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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영화 <국제시장>에 대한 설왕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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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美해병 덕에 생긴 국제시장, “정우택 관람금지!”
 
한미 모두 기억하는 '장진호 전투' 기념 예산삭감 김기식 주도?
개봉 일주일도 안 돼 관객 170만 돌파…정우택 의원실 "김기식 의원이…."
 
최종편집 2014.12.23 18:48:38   전경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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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국제시장' 중 흥남철수 장면.
장진호 전투와 흥남철수, 국제시장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하나의 이야기다. ⓒ영화 '국제시장' 장면 캡쳐
 
지난 17일 개봉한 영화 ‘국제시장’이 개봉 일주일도 되지 않아
관람객 170만 명을 넘어섰다.  
지금 10대들의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
우리 사회 주류인 486세대의 부모님들이 겪은 인생을
감동적으로 그린 영화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영화의 배경인 ‘국제시장’이
어떻게 생겨나게 됐는지는 잘 모른다.  
부산 남포동에서 부평동으로 길게 이어지는 ‘국제시장’은
1945년 광복 이후 고국으로 돌아온 재일동포들이 모여 만든
자그마한 장터에서부터 시작됐다.
이후 6.25전쟁을 겪으면서 피난 온 사람들이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군용식량,
의약품 등을 팔러 모이면서 커졌다.  
 
1953년 1월 30일 한 주점에서 일어난 불 때문에 시장 전체가 잿더미가 돼
많은 상인들을 아프게 했지만, 이후 시설 재건, 새마을 운동 등
여러 차례의 개수공사를 거쳐 지금의 ‘국제시장’이 됐다.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처럼, 가요 ‘굳세어라 금순아’의 2절 가사에 들어 있듯
이곳에는 흥남철수와 1.4후퇴 때 남쪽으로 피난 온 실향민들도 많았다.  
 
이 ‘국제시장’ 상인들조차 잘 알지 못하지만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은인(恩人)’이 바로 미군, 그 중에서도 美해병 1사단이다.
흥남철수를 할 수 있도록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 3개 사단을
막아낸 주인공이다.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 함경남도 장진호

美해병대는 워싱턴 대통령이 이끌었던 부대가 모태이기에 자부심이 대단하다.
공식 창설일이 1775년 11월 10일이다.  
이들 가운데서도 1950년 6.25전쟁 발발한 직후
가장 먼저 한반도로 달려온 부대 가운데 하나인 美해병 1사단은
2차 세계대전 당시 과달카날 전투, 펠렐리우 전투, 오키나와 전투 등에
참전했던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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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해병대의 백악관 경호부대원. 美해병대는 미국 건국과 비슷한 시기에 창설됐다.
한때는 '대통령 직속 부대'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현재도 美대통령이 타는 헬기는 '마린 원'이라고 부른다. ⓒ美국방부
 
美해병 1사단은 낙동강 방어선 전투, 인천상륙작전, 원산상륙작전 등
굵직굵직한 전투 때마다 엄청난 전과를 올리며 아군의 사기를 북돋운 부대였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기억하기 싫은 전투가 있었다. ‘장진호 전투’다.  
 
美해병 1사단이 ‘장진호 전투’를 하게 된 배경은 이렇다.
1950년 10월 26일 美해병 1사단은 원산에 상륙한다.
하지만 이미 국군 1사단이 원산 후방의 적을 격파하고
북진한 터라 인민군과 별다른 교전은 없었다.
이에 유엔군 지휘부는 새로운 명령을 내린다.
“원산은 후속 부대인 美육군 3사단에게 맡기고
장진호로 진격하라”는 것이었다.  
 
美해병 1사단장 올리버 P.스미스 소장은 그러나 날씨가 심상치 않다고 판단,
진격을 조금씩 미룬다.
함경남도에 있는 장진호 주변에는 10월 말에 이미 눈이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스미스 소장은 이런 기상에서 성급하게 진격하다가는 보급로가 무너지고
부대가 고립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美해병 1사단이 미적거리자 美10군단장 알몬드 중장은 벼락같이 화를 낸다.
알몬드 중장은 “서부 전선 부대와 사이에 공백을 없애려면
해병 1사단이 장진호 북쪽으로 진격해야 한다”며 스미스 소장을 다그쳤다.
스미스 소장은 어쩔 수 없이 장진호 북쪽으로 다가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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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당시 과달카날 전투에 참전한 美해병 1사단 장병들.
 역전의 용사들이었지만 장진호의 혹한에 많이 희생당했다.
ⓒ뉴질랜드 주재 美대사관 홈페이지
 
알몬드 중장은 이때 중공군 30만 명이
한반도에 진입한 상태였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유엔군 사령부도
기껏해야 3만여 명 정도가 참전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10월 하순,
서부전선의 유엔군은 중공군 18만 명의 공격을 받고 황급히 퇴각한다.
유엔군은 중공군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어떤 전력을 갖고 있는지도 파악하지 못했다.
전선(戰線)의 부대들은 공황상태에 빠졌다.
1.4후퇴로 이어지는 대규모 철수의 시작이었다.  
 
