 언니인 괵국부인 양옥쟁이 있었는데, 미모가 아름다웠다. 이융기는 괵국부인을 보고 반해 양옥환에게 입궁시키라고 명하였는데, 양옥환은 질투해서이 명령을 거절했고, 사이가 점점 멀어지게 되어 이융기는 양옥환을 퇴궁하게 했는데, 고력사와 양국충이 두 사람을 화해하게끔 해서 두 사람은 사이가 다시 좋아졌다.


안사의 난과 최후


747년 절도사 안녹산이 등장해, 양옥환은 안녹산과 친해진다. 새로운 권력자의 등장에 위기를 느낀 양국충은 견제하는데, 이것은 안사의 난이 일어나, 당이 멸망하는 원인이 된다.

756년 지덕 원년 가서한은 안녹산에게 대패하면서 잡혔고 동관도 함락되었다. 이융기는 수도 장안을 빠져 나가, 촉(현 쓰촨성)으로 피난했고, 양옥환 및 양국충, 고력사, 이형(李亨)도 동행했다.

756년 7월 15일 섬서성 마외(馬嵬)에 이르러, 전란 원인이 된 양국충을 증오하던 진현례(陳玄禮)와 병사들은 양국충과 국부인들을 처형했으며, 현종에게 ‘도적의 근본’인 양옥환을 죽이라고 요구했다. 현종은 “양옥환은 심궁에 있었고 양국충의 모반과 무관하다”라고 옹호했지만, 고력사의 진언에 따라 양옥환에게 사세부득이 자살을 명했다. 고력사에 의해 양옥환은 목매달아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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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융기는 양옥환을 안장하고 장안에 돌아간 후 이장을 명했지만, 예부시랑 이규가 반대해서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이융기는 내시에게 은밀히 이장을 명했다.


기타


양귀비는 키 155cm에 몸무게 65kg의 건강한 체형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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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관계


  • 남편 : 당 현종
    • 양자 : 안록산
      • 양손녀 : 안비
  • 언니 : 한국부인 양옥패
  • 언니 : 괵국부인 양옥쟁
  • 언니 : 진국부인 양옥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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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현종 이융기(唐玄宗 李隆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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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현종 이융기(唐玄宗 李隆基, 685년 9월 8일 ~ 762년 5월 3일)는 중국 당나라의 제6대 황제이다. 별호는 당명황(唐明皇)이며, 당 예종 이단의 3남으로, 어머니는 숙명황후 유씨이다. 당 태종 이세민 이후, 번영을 이끌었으나, 동시에 쇠퇴를 이끌기도 한 황제이다.

초기 생애

이융기는 처음에 초왕(楚王)으로 책봉되었으나, 후에 임치왕(臨淄王)으로 책봉되었다. 일찍이 별가 등 요직을 맡았으나, 당시 황후인 큰어머니 황후 위씨에게 모함을 받아 수도 장안으로 소환되었다. 710년, 위씨가 딸 안락공주와 결탁하여 황제인 중종 이현을 죽이자, 이것을 알아챈 이융기는 우림군 병사를 소집, 궁중으로 들어가 위씨와 안락공주를 죽이고, 이어 위씨 가문 모두를 몰살시켰다. 또한 자신의 할머니인 성신황제 무씨의 집안 무씨 일가까지 몰살시켰다.

이어, 고모 태평공주에게 아버지 예종 이단의 복위 주도 운동을 맡아달라 하였고, 그로 인해 이단은 다시 황제의 자리에 앉았고, 이융기는 평왕(平王)에 책봉되었다가 큰형인 이헌의 양보로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712년 9월 8일, 이때는 이융기의 27번째 생일이었다. 예종 이단은 황태자 이융기에게 황제의 위를 물려주고 연호를 선천(先天)이라 하니, 이가 당나라 제6대 황제인 현종이다.

현종 이융기가 즉위했으나, 그의 고모 태평공주는 황위를 노리고 있었다. 태평공주는 은밀히 여러 번 이융기를 독살하려 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으며, 713년에 이융기는 태평공주와 그 일당을 모두 죽여버렸다.


개원의 치


유능한 재상들의 보좌

현종 이융기는 1년 뒤 713년에 연호를 개원(開元)으로 바꾸고, 정치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현종을 섬기던 관리중에는 유능한 재상들이 많았는데, 요숭(姚嵩), 한휴송경장구령,소숭 등이었다. 이들 모두 각각의 능력이 출중하고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지극하였다 한다. 그중에도 요숭의 공이 가장 높아, 이융기는 그를 승상에 임명하기도 했다. 요숭은 그에게 가난의 퇴치를 포함한 치국의 10가지 조건을 제시하였고, 이융기는 이것을 모두 수용하였다. 한휴는 언제나 이융기에게 직언을 올렸다. 하지만 소숭은 이융기에게 언제나 순종적이고 아첨을 하였다 한다.

