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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휘문 출신 문인 시리즈 홍사용 선배 (문형처사)
나는 왕이로소이다.
그러나 그러나 눈물의 왕!
이 세상 어느 곳에든지 설움 있는 땅은
모두 왕의 나라로소이다.

많이들 읊조리던 시의 한 구절이다. 이 구절은 신문학 초기 문예지인 백조(白潮)의 동인으로 활약한 노작(露雀) 홍사용의 대표적인 시 '나는 왕이로소이다' 마지막 연이다.
올해로 홍사용은 탄생 백주년을 맞았다. 그는 신문학 초기의 주요 문인으로 시, 소설, 희곡, 평론 등의 작품을 남겼지만, 우리 문학사에서 그에 대한 평가 작업은 극히 미진했다고 볼 수 있다.

낭만파시인 홍사용, 그의 문학적 자양분은 민중정서 교과서에 실리기도 한 위의 시 '나는 왕이로소이다' 가 낭만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이라는 것과 백조 동인으로 활동했다는 사실만이 일반인들에게 알려졌을 뿐이다.
이번에 뿌리와 날개에서 낸 그의 전집은 그 동안 잊고 지내던 초기 문인을 다시 세상에 내놓았다는 의미에서 뜻깊다고 할 수 있다. 또 시인으로만 기억되던 그를 전집을 통해 소설과 평론, 희곡 등의 작품도 접할 수 있는 기회라는 점에서 더욱 뜻깊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전집을 통해 드러난 홍사용은 그가 낭만파 시인으로서의 면모뿐만 아니라 메나리, 즉 우리 민중의 정서에 남다른 관심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홍사용은 전국을 떠돌며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노래를 채록했고, <청구가곡(靑邱歌曲)>이라는 민요집을 남겼다.
신문학 초기에 우리 나라는 해외파 문인들이 대거 활동했고, 그들은 외국의 사조를 지나치게 추종했던 것과 달리 홍사용은 우리 민족의 정서를, 그것도 민중의 정서를 자신의 문학적 자양분으로 삼으려 했다는 점에서 그의 문학사적 의의는 다시금 되새겨질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홍사용의 삶과 문학 활동
홍사용은 노작, 소아, 백우 등의 아호를 가지고 있지만 주로 '노작'이라는 이름으로 작품활동을 하였다. 통정대부 육국헌병 부위를 지낸 아버지의 근무처를 따라 서울 재동에서 8세까지 살다가 군대가 해산되자 그가 태어난 용인군 농서리에서 멀지 않은 화성군 동탄면 석우리(돌모루)로 이사하여 휘문의숙에 입학하기까지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다고 한다.
그는 1919년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나자 학생운동에 가담했다가 구금되기도 했으며, 그해 6월 고향으로 돌아와 수필 <청산백운>과 시 '푸른 언덕가으로'를 썼다. <청산백운>은 휘문 교우 정백과 함께 쓴 것으로 그의 최초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문단 활동은 <백조> 창간과 함께 본격적으로 이루어졌고, <개벽> <동명> <여시> <불교> <삼천리문학> 등과 같은 월간지와 일간신문에 다수의 작품을 발표했다.
1923년에는 <토월회>에 가입하여 문예부장직을 맡으며 극단활동을 했으며, 1927년에는 박진, 이소연과 함께 산유화회를 결성했다. 1930년에는 홍해성, 최승일 등과 함께 신흥극단을 조직하고 자신이 손수 희곡작품을 직접 연출하는 등 신극운동에 정열을 쏟기도 하였다.
1930년을 전후하여 홍사용은 전국을 방랑하다 돌아와 자하문 밖에서 한방의학을 공부하며 만년의 생계를 삼았고, 8,15해방이 되자 그는 곧바로 <근국청년단>을 조직하여 청년운동을 일으키려 했으나 지병이 폐환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47년 생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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