한편 1950년 11월 중순, 중공군 가운데 일부가 동부전선으로 숨어들었다.
예하에 7개 사단을 거느린 중공군 제9병단(兵團)이었다.
이들의 임무는 美해병대를 격파한 뒤 함흥-흥남 축선을 확보해
유엔군의 퇴로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중공군은 제9병단에다 병력을 더 보강해
美해병 1사단의 주력이 모인 지역에 4개 사단, 철수할 도로에 4개 사단,
예비 병력으로 2개 사단을 준비시켜 놓고 있었다.
병력 수는 12만 명이 넘었다. 반면 美해병 1사단은 약 1만 2,000여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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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과부적의 중공군에 맞서 돌파구를 찾기 위해 일시 후퇴하는 美해병 1사단.
ⓒ6.25전쟁 기념사업회 블로그
 
 
전투는 1950년 11월 27일 오전 8시부터 본격적으로 벌어졌다.
이미 산발적인 전투를 통해 중공군에게 포위돼 있다는 것을 파악한
美해병 1사단은 포위망을 뚫기 위해 선제공격을 감행했지만,
중공군의 매복에 걸려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부터 美해병 1사단의 전투는 ‘생존’을 위한 싸움이었다.  
美해병 1사단은 유담리, 하갈우리, 고토리에서
중공군과 북괴 인민군의 포위망을 뚫기 위해 쉬지않고 전투를 벌였다.
스미스 소장은 중공군과 전투를 벌이는 가운데서도 야전 활주로를 건설했다.
유엔군의 우월한 공군 수송력을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美해병 1사단이 중공군과 10대 1의 싸움을 벌이는 동안
알몬드 중장은 美10군단 예하 부대들에게 흥남으로 철수할 것을 명령한다.
그리고 12월 1일, 비행장을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부족한 탄약과 식량,
의약품을 공급받을 수 있게 됐다.
부상자 4,300여 명도 후방으로 보냈다.  
남은 이들은 중공군과 계속 전투를 벌였다.
美해병 1사단은 엄청난 투지를 보이며 중공군을 물리쳤다.
고토리 전투의 경우 미군 사상자는 300여 명이었던 반면
중공군은 8,50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美해병대도 이기지 못한 개마고원의 동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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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 전투 당시 동사한 美해병대원의 시신들.
당시 美해병 1사단은 동료들의 시신을 모두 수습하지는 못했다.
ⓒ6.25전쟁 기념사업회 블로그
 
美해병 1사단은 역전의 용사답게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투지를 발휘했지만
숫적 열세와 ‘동장군’을 극복할 방법은 없었다.
 
개마고원 지역으로 주변이 해발 1,000m의 고지대인 장진호는
당시 낮 기온이 영하 20도 내외, 밤에는 영하 28~45도까지 떨어졌다.
일부 지역에는 60cm 이상의 눈이 쌓여 있었고,
눈보라가 칠 때는 가시거리가 15m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미군과 중공군 모두 이런 혹한지에서 전투를 해본 적이 없었다.  
이런 혹한 때문에 美해병 1사단이 갖고 있던 식량과 연료는
대부분 얼어붙고 땔감은 사용할 수가 없었다.
결국 해병대원들 가운데 동상을 입거나 사망하는 사람이 속출했다.  
하지만 스미스 소장은 이 와중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중공군 포위망이 약한 부분을 계속 돌파하려 시도한다.  
이때 현장을 취재했던 전설적인 종군기자 ‘마가렛 히긴스’가
“퇴각하는 거냐”고 묻자 스미스 소장은 부하들을 향해 외친다.  
 
