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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국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 선배 (최영철)
🧑 정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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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1-07 23:3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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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2
비행사 안창남(安昌男).
그는 1921년 22세의 나이로 일본 항공국에서 실시한
제1회 비행사면허시험에 당당히 합격을 하고
그 이듬해 12월 경성악대(京城樂隊)의 우렁찬 환영의 주악과 5만 군중의 환호성을 받으며
여의도 상공에서 쌍엽 비행을 한 최초의 한국인 파일러트(Pilot)이다.
떴다 보아라 안창남 비행기
내려다 보니 엄복동의 자전거
그가 여의도 상공 곡예비행을 무사히 마친 후부터 퍼지기 시작한 노래이다.
우리의 민요 청춘가에다 가사를 그렇게 바꾼 것으로써 이른바
<안창남 비행기>로 알려진 노래인데, 그 당시 이은상(李殷相) 작사 <사우(思友)>와 함께
한국인이라면 빼놓을 수 없는 애창곡 중의 하나로 유명했었다.
그 노래는 어느덧 동네에 일본 순경이 나타나기라도 할라치면 아이들은
그 순경의 등 뒤에다 대고 「떴다 보아라 안창남 비행기, 내려다보니 엄복동의 자전거」를
일부러 크게 불러대며 꺾여진 민족의 자존심을 일으켜 세우는 데
한몫을 차지하였던 노래이기도 하다.
일본한테 땅을 밟히고 인권을 무참히 유린당해야만 했던 치욕의 시절에 유행된
<안창남 비행가>는 당시의 울분을 달래줄 수 있는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면 최초의 한국인 파일러트였던 안창남이 지닌 민족성,
그가 비행기 추락으로 서른 한 살의 생을 마칠 때까지 가슴 속 깊이 파묻고 다녔던 통곡의 한은
과연 무엇이었겠는가를 후세의 우리들은 꼭 기억해 볼 필요가 있다.
1900년, 정치적으로는 한·일 통상조약이 맺어지고,
사회적으로는 한강 철교가 준공되고, 경인철도가 완전 개통되는가 하면,
경인간 시외 전화가 연결되던 시대이다. 이 시대 한성 서북촌 평동 무악재,
지금의 서대문 무악재 부근에서 안창남이 태어난다.
한때 길이 하도 험해 몇 사람을 모아서 넘을 수 있는 길이라 하여 모아재라고 불렸었지만
안창남이 태어날 무렵에는 길이 넓게 뚫리고 전신주까기 세워졌는가 하면 서울에 땔감 나무를
실어 나르는 우마차 길로 다듬어진 길이었다.
안창남은 네 살 때 어머니를 잃었다.
계모 밑에서 자란 안창남은 의관인 아버지의 덕택으로 휘문의숙을 다니게 된다.
그러나 안창남은 나이 열 다섯 되던 해 아버지마저 잃어야 하는 불행과 함께,
다니던 휘문의숙을 중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삼년 동안 무악재 부근에
봉분된 아버지의 묘소를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찾아가 아버지의 넋을 달래는 정성을 들였다.
"아버지, 불효자 창남이가 왔습니다. 흑흑흑……."
그는 아버지 묘소를 찾아간 삼년동안 눈물을 안 흘려 본 날이 없었다.
조국은 이미 일본놈이 빼앗아가 버리고 꿈과 용기를 북돋아줄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셨으니 저는 어떡해야 합니까 하며 산봉우리가 내려앉도록 울 수밖에 없었다.
그는 상복을 벗고도 사흘이 멀다 하고 아버지의 묘소를 둘러보는 효자이기도 했다.
아버지의 묘소 왼쪽으로 한참 거슬러 올라가면 한강이 질펀하게 내려다보이는 바위가 있었다.
안창남은 그 바위에 걸터앉아서 연기를 폭폭 뿜으며 한강 철교를 지나가는 기차와
마포 나루 쪽으로 먼지를 휘날리며 질주하는 자동차를 볼 때마다 치밀어 오르는 울화통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일본은 저런 이기(利器)를 만들어 남의 나라 땅을 휘젓고 다니는데,
우리 조선은 그 동안 뭘 했단 말인가. 시선이 하늘을 향할 때는 더 그러했다.
왜냐하면 작년에(정확히 말해서 1916년) 아트·스미드라는 미국인 비행사가 용산 연병장 하늘에
비행기 한 대를 몰고 와 매혹적인 공중 묘기를 보여준 적이 있었다.
하늘을 나는 비행기가 갑자기 하늘 높이 치솟았다가 뚝 떨어지는 급강하의 묘기는
보는 이의 간장을 서늘하게 했으며, 제멋대로 빙빙 도는 묘기, 서쪽에서 나타났는가 하면
어느새 동쪽 산봉우리에서부터 꽁무니로 뿜어낸 하얀 연기를 가지고
<SMITH>라는 글씨를 쓰는 묘기 등은 비행기를 처음 보는 조선인의 넋을 쏘옥 빼고도 남았었다.
미국인은 무슨 재주가 있어 쇳덩어리를 타고 하늘을 나는가.
우리 조선인은 도대체 뭘 했단 말인가. 거기다가 나라까지 빼앗겨 버린 조선을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만 같았다.
"빌어먹을 일본놈!"
주먹이 부르르 떨리고 이빨이 으드득 갈렸다.
그런 세월이 2년이나 지났다.
"일본놈을 이 땅에서 몰아내야 해. 그러기 위해서는 독립운동가가 되어야 해."
사실 이 무렵은 국내외적으로 독립운동에 대한 선풍이 불고 있을 때였다.
일본에서는 동경 유학생 학우회를 중심으로, 상해(上海)에서는 신한청년당,
국내에서는 민족대표 33인이 발족되는 등 독립운동의 열기가 무척 고조되고 있었다.
