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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 - 2부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 - 2

  

4.

   여인은 유씨가 읊은 시의 마지막 장을 듣고 감동하여 앞으로 나오면서 말했다.

   "제가 비록 재주는 없사오나 자획(字劃)은 대강 분별할 정도이오니 어찌 홀로 아무런

소감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더니 곧 시 한 편을 읊었다.


   개녕동 깊은 골은 봄의 수심 안고서

   꽃은 피고 지고 한숨만 짓는구나.

  

 아득한 초협(礎峽) 구름 속에 고운 님 여의고는

   상강(象江) 대밭 속에 눈물을 뿌리더니


   맑은 강 화창한 날씨 원앙은 작을 찾고

   푸른 하늘 구름 걷혀 비취새만 노닐고 있네.

  

우리도 맺어 보세 굳고 굳은 동심결(同心結)을

   바라건데 비단 부채는 맑은 가을 원망 마오.


   양생 또한 원래 문장에 능통한 편이었지만, 그들의 시법(詩法)이 깨끗하고 운치가

있으며, 음운(音韻)이 맑음에 경탄하여 마지 않았다. 양생도 시 한 편을 지어 이들에

게 화답하였다.


   이 밤이 어떤 밤인가 고운 님을 기뻐 맞았네.

   꽃처럼 예쁜 얼굴 앵두처럼 빨간 입술

   문장 더욱 교묘하니 천고에 드물리라.


   직녀는 북(기:機) 던지고 인간에 내려오고

   월궁 항아는 공이(저:杵) 버리고 이곳을 찾았구나.

   말쑥하게 꾸민 단장 술잔을 드날린다.


   운우의 즐거움은 익숙하지 못할망정

   술 마시고 시 읊으니 유쾌하기 그지없네.

  

   기쁘도다 이제야 봉래섬을 찾았으니

   신선이 여기 있네 풍류도(風流徒)를 만났구나.

   

   이름난 술잔에는 술이 가득 찼고 금향로에 안개 피어

   백옥상(白玉牀) 솟은 앞에 매운 향내 나부끼고

   푸른 비단 숙설간(熟設間)에 산들바람 살랑살랑


   드디어 님을 만나 이 잔치를 열게 되니 

   하늘엔 오색 구름 찬란하기 그지없네.

   아아! 님이시여 옛일을 돌아보오.


   문소(文簫)는 채란(彩鸞)을 사랑했고

   장석(張碩)은 난향(蘭香)을 만났다오.


   인생의 어울림도 반드시 인연이니

   마땅히 잔을 들고 백년 해로 맹세하리,


   님이시여! 가을철에 부채라니 그것이 왠 말이오?

   저승에서 거듭 만나 백년 가약 맺어 두고

   아침 꽃 저녁 달에 끊임없이 놀아보세.


   마침내 술도 다 마시고 서로 작별할 때가 되었다. 여인은 은잔 하나를 내어

양생에게 주면서 말했다.

   "저의 부모님께서 내일 저를 위하여 보련사(寶蓮寺)에서 음식을 베푸실 것

입니다. 낭군께서 저를 진정 버리지 않으신다면 보련사로 가는 길에 기다리고

계시다가 저와 함께 부모님을 뵙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좋소."

하고 양생은 순순히 약속을 하였다.

   이튿날 양생은 여인이 이르는 대로 은잔을 가지고 보련사로 가는 길에서

여인의 부모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랬더니 과연 어떤 명문가에서 딸의 대상

(大祥)을 치르기 위해 수레와 말을 길게 앞세우고 보련사를 향하여 가고 있

었다.

   그때 한 마부가 양생이 은잔을 손에 들고 서 있는 것을 보고는 주인에게 

여쭈었다.

   "나리! 우리 아가씨 장례 때 무덤에 함께 묻었던 은잔을 어떤 사람이 훔쳤

나 봅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냐?"

   주인 양반이 물었다.

   "예, 저기 서 있는 서생이 가진 것을 보십시오."

   마부가 말했다.

   주인은 가던 길을 멈추고 양생에게 가까이 다가가 은잔을 갖게 된 경위를

물었다.     

   양생은 여인과 있었던 일을 그대로 이야기하였다.

   주인은 너무나 놀라워 한참을 멍하니 서 있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내 슬하에 오직 여식 하나밖에 없었는데, 왜구(倭寇)의 난리에 그만 죽고

말았네. 미처 정식으로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개녕사(開寧寺) 곁에 묻어 두

고는 기회를 보아 오다가 지금에사 하게 되었네. 오늘이 벌써 대상(大喪)인

지라 부모된 도리로 보련사에서 재(齋)나 베풀어 볼까 해서 가는 길일세.