“후퇴라니? 젠장,
우린 지금 후퇴가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진격하는 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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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해병 1사단을 이끌고 장진호 전투의 기적을 만들어 낸
올리버 P. 스미스 소장. ⓒ위키피디아 공개사진
 
 
美해병 1사단은 약 2주 동안 이어진 ‘장진호 전투’ 끝에
흥남으로의 철수에 성공한다.
하지만 美해병 역사상 유례가 없는 상처를 입었다.  
중공군 12만 명의 공격을 2주 동안 막아내며,
美10군단, 한국군 1군단 등 유엔군 10만여 명, 피란민 10만여 명이
190여 척의 군함과 상선으로 탈출할 시간을 벌어낸 美해병 1사단은
부대원 1만 2,000여 명 가운데 7,00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그 중 3,659명은 동상으로 인한 사상이었다.
美해병 1사단을 공격했던 중공군 제9병단의 상태는 더욱 심각했다.
12만 명의 병력 가운데 4만 5,000여 명 이상이 전사하고,
1만 2,00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병력 가운데 30% 이상이 동상을 입었다.
때문에 중공군 제9병단은 1951년 3월이 넘어서야 다시
전선에 투입될 수 있었다.   
 
美해병 1사단의 ‘장진호 전투’는 이후 세계 3대 혹한전투로 일컬어지며,
전 세계에 알려졌다.
美해병대 내에는 ‘장진호 전투의 생존자(Chosin Few)’라는 모임도 생겼다.  
미군이 혹한지 전투에 대비하게 된 것이
‘장진호 전투’ 때문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실제 과거 우리 군에도 보급됐던 ‘스키 파카’가
이 전투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美해군은 타이콘테로가급 이지스 순양함에
‘쵸신(CG-65)’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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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 전투 당시 본국으로 가지 못하고 함흥에 묻힌
美해병대원들의 묘지. ⓒ위키피디아 공개사진
 
이 장진호 전투는 2007년 4월 다시 주목을 받는다.
美역사상 최고의 저널리스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는
뉴욕 타임스의 데이비드 핼버스탬이 장진호 전투를 상세히 담은
‘콜디스트 윈터(Coldest Winter)’를 유작(遺作)을 남기고 떠났기 때문이다. 
 
장진호 전투와 흥남철수, 그리고 국제시장

미군에게는 ‘악몽’이었던 장진호 전투는 한국인에게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흥남철수’를 있게 해 준 ‘고귀한 희생’이었다.
흥남철수 당시 알몬드 중장은 휘하 병력들에게 피란민은 태우지 말고,
美10군단과 한국군 1군단 등
유엔군 병력 10만여 명과 장비들만 철수시키라고 명령했다.
피란민 가운데 인민군 첩자가 있을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알몬드 중장의 한국인 고문 현봉학 박사와
한국군 1군단장 김백일 장군 등이
“장비보다 민간인의 목숨이 더 중요하다”고 버텨
결국 장비와 탄약은 대부분 폭파시키고
대신 10만여 명의 피란민을 태워 철수하기로 결정한다.  
‘흥남철수’를 있게 만든 주인공 美해병 1사단은 12월 15일
일부 병력이 철수한 것을 시작으로 끝까지 중공군을 막다가
12월 24일 마지막으로 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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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남철수 당시 민간 1만 4,000여 명을 태우고 피난길에 올랐던
민간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 ⓒ해외 6.25관련 단체 사이트 캡쳐
 
이 과정에서 민간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전설도 생겨났다.
당시 일본에서 전투기에 보급할 항공유를 싣고 왔던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흥남부두의 피란민을 보고선 두 말 없이 태웠다.
이렇게 남쪽으로 피난 온 사람이 1만 4,000여 명에 달했다.
남쪽으로 항해하는 중에 5명의 새 생명도 태어났다.  
이 흥남철수를 통해 유엔군 10만 5,000여 명, 피란민 9만 8,000여 명이
무사히 남쪽으로 내려왔고, 유엔군은 차량 1만 7,500대,
각종 물자 35만 톤을 가져올 수 있었다.  
 
흥남철수를 통해 남쪽으로 온 사람들 가운데
장사를 시작한 사람들이 모인 곳 중 하나가 국제시장이다.
이 모든 과정을 축약해 이야기를 시작하는 영화가 바로 ‘국제시장’이다.  
이처럼 장진호 전투와 흥남철수, 그리고 국제시장은 모두 하나로 이어져 있다.
그럼에도 64년 뒤 한국 정치권에서는 이를 무시하고 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
박승춘 보훈처장의 당연한 분노


지난 11월 13일 국회 정무위원장실.
정우택 정무위원장(새누리당)을 찾아간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은 서류를 내팽개치며 분노했다고 한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게 말이 됩니까?”