애민정치

고 고우영 화백의 《만화 십팔사략》(두산동아)에 따르면, 이융기는 "짐이 마르더라도, 천하와 백성들이 살찌면 아무 여한이 없다."라고 하였다.[1] 이융기가 재위 초기에 얼마나 민생위주의 정치에 전력을 쏟았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융기는 중앙의 유능한 관리를 지방에 도독이나 자사로 파견하였고, 적성에 맞지 않는 관리는 모두 교체하였다고 전해진다. 심지어는 나라에 가뭄이 돌자, 황궁의 을 배고픈 민중들에게 나누어주는 등 어진 정치를 행하였고, 환관과 인척을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하여 정치가 문란해질 위험을 미리 막았다. 또한 이융기는 사찰과 승려의 수를 줄이고, 권력가들을 제압하는 한편, 조정을 정비하여 상벌을 엄정히 나누어 주어서 중종 이후 혼란스러웠던 정치 상황을 안정시켰다. 이융기의 훌륭한 정치덕분에 당나라의 국력은 당연히 강성해졌으며, 태종 이세민이 이룩한 태평성세에 버금가는 치세를 하여 후세 사람들은 이를 당시의 연호인 개원(開元)을 따 '개원의 치(治)'로 불렀다.

양귀비의 등장

이러한 치세가 계속되자, 당 현종 이융기는 거만해져서 자신을 위해 직언하는 훌륭한 대신들을 내치고 자신에게 아첨을 떨고 순종하는 신하들을 중용하였다. 또, 이원을 세워 광대들을 키워내기도 했다. 그리고 이융기는 유능한 장구령을 해임하고 이임보를 승상으로 임명했는데, 이임보는 무식하고 무능한 인간이지만 아첨에 뛰어나서 이융기의 총애를 받아 승상까지 오를 수 있었다. 또한 이융기에게 오는 모든 정보를 차단하고 19년간이나 국정을 전횡한 간신배이기도 하다.

737년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무혜비마저 죽자, 방황하던 이융기는 어느 날, 한 여자를 본 순간 그녀에게 반해버려 만사가 손에 잡히지 않았고, 결국 당대 최고의 권력가인 환관 고력사를 시켜 그녀를 데려오게 한다. 그녀가 바로 수왕비 양옥환이었다. 양옥환은 이융기의 며느리였는데, 그녀의 미모에 반한 이융기가 그녀를 자신의 18남인 수왕 이모에게서 가로챘던 것이다.

이리하여 745년, 이융기의 나이 61세 때에 27세인 양옥환은 귀비에 책봉된다. 귀비는 황후 다음가는 자리였던 지라, 당시 황후가 죽고 없던 차에 그녀는 황후의 역할을 대신하다시피 했다. 이 여인이 바로 양귀비이다.


양귀비 일가의 전횡

현종 이융기는 죽은 양귀비의 아버지에게 대위제국공이란 벼슬을 내리고, 그녀의 숙부와 세 명의 친오빠에게도 높은 벼슬을 하사하였다. 또한 양귀비의 세명의 언니를 모두 국부인으로 책봉하여 그 세도가 매우 어마어마했다.

이융기는 그 중에서도 양귀비의 셋째언니 괵국부인에게도 반해, 그녀와도 애정 행각을 벌였다. 그녀를 질투한 양귀비가 괵국부인은 황궁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는 말도 있다. 이에 노한 이융기는 양귀비를 궁에서 내치기까지 했다.

이 양귀비의 일가 친척 중에서 가장 세도를 누린 사람은 양귀비의 사촌 오빠 양검이다. 양검은 이융기에 총애를 받아 이융기에게 '국충(國忠)'이란 이름을 하사받았다. 이임보가 죽자, 양국충은 승상에까지 올라 국정을 전횡하였다. 양국충도 소인배요 간신배인지라, 충신은 죽이거나 내치고, 아첨꾼들을 이융기 옆에 붙여놓는 등 갖은 전횡을 일삼았다.

