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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혼례 공부.. (이해일)

먼저 글에 댓글이 붙었는데, ‘세상이 바뀌었는데

옛 것을 고집하는 것도 허례 운운 이다.

 

이 부분 먼저 글에서 분명히 짚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충분하지 않은 것 같아, 한 마디 붙이고 넘어간다.

 

우선, 먼저도 썼지만, 의례란 어떻게 해도 결국 허례의 측면이 있다.

 

허례 빼면 뭐 남는 것이 있을까? 생각 될 정도다.

그럼에도 왜 하는 것일까? 에 대하여는 먼저 글에서 이미 쓴 바 있다.

 

어쨌던 세상이 바뀌었으면 의례도 바뀌어야 한다.

 

이건 사실 너무 당연하여 하나마나 한 소리다.

그런데 아무리 실질적으로 바꾸어도 사람들이 받아 들이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프랑스 대혁명 직후 케케묵어 미신(迷信) 같이 되어 버린

카톨릭 전례 대신 이성에 입각하여 참신한 의례를 만든 적이 있었다.

 

의도는 좋았지만 사람들이 당최 낯설어 하여 웃음거리만 되고 말았다.

이런 시도는 새로운 시대마다 되풀이 되지만 대개 실패한다.

 

인간이란 그렇게 썩 이성적이지도 않으며,

또 평소에 하꾸라이, 첨단적으로 놀던 사람도

의례의 국면에 가서는 보수적으로 돌변하는 경향이 있다.

 

조상이 하던 식 대로 하지 않으면 뭔가 불안한 모양이다.

이 대목에서 생각나는 게 있다.

 

초상(初喪)나서 영결(永訣), 발인(發靷)할 때 고사가 몇 개 있고,

고사마다 축()이 있는데, 그 축문 중 하나에 식준조도(式遵祖道)

구절이 들어간다.

 

조상이 지내던 식으로 (혼령을) 모실 테니 안심하시라 그런 맥락이다.

 

조상이 하던 대로 모신다고 해야 죽은 귀신도 안심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의례란 이 정도로 보수 지향적인 면이 있다.

 

따라서 과거의 의례를 상고(詳考)하되,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또 의미도 없으니

무엇을 버리고 살릴 가를 따져 보자는 것이다.

그러면서 온고지신(溫故知新), 법고창신(法古創新)까지 들먹인 바 있다.

 

이쯤 해 두고 이번 주제로 들어간다.

 

 

고구려(高句麗)의 혼례(婚禮)

 

아무리 옛날을 상고(詳考)하더라도,

고구려까지 올라가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을까?

 

그런 기분도 든다.

들지만, 고구려가 망했어도 그 혼례 풍속이 아주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 대강의 줄거리가 조선 중기까지 계속 이어진 듯 하기 때문이다.

 

곧 우리 민족 혼례의 원형(原型)-프로토 타입을

고구려의 풍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三國志 魏志 東夷傳)

 

 

(*) 삼국지는 소설책 삼국지 연의(演義)’ 와는 다른 정규 역사책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이란 이름은 학교 때 다들 들어 보았을 것이다.

이 자료가 우리 고대사에 왜 중요하냐 하면;

 

첫째 시대를 같이 한다.

서기 244년에서 246년에 걸쳐, 우리 고구려 동천왕(東川王) ,

위나라 유주 자사 관구검(毋丘儉)이 고구려를 치고 환도성을 함락시킨다.

 

덕분에 고구려가 아주 혼이 났는데, 그 원한이야 2천년 전 일이고,

위지 동이전 고구려 기사는 그때 고구려에 직접 와 본 중국 사람들이

보고 들은 견문(見聞)이 바탕이다. 이에 비해 삼국사기는 관구검 침공으로부터

900 년 뒤, 삼국유사는 1100 년 뒤에 편찬된 책이다.

 

위나라 말고 다른 왕조 역사책에도 다 동이전이 붙어 있지만

원본이 위지(魏志), 다른 동이전은 위지 동이전을 죄 카피 뜬 듯 하다.

 

둘째 당시 중국은 동아시아 문화의 중심이고,(쪽 팔리지만) 우린 주변이다.

우린 우리 밖에 모르지만, 중국인들은 주변에 있는 수많은 종족들의 풍속을

다 살필 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 또 그렇게 했다. 보다 객관적일 수가 있다.

 

 

이 삼국지 위지 동이전 고구려전에 혼례 장면이 다음과 같이 나온다.