국가보훈처가 미국 측이 모은 기금에 보태
워싱턴 D,C의 알링턴 국립묘지에 ‘장진호 전투 기념비’를 세우려던
예산 3억 원을 국회 정무위원회가
“미국에 이미 같은 기념비가 3개나 있지 않느냐”며
전액 삭감했기 때문이다.  
국회 정무위는 이뿐만 아니라
유엔평화기념관 전시물 확보예산 20억 원도 전액 삭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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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에 출석한 박승춘 국가보훈처장. ⓒ뉴데일리 DB
 
 
한국 현대사를 생각한다면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의 분노에 찬 항의는 당연해 보였다.
하지만 국회 정무위의 새누리당 의원들 생각은 달랐다.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이
정우택 의원의 책상에다 서류를 내팽개치는 것에만 집착해
“사과하라”고 강력히 항의한 것이다.  
 
결국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은 국회 정무위 회의에 출석해
“죄송하게 됐다”며 고개를 숙였다.  
 
이 소식이 알려진 뒤 국민들은 새누리당 의원들에 분노했다.
국회 정무위가 예산 삭감의 이유로 내세운 기념비 3개는
미국인들이 성금을 모아 만든 것으로 한국 정부가 만든 기념비는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비난 여론이 빗발치자 국회 정무위는 국가보훈처가 요구한 예산 가운데
절반인 1억 5,000만 원을 배정해줬다.  
하지만 이후로도 국회 정무위를 이끌고 있는 정우택 새누리당 의원은
 “잘못 생각했다”는 말을 전혀 하지 않고 있다. 
 
한국도 미국도 잊지 않은 희생,
우습게 보는 국회 정무위원들 ‘국제시장’ 보지 말길


흥남철수, 그리고 국제시장을 있게 해 준 장진호 전투는
지금도 한국과 미국 양쪽에서 모두 회자되는 ‘전설’이다.
참전용사 대부분이 세상을 떠났어도
그들의 유산을 지키려는 노력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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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해병 1사단 현역·예비역 장병들이 세운 장진호 전투 기념비.
그들의 희생 덕분에 살아난 한국에는 이런 기념비가 없다. ⓒ美국방부
 
2011년 4월 25일 ‘조선일보’는
美헐리우드 감독 에릭 브레빅과의 인터뷰 기사를 내놨다.
에릭 브레빅은 ‘혹한의 17일’이라는 영화를 제작 중이었다.
장진호 전투를 다룬 영화였다.  
에릭 브레빅 감독은 조선일보와 인터뷰에서
장진호 전투를 담은 영화를 제작하게 된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잊혀진 전쟁을 세상에 알리고 동료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린
용감한 병사들을 기리고 싶다.
전쟁영화에 흔히 등장하는 영웅주의는 배제하겠다.
대신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진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가운데 피어나는 휴머니즘을 그리고 싶다.
북한 피난민 소녀가 美해병과 사랑의 감정을 싹 틔우는 장면은
전쟁에 대한 성찰을 제공할 것이다.”

64년 전 이역만리에서 추위에 시달리며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지키다 숨진 美해병 1사단 장병들,
그들의 도움으로 흥남에서 철수해 새로운 인생을 개척한 피란민들,
그리고 그들의 삶터였던 국제시장.  
영화 ‘국제시장’이
상영 일주일도 안 돼 관객 170만 명을 넘었다는 점은
한국 국민들 또한 6.25전쟁과 그 속의 역사,
삶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국제시장’을 관람한 국민들이 장진호 전투에 대해 알게 되면
美해병 1사단 장병과 흥남철수의 주인공들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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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말 흥남철수 당시의 상황.
이들 가운데 국제시장을 키워 온 피란민들도 섞여 있다.
ⓒ6.25전쟁 기념사업회 블로그
 
 
‘국민의 대표’라 자칭하는 국회의원이,
그것도 여당 소속으로 도지사까지 지낸 국회 정무위원장이
‘장진호 전투’의 역사적 의미와 고마움을 모른다면
국민들로부터 온갖 비난받아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정우택 의원 본인은 “결코 그런 뜻이 아니다”라고 변명할지 모르지만,
지금까지 보여준 ‘행동’으로 봤을 때 자신 또한 피란민의 아들로,
장진호 전투가 없었다면
김씨 일가 치하에서 태어났을 문재인 새민련 의원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정우택 의원은 아마 24일이 흥남철수가 끝난 지
64년째인 것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24일 후일담: "장진호 전투 기념비 예산삭감,
김기식 의원 탓" 

24일이 되자 정우택 정무위원장실의 한 보좌관이 전화를 걸어
“장진호 전투 기념비 예산 삭감에는 아무 책임이 없다”고 강하게 항의하며
 “기사를 삭제 또는 정정보도 해달라”고 요구해 왔다.  
정우택 정무위원장실 보좌관은 그러면서
 “장진호 전투 기념비 예산 삭감은 김기식 새민련 의원 책임”이라고 떠넘겼다.
24일 정우택 정무위원장실에서 보내 온 공문의 내용은 이랬다. 
 
