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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명동백작 (최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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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한 해의 마지막 일들을 마무리하고 새해 연휴로 들어가는 날이다.
평소 친한 고교 선배님의 아드님 결혼식이자 올해의 마지막 결혼식 참석을 위해 명동성당을 찾으며, 오랜만에 세모의 명동 거리를 혼자 거닐었다.
학창시절부터 여전한 자리에서 음악회 포스터로 창을 가린 낯익은 악보점을 돌아 인파가 북적이는 사이 길로 두리번거리며 걷는데 오래 전부터 친숙한 거리라 그런지 전혀 낯설지 않다.
다만 내가 휘젓고 다니던 학창시절보다는 거리의 물건이나 상점의 인테리어가 현대식으로 바뀌었을 뿐 옛 모습 옛 거리 그대로이다.
참! 사람들의 모습이 바뀌었구나...

작지만 꽤 유명했던 해장국집 2층에서 국밥을 한 그릇 시켜놓고 앉아 있자니 그 옛날 음악 합네 하며 악기 하는 친구들과 명동 거리가 좁다 하며 돌아다니다 오비맥주집, 단골 음악감상실 공짜 생활이 생각나 슬며시 웃었다.
그 시대에 나에게 감명 깊었던 책이 있었는데 "목마와 숙녀"로 유명한 박인환 시인을 그린 소설가 이봉구씨의 "명동백작" 이었다.
아마 전쟁을 겪으며 상실과 좌절 허무를 그린 박인환 시인의 삶이 당시 긴급조치 속 장발 단속을 피해 도망다니던 예술가 초년병들의 좌절과 맞물렸었던 것 같다. 
그렇게 밀려났던 긴조세대이자 역사의 뒤안길로 버려졌던 475세대가 부활한다는데...

흰 눈발이 조금씩 휘날리고 오가는 인파가 점점 많아지는데, 머리가 시리다.
모자나 하나 사야겠다.
머플러를 진열해 놓은 작은 상점 안을 살펴보니 모자가 눈에 띈다.
"모자를 쓰니 30대 후반, 벗으니 50대..."
중얼중얼 했더니 점원이 아니란다.
"벗어도 40대예요.."
몇 가지 더 사며 많이 팔라고 덕담을 하고 나온다.

겨울 바람으로 출렁이는 한강을 끼고 달리는데 차창 밖으로 흰 눈발이 휘날린다.
그냥 집으로 들어가기는 조금 을씨년스럽다는 생각에 집사람과 강 건너 잘 가는 전통음식점을 찾아 들어갔다.
이 집은 언제나 70년대 음악을 틀고 있는데 주인이 나와 같은 세대이구나 생각하면서도 한번도 물어본 적은 없다.
바닥에 깔려있는 가마니와 진흙으로 버무려 대충 만든 페치카, 창호지로 감은 뿌우연 백열등이 아까 걸쳐온 명동 거리와는 사뭇 대조적이다.
식사 후 얼기설기 만든 나무 덧문을 나오니 눈발이 제법 거세지기 시작한다.
이제 한 해가 진짜로 저무는구나.
낮에 사서 쓴 중절모자가 따뜻하게 느껴지는 건 분명 세월이 흐르긴 흘렀나보다.
잘 가거라 세월아...
내일이면 올 한 해의 잡다한 모든 일들이 흰눈으로 쌓여 묻혀지겠지...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날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박인환 시인의 "세월이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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