자네가 정말 내 여식과의 약속을 지키려거든 여식을 기다려서 함께 오게."

   말을 마치자 주인은 보련사로 떠났다.


* * * * * * * * * *

                                        ※ 역주(譯註)

                                    19) 초협(楚峽): 중국의 지명. 사천성(四川省) 무산현(巫山顯) 동쪽에 있는 무산을 이름.

                                    20) 상강(湘江): 중국 호남성(湖南省)에 있는 강. 순(舜) 임금이 죽자 두 아내가 강에 몸을

                                                         던져 따라 죽었다고 함.

                                    21) 동심결(同心結): 부부 사이에 마음이 변하지 않기를 맹세하며 맺는 실.

                                    22) 부채: 실연한 여인에 배한 비유.

                                    23) 봉래섬: 해중(海中) 선산(仙山)의 이름. 

                                    24) 숙설간(熟設間): 잔치 때 음식을 만드는 곳.

                                    25) 문소(文簫), 채란(彩鸞): 서생 문소가 여선(女仙) 오채란(吳彩鸞)을 만난 고사.

                                    26) 장석(張碩), 난향(蘭香): 선인(仙人) 장석과 두난향(杜蘭香)이 서로 만난 고사.

                                    27) 보련사(寶蓮寺): 남원부(南原府) 서족 40리 보련산에 있었다고 하나 미상.

                                    28) 대상(大祥): 죽은 지 두 달 만에 지내는 제사. 


* * * * * * * * * *


   5.

   양생은 여인을 기다렸다. 과연 약속했던 시간이 되자 여인은 시녀를 데리

나타났다. 서로 반가워하며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절로 향하였다.

   여인은 절 문에 들어서자 먼저 법당에 올라 부처님께 예를 드리고는 곧 흰

휘장 안으로 들어갔지만 여인의 친척들과 승려들은 아무도 여인을 보지 못했

고, 다만 양생이 보고 그 뒤를 따를 뿐이었다.

   "저녁 진지나 함께 잡수시지요?"

   여인이 양생에게 말했다.

   "그러죠."

   양생이 대답했다.

   양생이 여인의 부모님께 이 이야기를 전하였다. 그들은 양생의 말이 믿기

않아 휘장 속을 엿보았는데 딸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다만 수저 소리만

달그락거릴 뿐이었다.

   여인의 부모는 크게 놀라며 휘장 속에 신방을 차려서 양생에게 딸과 동침

할 것을 권하였다. 밤중이 되자 말소리가 맑고 고요하게 흘러나왔는데 사람

들이 엿들으려고 귀를 기울이면 소리가 갑자기 끊어지곤 하였다.

   여인이 양생에게 말했다.

   "이제는 당신께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제 행동이 법도에 어긋난다는 것을

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도 어렸을 적에 시서(詩書)를 읽었으므로 

예의에 대해서는 대충 알고 있습니다. 《시경(詩經)》에서 말한 건상(蹇裳)

과 상서(祥鼠) 두 장의 뜻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 오랫동안 들판 다북

쑥 속에 묻혀서 버림받은 몸이 되고 보니 한번 일어난 정회를 걷잡지 못하여 

박명을 탄식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뜻밖에도 삼세(三世)의 인연을 만나게 되

었으므로 백 년의 높은 절개를 바쳐 술을 빚고 옷을 기워 평생 지어미의 길

을 닦으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애달프게도 숙명적인 이별을 어길 수가 없사

옵기에 한시 바삐 저승길을 떠나야 합니다. 운우(雲雨)는 양대(陽臺)에서 개

고 오작(烏鵲)은 은하에 흩어지매 이제 하직하면 훗날을 기약할 수 없사오니,

헤어짐에 임하여 아득한 정회를 무어라 마씀드릴 수 있겠나이까?"

   말을 마치고 여인은 소리를 내어 울었다.

   사람들은 여인의 영혼을 전송하였다. 비록 혼은 보이지 않았으나 슬픈 소

리만은 은은히 들려 왔다.


   저승길이 바쁜고로 괴로운 이별 하건마는

   바라건대 님이시여 저버리진 마옵소서.

   애달퍼라 어머니여! 슬프도다 아버지여!