당시 내쳐진 양귀비는 양국충의 집에 있었는데, 양국충이 환관 고력사와 담합하여 양귀비와 이융기의 관계를 화해시키려 했고, 이융기는 결국 그 화해를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양귀비와 같이 화청궁에서 목욕을 했는데, 그녀의 육체를 본 이융기는 다시 그녀에게 빠져들었다.


안록산과 양귀비

747년, 이융기는 절도사 안록산이 장안으로 오자,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고, 여기서 안록산과 양귀비가 처음 대면을 하게 된다. 안록산은 이융기와 양귀비의 총애를 받아, 양귀비의 수양아들이 되었고, 변방의 국방까지 책임지게 되었다. 양귀비는 늙은 이융기가 싫어졌을까. 그녀는 이제 체구가 우람한 안록산을 사랑하게 되었다.

이 때, 승상 양국충은 안록산의 등장으로 점점 위기감을 느꼈고, 이융기에게 안록산을 모함하였다. 그러나, 양귀비는 언제나 안록산을 변호하여 그를 위기에서 구했다. 양귀비는 조정의 권세까지 장악하게 되었던 것이다.


안·사의 난

천보(天寶) 14년인 755년, 안록산은 변방으로 돌아가, 부하 사사명과 함께 양국충 타도를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킨다. 이 반란이 바로 안사의 난이다. 반란이 일어나자 이융기와 양귀비양국충과 그 일가 친척들은 모두 장안에서 피신하였고, 반란군은 계속 장안을 향해 진격했다. 하지만 이융기를 호위하던 관군이 일행이 머무르고 있는 마외파에서 양국충과 그 일가를 모두 죽일 것을 강요하였고, 양국충이 놀라 허둥거리자, 군인들은 그를 끌어내어 을 베어버리고, 시체를 여러 조각으로 찢어갈겼다.

이들은 이융기가 쉬고 있던 역관에서 계속 시위를 하자, 신하 위견소, 위방진을 보냈으나 소용이 없자 이융기 자신이 그들을 설득을 하기 시작했다.

군인들은 양귀비를 죽일 것을 강요하였고, 고력사 역시 선택이 없다고 하자, 이융기는 어쩔 수 없이 양귀비에게 자결 명령을 내렸다. 양귀비는 울면서 역관 옆 나무에 목을 매어 죽었다. 이 때, 그녀의 나이 38세, 때는 756년이었다. 양귀비가 죽었다는 소리를 들은 군인들은 환성을 내지르며 다시 이융기를 서쪽으로 행군했다. 그러나 같이 따라온 황태자 이형은 마외파에 남아 조정 일을 주관하였고, 북쪽으로 올라가 영무에서 황제에 오르고, 이융기를 태상황으로 삼았다.


최후

757년 12월, 태상황 이융기는 장안으로 돌아왔고, 감로전에 거처하며 쓸쓸한 나날을 보냈다. 5년 뒤인, 762년 5월 2일에 양귀비에 대한 그리움과 지난날의 영화에 대한 허무함 때문에 병이 들었다. 그는 옥피리를 처량하게 불고, 궁녀를 불러 자신을 목욕시키라 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5월 3일 새벽에 붕어하니 그때 나이 78세였다.

생전 존호는 개원천지대보성문신무증도효덕황제(開元天地大寶聖文神武證道孝德皇帝)이고, 시호는 현종 지도대성대명효황제(玄宗 至道大聖大明孝皇帝)이며, 능호는 태릉(泰陵)이다.


사후 평가

며느리이기도 했던 양귀비와의 로맨스는 화제가 되어 장한가 등의 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의 성리학자 이현일 등은 그의 저서 갈암집에 '당나라 현종이 재물을 긁어 모으고 사치를 일삼았다.(唐玄宗斂財侈費)'고 비판하였다.

가족관계

황후: 3명

  • 폐황후 왕씨 (廢皇后 王氏, 688년 ~ 725년)
  • 정순황후 무씨 (貞順皇后 武氏, 699년 ~ 738년) - 원래는 혜비(惠妃)이나 사후에 현종의 의해서 추존. 측천무후의 종손녀.
  • 원헌황후 양씨 (元獻皇后 楊氏, 699년 ~ 729년) - 원래 봉호는 귀빈(貴嬪)이고, 숙종이 즉위한 후에 추존.