“국가보훈처 소관 예산안은 정우택 정무위원장이 주재하는
정무위원회 전체회의에 상정하고,
보훈처장의 제안 설명과 전문위원의 검토보고를 들은 후
위원들 상호 간에 대체토론을 한다.
 
이후 예산안을 보다 심도 있게 심사하기 위해
예산안 심사 소위원회로 회부하고 여기사 세밀한 심사가
이뤄지도록 위임한다.
 
그 심사결과를 정우택 정무위원장이 주재하는 전체회의에 보고를 하면,
정무위 전체회의에서는 심사결과를 다시 심의한 다음 최종적으로 의결한다.
 
장진호 전투 기념비 건립 예산 삭감은 이런 내부 프로세스 중 하나인
예산안 심사 소위원회의 심사단계에서 이뤄진 것으로서,
이때는 정우택 정무위원장은 심사에 참여하지 않았다.
정우택 정무위원장은 예산안 심사 소위원회 심사 후에
정무위 전체 회의를 열어 이러한 소위원회 심사결과를 보고 받았으며,
이후 전체 위원들 간에 논의를 거쳐 장진호 전투 기념비 예산을
반영하기로 최종 의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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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국회 정무위원장 정우택 의원실에서 보내 온 공문.
장진호 전투 기념비 예산삭감이 수많은 언론에 보도된 이유가
단순한 예산삭감이 아니라는 것을 여전히 모르는 눈치다. ⓒ뉴데일리
 
얼핏 들으면 그럴싸해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
심의 절차를 전혀 몰라서 정우택 정무위원장을 비판했을까.
문제의 핵심은 예산삭감의 책임여부만이 아니다.
그 이후의 태도와 행동이 더 문제다.
‘여당 중진의원’이 가져야 할 역사관과 리더십,
판단력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기식 새민련 의원은 초선 비례대표다.
참여연대에서부터 그의 행보와 발언은 잘 알고 있다.
특히 국방력 강화 등에 대한 김기식 새민련 의원의 발언은 "인상적"이었다.   
김기식 새민련 의원이 정무위 예산안 심사 소위원회에서
장진호 전투 기념비 예산을 삭감하자고 했어도 ‘3선의 정무위원장’이라면
그를 설득하는 노력을 하는 게 옳지 않은가.  
 
박승춘 보훈처장을 전체회의에 불러내 강제로
 ‘사과를 시킨’ 것 또한 민망하다.
국민들이 보기에는
정무위원회가 박승춘 보훈처장이 분노한 이유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존엄하신 정무위원장’의
책상을 탕탕 친 것을 문제 삼았다고 이해하고 있다. 
박승춘 보훈처장이 "감정에 북받쳐"한 행동을 '꾸짖으려' 한
정무위원회 의원들은 '땅콩 甲'인가? 
 
정우택 의원이 위원장인
정무위원회가 장진호 전투 기념비 예산 삭감도 모자라,
여기에 항의한 보훈처장을
‘공개석상’으로 불러내 '사과를 시킨' 것도 문제였다는 말이다. 
정우택 의원 측은 “사실은 다르다.
예산 삭감에 안타까워 했다”고 해명하고 있지만,
'장진호 전투'와 관련해서 왜 아직 아무런 행동도 없었는가.
바빠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정우택 의원 뿐만 아니라 국회 정무위원회 의원들은
영화 ‘국제시장’을 보러 가지 말았으면 한다.
관객들이 왜 10점 만점을 줬는지 모를 테니까 말이다.  
 
자국민과 유엔군 20만 명의 목숨을 구한 장진호 전투조차
‘그것 따위’로 만들어 버리시는 ‘최고존엄’ 여야 정무위원들께서
 ‘허드렛 한국 짚신 역사 따위’나 보는 건 너무 ‘격’이 떨어지지 않겠나.
물론 그렇게 ‘허드렛 것’ 취급을 받는 국민들 입장에서는
그런 '최고존엄들'과 같이 영화를 봤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기분이 나쁠테니까 말이다. 
 