   고운 님 여의는 내 신세를 어이할꼬.

   아득한 저승에서 원한만이 맺히리다.


소리는 점점 가늘어지더니 나중에는 분별할 수 없게 되었다. 여인의 부모는 

그제야 양생의 말이 모두 사실임을 알게 되었다. 양생도 여인이 이세상 사람

아님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러자 더욱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여인의

부모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울었다. 여인의 부모가 양생에게 말했다.

   "그 은잔은 자네에게 맡기겠네. 또한 내 여식의 몫으로 되어있던 밭 두어

랑과 노비를 자네에게 넘겨 줄 것이니 내 여식을 잊지 말아 주게."


   이튿날 양생은 술과 고기를 가지고 여인과 함께 지내던 개녕동을 찾으니

무덤이 하나 있었다. 양생은 음식 차려 놓고 슬피 울면서 지전(紙錢)을

불사르고 정식으로 장례를 치른 뒤, 조문을 지어 읽었다.


   아, 님이시여! 당신은 어려서는 성품이 온순하였고, 자라서는 아름다운

모습이 서시(西施)와 같았고, 문장은 숙진(淑眞)을 능가하였소. 규문 밖에

는 나가지 않았고 가정 모훈을 항상 잘 따랐었소. 난리를 당하고도 정조를

지켰는데 왜구를 만나 그만 생명을 잃었소. 황량한 다북쑥에 몸을 의탁하

여 밝은 달, 피는 꽃에 그 얼마나 마음이 슬펐소. 봄바람에 접동새는 슬피

울고, 가을철 비단 부채무정도 하였소. 지난 밤엔 님을 만나 기쁨을 얻었으

니 비록 유명을 달리했을지라도 실상 운우의 즐거움을 같이하였소. 백년

해로를 꿈꾸었는데 별안간 이별이란 웬 말이오? 사랑하는 님이시여! 당신

은 응당 달나라에서 난조(鸞鳥)를 타고 무산(巫山)에 비를 뿌리는 선녀가

되오리다. 땅이 암암하여 돌아온다는 희망은 없고, 하늘은 막막하여 바라

보기도 어렵구려. 집에 들어오면 그저 멍할 따름이고 밖에 나오면 아득하

여 갈 데가 없구려. 휘장을 대할 때마다 눈물이 나고, 술을 부을 땐 더욱

마음이 아프다오. 그대의 얼굴이 보이는 듯하고, 목소리 또한 들리는 듯

하오. 아, 슬프도다! 총명한 님이시여! 고운 님이시여! 몸은 비록 헤어졌을

망정 영혼만은 남아 계실지니, 마땅히 이곳에 나타나서 이 내 슬픔을 거두

어 주시오! 비록 삶과 죽음이 다를지라도 이 글월에 님의 느낌이 있을 것

이라 믿소.


   그 뒤 양생은 슬픔을 견디지 못해 가산과 농토를 모두 팔아 저녁마다

재를 올렸는데, 하루는 여인이 공중에 나타나 그를 불러 말했다.

  

"저는 당신의 은덕으로 이미 다른 나라에서 남자의 몸으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이승과 저승의 한계는 더욱더 멀어졌사오나 당신의 두터운

은정에 깊이 감사를 드리옵니다. 당신도 이제 다시 착한 업을 닦으셔서 

저와 더불어 속세의 누를 초탈하시옵소서."    

       

   양생은 그 뒤로 다시 장가를 들지 않고 지리산(智異山)에 들어가 약초

를 캐면서 살았다고 하는데, 그 뒤로는 어찌 되었는지 소식을 아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 * * * * * * * * *


                                            역주(譯註)

                                           29) 건상(蹇裳): 《시경(詩經)》정풍(鄭風)의 장명(章名). 청춘 남녀의 음탕함을 풍자

                                                             하는 내용.

                                           30) 상서(祥鼠): 시경(詩經)》 용풍의 장명(章名). 사람의 무례함을 풍자하는 내용.

                                        31) 삼세(三世): 불가에서 과거, 현재, 미래를 이르는 말.

                                        32) 양대(陽臺): 중국 사천성 무산현 북쪽에 있는 산 이름.

                                        33) 서시(西施): 중국 춘추시대 월(越)나라의 미이. 

                                        34) 숙진(淑眞): 중국 송나라의 여류 명시인 

                                        35) 난조(鸞鳥): 중국 전설에 나오는 상상의 새.



  第2部   終 結     〔 大 尾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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