 

 

기속작혼인 (其俗作婚姻)

그 풍속에 혼인을 함에 있어

 

언어이정 (言語已定)

말이 정해 지면

 

여가작소옥어대옥후 (女家作小屋於大屋後)

여자의 집에서는 큰 집 뒤에 작은 집을 짓고

 

명서옥(名壻屋)

그 이름을 사위집이라 하는데,

 

서모지여가호외(壻暮至女家戶外)

사위될 사람이 저녁에 여자의 집 대문 밖에 가서

 

자명궤배(自名) 걸득취여숙(乞得就女宿)

꿇어 절하면서 여자의 집에서 자게 해달라고 애걸한다.

 

여시자재삼(如是者再三)

이러하기를 두세 번 하면,

 

여부모내청사취소옥중숙(女父母乃聽使就小屋中宿)

여자의 부모는 마침내 그 청을 들어,

작은 집(壻屋)에서 머물도록 허락한다.

 

방돈전백(傍頓錢帛)

(이 때 신랑은) 돈과 비단을 내놓는다.

 

지생자이장대(至生子已長大) 내장부귀가(乃將婦歸家)

아들을 낳아 장성하면 마침내 여자를 데리고 제 집으로 돌아온다.

 

 

지금 세어 보니 한자(漢字) 원문 모두 68 자다.

 

이거 가지고 노가리 풀자니 갑갑하지만 이게 다다.

우리나라 고대사의 원 사료의 양()은 다 이런 식이다.

 

아무튼 대강 다음과 같은 그림이 그려 지지 않는가?

 

결혼 날, 신랑 될 사람이 여자의 집에 가서 무릎을 꿇고

제발 자기를 사위로 맞이 해 달라고 애걸복걸 통사정한다.

 

그런데 그 앞에 언어이정 (言語已定)-‘말이 정해 지면이란 구절이 있으니,

다 짜고 찌는 고스톱, 약속대련 이지, 그냥 아무 여자 집이나 찾아가서

눈물 콧물 흘리며 딸 달란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아득한 원시시대에는 정말로 무작정 가서 조르는 일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중국 사람이 와서 보고 동이전(東夷傳)에 채록(採錄) 할 시점에는

미리 짠 쇼 중 일부-양식화(樣式化)가 상당히 진행 되었을 것이다.

 

 

신랑이 통사정하기를 두세 번 하고 나면,

여자 집에서 못 이기는 척 (다 쇼의 일부) 허락하고,

식을 올리고, 본채 뒤에 미리 지어 놓은 작은 집에 머물게 한다.

 

(당연히 여자하고 같이 자겠지! 혼자 잘 것 같으면 뭐 하러 통사정하나?)

 

이 작은 집이 서옥(壻屋)-‘사위집으로, 이가 고구려의 서옥제(壻屋制).

 

 

얼마 동안이나 서옥(壻屋) 곧 처가집에서 머물렀을까?

 

아이를 낳아 상당히 클 때까지로(至生子已長大)

그 뒤에 비로소 아내를 데리고 제 집으로 돌아 온 것이다.(乃將婦歸家)

 

이제 글이 넘치려는데, 정리해 보면;

 

(1) 결혼을 청할 때 남자가 통사정 하는 것(또는 하는 척)이 매너였다.

 

(2) 결혼식은 밤에 했다.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결혼식은 밤에 한다.)

 

(3) 결혼식은 여자의 집에서 했다.

 

(*)우리나라 결혼은 남자가 여자 집에 장가 드는 것이었다.

 

(4) 신랑은 여자의 집에 재물을 내 놓았다. (傍頓錢帛)

 

결혼은 짜배기가 아니었다.

전백(錢帛)말고도 더 있었을 텐데 그건 다음 글에서.

 

(5)결혼 후에도 여자의 집에 한참 머무는데

아이를 낳아 상당히 클 때 까지다.

 

이렇게 외갓집에서 아이가 크다 보니,

친가보다 외가에 더 친밀감을 느끼는 일이 흔하였다.

 

(6) 그런 연후에야 남자의 집으로 돌아 온다.

 

이상에서 볼 때 우리나라 결혼은 고구려 시대부터

(그리고 조선 중기까지) 남자가 여자 집에 장가 드는 것이었다.

 

이점이 중국과 달랐다.