 

 

굳세어라 끝까지, 국제시장 세대여

 

 

 좀 늦었다. 오늘(1/2)에야국제시장엘 가보았다.
내가 국제시장을 처음 본 것은 1950년 말~1954년 초 기간의 부산 피난시절이었다.
비록 영화 속에서였지만 오랜만에 국제시장을 다시 보니 만감이 스쳤다.
쯧쯧쯧 또 저 얘기...” 하고 비웃을 사람들이 많겠지만, “그래 어쩔래? 내 맘이다.”라고 해주겠다.

 

 내 맘이란 딴 게 아니다.
주인공의 끝 맘이 곧 내 맘하고 같다는 뜻이다.
아부지예, 지 참 힘들었어예...”
하기야 인생 자체가 힘든 것이고, 나만, 우리 세대만 힘든 건 아니다.
스펙 쌓느라 죽을 둥 살 둥, 낑낑대고 사는 요즘 세대라고 왜 삶이 팍팍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어쨌든 우리 세대 여기까지 참 힘들게 왔다.

 

 열 살 안팎 소년들이 전쟁을 만나고, 이산가족이 되고, 찢어진 가난을 겪고, 파독광부와 간호사가 되고, 월남전에서

죽다 살아나고, 산업화, 민주화를 이룩하고...
고비 고비 더듬다 보면 참 말이지 두 번 살라면 못 살 인생이었다.
그래서 주인공은내가 이러고 싶어서 이러느냐?
이게 내 운명이고 팔자니까 이러는 거지라고 소리친다.

 

 동감이다.
즐거워서 산 것보다는 죽지 못해 산 부분이 반 이상이었으니까...
요즘 같았으면 게임기나 들고 있을 나이에 구두닦이 통을 들고 산 10대를 거쳐, 온갖 시대적 격동으로 얼룩진 

20~40대를  살면서 심신에 만신창이가 나도록 상처를 입은 게 국제시장 세대다.
그러면서도 오늘의 보람을 일군 성취의 세대이기도 하다.
아들 며느리 손자들이 찾아오면아이고 내 새끼들...” 하며, 껴안고 둘러싸이는 오늘의 대한민국 실버 세대 말이다.

 

 그런데 이게 뭐가 나쁘다고 야단들이냔 말이다.
너흰 이걸로 만족하라느니...”
어쩌고 악담들을 퍼 부우면서 말이다.
마치, 이런 사연을 왜 자꾸 상기시키느냔 듯, 야단들이라니... 알 만하다.
저들은 이 현대사가 망각되길 바란 것이다.
이 현대사가 쫄딱 망하는 역사였으면 아마 안 그랬을 것이다.
이 현대사가 지들이 보기에도 지금 현재해피 엔딩으로 가는성공 스토리로 보였기에, 이게 자꾸 조명되고 또

재조명되고 하는 게 아마 더럽게도 배가 아팠던 모양이다.

 

 저들은학생인권조례라는 걸 만들어 우리 현대사를 나쁜 역사, 망한 역사, 망해야 할 역사라고 주입받은

홍위병 세대를 찍어내려 한다.
그런데 이런 영화가 나와, 청소년들에게아부지예... 지도 이만하면 열심히 살았지예?” 하는 긍정(肯定)의 사관(史觀)

심어주는 게 되게 싫었을 것이다.

 

 ?  "영화가 역사를 다루면서 역사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다"?
역사를 자기들의 이념의  틀 속에서만 파악하라 이 말이지
역사는 열심히 식구 먹여살리는 '덕수(주인공)'들의 애환 속에서 진국처럼 울어나는 것이지별로 우수하지도 않은 

'의식분자'의 머리 속에서 짜맞춰진 '관념의 도식(圖式)' 아니다.   

 

 저들은 지금까지 문화권력을 틀어쥐고 수많은, 설익은 좌파상업주의 영화들을 양산해 극장가를 독식해 왔다
그런데국제시장은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명량이 나왔을 때도, 이건 우리 것 아닌데...” 했다가 이번에국제시장을 보고선 결정적으로, 이 친구들 봐라,

영화는 우리 판인데...” 하고 눈살을 찌푸렸던 것 같다.

 

 좌파상업주의의 장본 CJ 엔터테인먼트가 과연 어떤 '' 타산에서 이런 영화에 손길을 뻗치게 됐는지는, 그 뱃속에 들어가

보지 않고선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에 윤리적 가치관 따위는  기대할 수 없다
애국심 같은 건 더더군다나노 웨이.  
돈이 안 된다 싶으면 거뜰떠보지도 않는 게 ‘의 생리다
그런이 대한민국 자수성가 세대의 보람 스토리를 영화화 했다?
 ‘
의 초()정밀 촉각이 무슨 '돈 되는 트렌드'라도 새로 읽었다는 뜻일까?

