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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문형타임즈)
도대체 어디서부터 필름이 끊겼는지 알 수가 없다. 거래처 사장을 접대하고 호텔 방에 재운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후부터는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는다.
깨질 듯한 머리로 겨우 옷을 걸치고 호텔 방을 나온다.
오늘 아침은 어디서 때운다?
흐릿한 머리 속으로 이역만리 떨어져 있는 집사람과 자식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이러면 안 되지. 힘을 내야지.

한국을 떠나 뉴질랜드로의 이주를 결심할 때가 떠오른다.
대대로 살아오던 조상의 땅, 정든 친구들이 사는 땅, 온갖 애환이 깃든 삼척 내 고향.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른다. 우리 식구들을 고생시켰던 아버지였지만 지금은 애증과 서글픔이 교차한다.
어느 정도 그 당시의 아버지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나는 앞으로 아버지같이 안 산다. 내 자식에게도 다시는 고생을 물려주지 않을거다.
세상 걱정 없는 넓고 좋은 곳에서 마음껏 뛰어 놀게 할거다.

하도 바쁘게 지구를 돌다 보니 이제는 정신이 흐려진다.
어제 저녁에는 차를 어디다 세웠는지 도무지 생각이 안 난다.
잊고 온 핸폰에는 여러 곳에서 온 연락처가 찍혀 있다.
"야 새끼야 얼굴 좀 보자. 가기 전에 한번 볼려고 했더니... 연락 좀 하고 살자 이 새꺄."
한 친구가 볼멘 소리로 음성을 남겼다.
그 소리 뒤에 숨겨진 친구들의 짙은 우정이 느껴진다.
올해 한국에서의 마지막 산행을 멀리 사는 친구와 같이 하려는 아쉬움의 표시다.

전번에 집에 갔을 때 집사람이 안 보는 척하며 나를 관찰하는 눈치다.
"이제 내가 레슨 시작했으니까 자기는 좀 쉬면서 해도 돼."
집에서는 피곤에 지친 듯한 얼굴과 밖에서의 어려운 사업에 대해서는 절대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 했는데 집사람이 어느 정도 낌새를 챈 것 같다.
나도 이제 늙어가나 보다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처량하기도 하다.
집사람의 머리도 부쩍 하얗게 변했다.

바쁜 와중에도 친구들이 보고 싶어 동창들 게시판을 연다.
친구들의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아 나도 저 옆에 있어야 하는데."
친구가 아쉬워하며 애처로운 듯 비 맞은 크리스마스 트리 카드를 보내왔다.
한 친구는 힘을 내라며 내 등을 두드리는 듯한 글을 올렸다.
그래도 친구들이 내 사정을 이해하는구나.

이제 지친 몸을 이끌고 가족에게로 가야 한다.
거기서는 절대 고단함을 내색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내가 기둥이다.
내가 무너지면 그들은 이 세상에서 의지할 곳이 없다.
그 옛날 아버지의 심정을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군(群)을 이루며
갈대 숲을 이룩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열 이열 삼열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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