 

나중에-대략 조선 중기에 주자학이 (단순한 이념이 아니라) 생활화될 때,

중국식으로 여자를 남자 집으로 데리고 오는 쪽으로 해 보려고 무진 노력하지만,

완전 중국식으로는 바꾸는 것은 결국 성공하지 못하고 절충할 따름이었다.

 

이렇게 우리의 고유 전통에 중국식을 약간 끼워 넣은 것이

오늘 날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 혼례로, 그 완성 시기는 조선 후기다.

 

전통 혼례 라지만, 실은 아주 가까운 과거에 완성된 것으로

아득한 옛날부터 같은 형식으로 내려온 것이 아님에도

성균관 같은데 계신 영감님들이 그 생각을 미처 못(또는 ) 하는 것이다.

 

 

이상 항목별 이야기는 다음 글 꼭지부터 해 나가겠고

글의 분량이 넘쳤지만 (되도록 A4 5장을 넘기지 않으려고 하지만)

고구려 해명태자 이야기를 잠깐 하고 이번 글 끝맺겠다.

 

 

해명태자(解明太子)

 

해명태자는 고구려 2대 유리왕의 아들이었다.

 

주몽(동명왕)이 동부여를 떠나와 졸본 비류수 가에 나라를 세울 때,

졸본 현지의 유력자인 처족(妻族) ‘소서노네 부족의 도움을 받았다.

 

그런데 다음 왕위는 소서노의 소생인 비류와 온조가 아니라

동부여에서 아버지 주몽을 찾아 온 유리에게 이어졌다.

 

소서노 세력이 볼 때는 개 같은 경우로,

유리왕과 길항, 긴장 관계가 생길 수 밖에 없는 구조가 되었다.

 

남계(男系)로 상속이 이어지는 사회/문화에서도

아들 대신 딸 곧 사위를 밀어 주는 일은 가끔 있다.

 

그러나 그럴 때라도 자기네 핏줄을 이어받은 외손에게

다음 대 상속이 이어진다는 조건이지, 다른 여자에게 낳은 아들에게

전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볼 때 경우에 어긋난 것이다.

 

 

동명의 뒤를 이은 유리도 졸본의 유력자-소노부 세력자의 딸과 결혼 하지만

그 여인은 곧 죽고, 그 사이에서 난 아들 도절도 일찍 죽는다.

 

그 뒤 유리는 고구려 여자인 화희와 한족(漢族)의 여자 치희를 맞이 하나,

화희가 치희를 질시, 모욕하여 화가 난 치희는 친정으로 가 버린다.

 

유리는 치희를 데리러 가지만 설득에 실패하고 빈 손으로 돌아 오며

우리 때 교과서에도 실렸던 황조가(黃鳥歌) 짓는다.

 

오락가락 나는 꾀꼬리여

암수컷이 함께 하는구나

외로운 이 내 몸은

뉘와 함께 돌아가리

 

노래는 좋을 지 모르나, 남자 더욱이 임금으로서는 병신 같이 처량하다.

 

부여 고구려에선 여자가 질투가 심하면 죽이는 (죽여도 되는) 풍속이 있었다.

그럼에도 유리가 어쩌지 못한 것은 화희 뒤의 왕비족-소노부의 실력 때문일 것이다.

 

유리가 다음에 난 아들 해명태자가 어느 부인의 아들인지는

자료에 없지만 이 화희의 아들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제 유리는 비류수 졸본에서, 압록강변 위나암-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긴다.

 

이유는 소노부 세력 중심지에서 벗어나 자기 왕권을 확립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해명태자는 그냥 졸본에서 머무른다.

유리왕이 국내성으로 오라고 해도 말을 잘 듣지 않는다

 

그러다 별거 아닌 일로 유리왕이 트집(?) 잡아

태자에게 자살 명령을 내리고, 결국 해명이 죽는 일이 생긴다.

 

유리가 도읍을 국내성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기득권 세력이 반발했을 것이다.

그 기득권 세력은 고구려의 풍속대로, 태어나서 상당 기간 외가에서 자랐을,

곧 자기네가 키운 해명 태자를 업었을 가능성이 있다.

 

부자지간이라도 권력투쟁에 끼어 들면 살인도 일어나는 일은
조선 왕조 때 영조와 사도세자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다.

 

이처럼 고구려 해명태자 이야기를 읽다 보면

조선 중기까지 아이들이 친가보다 외가에

보다 강한 친연감을 느낀 원형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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