 

 지난 대통령 선거기간에보수층이랄까 하는 유권자들, 특히 기성세대는 큰 충격을 받았다.
박근혜 후보 떨어뜨리려고 나왔다고 한 이정희 후보의 섬뜩한 모습을 보고서.
그 이래 통진당 해산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자수성가 세대는이대로 놔둘 순 없어!”라며 분기탱천 한 바 있다.
2014
년 한 해만 해도 광화문  광장이 얼마나 시끄러웠는가?
이에 넌덜머리를 낸 자수성가 세대가 오늘도  상영관 안을 꽉 메웠다.
지팡이 들고, 며느리 부축 받으며, 엘리베이터 안에서대한극장에서 벤허 본 뒤 극장은 처음인데하면서.
이들은 오늘날 유권자의 다수파다.

 

 사람은 진정 무엇으로 사는가?
처음엔 고생해도 나중에 흐뭇하게 여기는 맛에 산다.
국제시장 세대는 그런 삶을 산 세대다.
이 세대가 아들 딸 하나씩이라도 비슷하게 키운다면, 그리고 그들이 또 아들 딸 하나씩이라도 비슷하게 키운다면 대한민국이

후까닥 넘어갈 일은 없으련만글쎄다

 

류근일 2014/1/2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aestheticismcl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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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은 영화국제시장보고 반성했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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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영(lee***) 2015.01.01

 

문재인은 영화 국제시장을 보고 자기 가족사와 흡사하다고 했다.  

흥남시청 농업과에 계장으로 근무하던 父 와 함께 母도  미군이 제공한  LST  함정을 타고 남으로  와서 고생을 하면서 살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부모는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 군주  체재를 벗어나 서 미군에도움으로  자유를 찾아 남으로 왔으면  고향을 버리고 와서 고생을 하게한  원인제공자 김일성 군주체제를 비판해야 되고  

 

무기까지  버리고 부모를 태우고 자유를 찾게 한 미군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져야 하고  부모가 피난 못나와 북에서 살았으면  문재인은 북에서 태어나  밥 굶고  살았을지 모르는데도 이런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친북을 하는 것은   자유를  택한  부모님의 뜻을 저버리는일 아닌가?  영화를 봤으면  이런 점을 반성했어야  옳은일이다  

 

문재인은 자기 가 쓴 운명에서 우리 집 가난도 아팠지만 부모님이  분단과 전쟁 때문에 당신에 삶을  잃은 것이 안타깝다고 썼다. 

 

그런 생각이  본심이라면........  누가 전쟁을 일으켰나 ? 누가 당신 부모님에 삶을 빼앗어 갔나? 를   되 돌아 보고  친북을 하지 않는 것이 자식에 도리 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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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아버지의 흥남철수 진실”

 

 

문재인“아버지의 흥남철수 진실”

[포커스]

 

문재인“아버지의 흥남철수 진실”자신의 출명지은 생명은덕마저 잊은 문재인의 배은망덕 패륜 ,열우당 정권은 미군을 악마로,김백일 장군을 친일파로 몰았다 김동일 기자,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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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남철수 작전에 참가한 '메러디스 빅토리호' 역사상 최대인명구조로 기네스. 

 

 

 

-문재인의 배은망덕 패륜

프런티어타임스 논객 중 필명 수양산이 있다, 이제 곧 80을 바라보고 있다,

한반도의 불운세대 30년대 생이라지만, 일제와 6.25, 월남전과 산업화를 줄줄이 치뤄낸 역전의 세대이다, 수양산은 황해도가 고향이다, 광복이 되고 북한에 소련군이 진주해 오면서 수양산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반동분자' 가문이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끌려가고 아버지는 남한으로 탈출했다,

1년 후에는 빨갱이들의 등쌀에 못견더 수양산도 친구들과 3.8선을 넘어 남하했다,

그 때가 1948년이었다, 그러다가 6.25가 발발했다, 인민군 치하의 서울에서 인민위회에 붙들려 인민군으로 강제 징집되었다, 북으로 패주하던 중 간신히 탈출에 성공하여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래서 수양산은 빨갱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

빨갱이들이 인천 맥아더 동상을 철거하겠다고 난리를 피울 때 수양산은 노구에도 불구하고 신체 건장한 젊은 빨갱이 녀석에게 육탄돌격을 하기도 했었다,

이번 총선에서 민주당 후보의 선거 운동원들이 '제주 해군기지는 해적기지'라고 유세를 펼치자 수양산은 대갈일성으로 민주당 선거운동원들을 제압하여 사과를 받아내기도 했었다,