후궁: 17명

자녀

아들들: 23명

  1. 정덕태자 이종(靖德太子 李琮, ? ~ 752년) - 화비 유씨 소생. 원래 봉호는 담왕(郯王). 뒤에 봉천황제<奉天皇帝>로 추숭.
  2. 영왕 이영(郢王 李瑛, ? ~ 737년) - 여비 조씨 소생. 황태자에서 폐위됨.
  3. 섬왕 이형(陝王 李亨) - 원헌황후 소생. 후에 당 숙종으로 즉위.
  4. 체왕 이염(棣王 李琰, ? ~ 752년) - 덕비 전씨 소생.
  5. 악왕 이요(鄂王 李瑤, ? ~ 737년) - 덕의 황보씨 소생.
  6. 정공태자 이완(靖恭太子 李琬, ? ~ 755년) - 화비 유씨 소생. 원래 봉호는 영왕(榮王). 후에 태자로 추존.
  7. 광왕 이거(光王 李琚, ? ~ 737년) - 유재인 소생.
  8. 하도왕 이일(夏悼王 李一, 716년 ~ 717년) - 정순황후 소생. 조졸함.
  9. 의왕 이수(儀王 李璲, ? ~ 765년) - 화비 유씨 소생.
  10. 영왕 이교(潁王 李璬, 718년 ~ 783년) - 고첩여 소생.
  11. 회애왕 이민(懷哀王 李敏, 719년 ~ 720년) - 정순황후 소생. 조졸함.
  12. 영왕 이린(永王 李璘, ? ~ 757년) - 곽순의 소생.
  13. 수왕 이모(壽王 李瑁, 721년 ~ 775년) - 정순황후 소생.
  14. 연왕 이분(延王 李玢, ? ~ 784년) - 류첩여 소생.
  15. 성왕 이기(盛王 李琦, 723년 ~ 764년) - 정순황후 소생.
  16. 제왕 이환(濟王 李環, ? ~ 768년) - 종미인 소생.
  17. 신왕 이황(信王 李瑝, ? ~ 774년) - 노미인 소생.
  18. 의왕 이자(義王 李玼, ? ~ 784년) - 염재인 소생.
  19. 진왕 이규(陳王 李珪, ? ~ 784년) - 왕미인 소생.
  20. 풍왕 이공(豊王 李珙, ? ~ 764년) - 진재인 소생.
  21. 항왕 이전(恆王 李瑱) - 정재인 소생.
  22. 양왕 이선(涼王 李璿, ? ~ 774년) - 무현의 소생.
  23. 변애왕 이경(汴哀王 李璥, ? ~ 736년) - 무현의 소생.

원래 7명이 더 있으나, 일찍 사망하였다.

딸들: 29명

  1. 영목공주(永穆公主) - 류첩여 소생. 사후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로 진봉.
  2. 상분공주(常芬公主)
  3. 효창공주(孝昌公主)
  4. 당창공주(唐昌公主)
  5. 영창공주(靈昌公主)
  6. 상산공주(常山公主)
  7. 만안공주(萬安公主)
  8. 상선공주(上仙公主) - 정순황후 소생.
  9. 회사공주(懷思公主)
  10. 진국공주(晉國公主) - 초봉은 고도공주(高都公主).
  11. 신창공주(新昌公主)
  12. 임진공주(臨晉公主. ? ~ 773년) - 덕의 황보씨 소생.
  13. 위국공주(衛國公主) - 초봉은 건평공주(建平公主).
  14. 진양공주(眞陽公主)
  15. 신성공주(信成公主) - 염재인 소생.
  16. 초국공주(楚國公主) - 초봉은 수춘공주(壽春公主).
  17. 창락공주(昌樂公主) - 고재인 소생.
  18. 영녕공주(永寧公主)
  19. 송국공주(宋國公主) - 초봉은 평창공주(平昌公主).
  20. 제국공주(齊國公主) - 원헌황후 소생. 초봉은 흥신공주(興信公主), 영친공주(寧親公主)
  21. 함의공주(咸宜公主, 722년 ~ 784년) - 정순황후 소생.
  22. 의춘공주(宜春公主) - 임소의 소생.
  23. 광녕공주(廣寧公主) - 동방의 소생.
  24. 만춘공주(萬春公主, 732년 ~ 770년) - 두미인 소생.
  25. 태화공주(太華公主) - 정순황후 소생.
  26. 수광공주(壽光公主, 726년 ~ 750년) - 조재인 소생.
  27. 낙성공주(樂城公主)
  28. 신평공주(新平公主, ? ~ 775년) - 상재인 소생.
  29. 수안공주(壽安公主) - 조야나희 소생.

연호

  1. 선천(先天) 712년
  2. 개원(開元) 713년 ~ 741년
  3. 천보(天寶) 742년 ~ 75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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