"
그는 1921년 22세의 나이로 일본 항공국에서 실시한
제1회 비행사면허시험에 당당히 합격을 하고
그 이듬해 12월 경성악대(京城樂隊)의 우렁찬 환영의 주악과 5만 군중의 환호성을 받으며
여의도 상공에서 쌍엽 비행을 한 최초의 한국인 파일러트(Pilot)이다.
떴다 보아라 안창남 비행기
내려다 보니 엄복동의 자전거
그가 여의도 상공 곡예비행을 무사히 마친 후부터 퍼지기 시작한 노래이다.
우리의 민요 청춘가에다 가사를 그렇게 바꾼 것으로써 이른바
<안창남 비행기>로 알려진 노래인데, 그 당시 이은상(李殷相) 작사 <사우(思友)>와 함께
한국인이라면 빼놓을 수 없는 애창곡 중의 하나로 유명했었다.
그 노래는 어느덧 동네에 일본 순경이 나타나기라도 할라치면 아이들은
그 순경의 등 뒤에다 대고 「떴다 보아라 안창남 비행기, 내려다보니 엄복동의 자전거」를
일부러 크게 불러대며 꺾여진 민족의 자존심을 일으켜 세우는 데
한몫을 차지하였던 노래이기도 하다.
일본한테 땅을 밟히고 인권을 무참히 유린당해야만 했던 치욕의 시절에 유행된
<안창남 비행가>는 당시의 울분을 달래줄 수 있는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면 최초의 한국인 파일러트였던 안창남이 지닌 민족성,
그가 비행기 추락으로 서른 한 살의 생을 마칠 때까지 가슴 속 깊이 파묻고 다녔던 통곡의 한은
과연 무엇이었겠는가를 후세의 우리들은 꼭 기억해 볼 필요가 있다.
1900년, 정치적으로는 한·일 통상조약이 맺어지고,
사회적으로는 한강 철교가 준공되고, 경인철도가 완전 개통되는가 하면,
경인간 시외 전화가 연결되던 시대이다. 이 시대 한성 서북촌 평동 무악재,
지금의 서대문 무악재 부근에서 안창남이 태어난다.
한때 길이 하도 험해 몇 사람을 모아서 넘을 수 있는 길이라 하여 모아재라고 불렸었지만
안창남이 태어날 무렵에는 길이 넓게 뚫리고 전신주까기 세워졌는가 하면 서울에 땔감 나무를
실어 나르는 우마차 길로 다듬어진 길이었다.
안창남은 네 살 때 어머니를 잃었다.
계모 밑에서 자란 안창남은 의관인 아버지의 덕택으로 휘문의숙을 다니게 된다.
그러나 안창남은 나이 열 다섯 되던 해 아버지마저 잃어야 하는 불행과 함께,
다니던 휘문의숙을 중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삼년 동안 무악재 부근에
봉분된 아버지의 묘소를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찾아가 아버지의 넋을 달래는 정성을 들였다.
"아버지, 불효자 창남이가 왔습니다. 흑흑흑……."
그는 아버지 묘소를 찾아간 삼년동안 눈물을 안 흘려 본 날이 없었다.
조국은 이미 일본놈이 빼앗아가 버리고 꿈과 용기를 북돋아줄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셨으니 저는 어떡해야 합니까 하며 산봉우리가 내려앉도록 울 수밖에 없었다.
그는 상복을 벗고도 사흘이 멀다 하고 아버지의 묘소를 둘러보는 효자이기도 했다.
아버지의 묘소 왼쪽으로 한참 거슬러 올라가면 한강이 질펀하게 내려다보이는 바위가 있었다.
안창남은 그 바위에 걸터앉아서 연기를 폭폭 뿜으며 한강 철교를 지나가는 기차와
마포 나루 쪽으로 먼지를 휘날리며 질주하는 자동차를 볼 때마다 치밀어 오르는 울화통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일본은 저런 이기(利器)를 만들어 남의 나라 땅을 휘젓고 다니는데,
우리 조선은 그 동안 뭘 했단 말인가. 시선이 하늘을 향할 때는 더 그러했다.
왜냐하면 작년에(정확히 말해서 1916년) 아트·스미드라는 미국인 비행사가 용산 연병장 하늘에
비행기 한 대를 몰고 와 매혹적인 공중 묘기를 보여준 적이 있었다.
하늘을 나는 비행기가 갑자기 하늘 높이 치솟았다가 뚝 떨어지는 급강하의 묘기는
보는 이의 간장을 서늘하게 했으며, 제멋대로 빙빙 도는 묘기, 서쪽에서 나타났는가 하면
어느새 동쪽 산봉우리에서부터 꽁무니로 뿜어낸 하얀 연기를 가지고
<SMITH>라는 글씨를 쓰는 묘기 등은 비행기를 처음 보는 조선인의 넋을 쏘옥 빼고도 남았었다.
미국인은 무슨 재주가 있어 쇳덩어리를 타고 하늘을 나는가.
우리 조선인은 도대체 뭘 했단 말인가. 거기다가 나라까지 빼앗겨 버린 조선을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만 같았다.
"빌어먹을 일본놈!"
주먹이 부르르 떨리고 이빨이 으드득 갈렸다.
그런 세월이 2년이나 지났다.
"일본놈을 이 땅에서 몰아내야 해. 그러기 위해서는 독립운동가가 되어야 해."
사실 이 무렵은 국내외적으로 독립운동에 대한 선풍이 불고 있을 때였다.
일본에서는 동경 유학생 학우회를 중심으로, 상해(上海)에서는 신한청년당,
국내에서는 민족대표 33인이 발족되는 등 독립운동의 열기가 무척 고조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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