북진을 거듭하던 1950년의 겨울, 중공군이 쳐들어오면서 6.25의 전세는 역전되었다,

중공에 밀리게 되면서 함경남도 일대의 미 해병대 12만 명과 국군이 중공군과 북한군에 포위되었다, 이 소식은 미국 전역으로 방송되었다, 방어전을 준비하던 맥아더는 결국 후퇴 명령을 내렸다, 그 유명한 '흥남철수'가 시작 될 판이다,


미군이 철수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남으로 내려가려는 피난민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철수 계획에 민간인은 포함되지 않았다, 민간인은 미군에게는 적국의 국민이었다, 미군에 근무하는 한국인과 한국군들이 미군 측에 피난민들도 철수 시켜달라고 사정하며 항의했다,
그러나 군인 10여 만명에 피난민 10여 만명, 20만이 넘는 되는 숫자였다,
미군은 난감했다,


흥남철수에는 감동적인 인물들이 등장한다, 김백일 장군은 이런 결정을 내렸다,

"만약 미군이 피난민을 두고 간다면 국군이 엄호하면서 육로로 걸어서서 후퇴하겠다"

미국의 알몬드 장군은 수만 명의 피난민들이 가득 찬 흥남부두를 헬기로 시찰하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살인적인 추위에도 불구하고 물속에 하반신을 담근 채 배를 구하려고 아우성치는 피난민들이 들어왔다, 알몬드가 말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을 두고 갈 수 없다, 이 사람들을 모두 데려간다"

결정이 내려지자 남한과 일본에 배들이 징집되어 올라왔다,

그 배들 중에 '메러디스 빅토리호'라는 배가 있었다, 선장은 레너드 라루였다,

배에 올라온 미군 대령이 선장에게 말했다, "우리가 당신에게 피난민을 태우라고 명령할 수는 없소, 당신이 자원하여 얼마라도 태워주시오" 라루 선장은 최대한 빽빽히 피난민들을 태웠다, 1만 4,000명이라는 기록적인 숫자였다,

이 기록은 기네스에 올랐다고 한다.

흥남부두의 피난민들 중에는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는 문재인의 부모도 있었다,
6.25 이전에 월남한 수양산이 반공 1세대라면 6.25 와중에 월남한 문재인 부모는

반공 2세대이다, 이들은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핍박을 직접 체험했거나, 인민군의 만행을 목격했기에 뼛속까지 반공일 수밖에 없었다, 6.25는 사람들을 분류해 줬다,

;인민은 북조선으로 대한 사람 대한으로, 대한민국의 반공은 이렇게 태어났다, 반공은 이렇게 대한민국의 근간이 되었다, 이런 부모 밑에서 문재인이 나오다니, 문재인은 부모님이 탄 배가 소련으로 가는 줄 알았던가,

문재인을 보면 열우당의 코드였던 '패륜'이 떠오른다,

친일파를 때려잡자던 열우당 신기남 김희선 의원의 부친은 독립군 때려잡던 일제경찰 특무였다,

자기 에미애비도 모른 것들이 정치를 한답시고 설쳐대다니, 그 무지와 패륜에서 열우당을 능가할 것이 없었다, 열우당 피는 속일 수 없어 문재인도 반공 부모 밑에서 종북 아들로 태어났단 말인가,

물 반 빨갱이 반이었던 열우당 정권에서 문재인이가 출세를 했다는 것을 문재인 부친은 알고 있을까, 주사파들의 도구로 쓰라던 노무현의 비서실장을 하고, 그 노무현의 후계자로 문재인이가 물망에 오르고 있다는 사실을 문재인 부친이 안다면 문재인 부친은 무덤에서 당장 뛰쳐 나와 아들의 다리 몽뎅이를 분지를 것이 틀림없다, 수양산이나 문재인 부친이나 코드가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문재인의 열우당 정권은 미군을 악마로 몰았고 김백일 장군을 친일파로 몰았다,

문재인은 은인들을 원수로 갚은 셈이다, 부모에게는 패륜, 은인에게는 원수,

이런 인간이 대통령 물망에 오르내린다니, 코메디가 따로 없다,

 

문재인이가 흥남부두 피난민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고나서 문재인을 보니

인간이라는 것 자체가 역겨워진다, 


문재인은 자기 부모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고나 있기는 할까,

알고도 그랬다면 패륜이고 모르고 그랬다면 무식이다,

문재인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 흥남철수가 할리우드에서 영화로 제작되고 있다,

문재인은 이 영화를 꼭 봐야 한다, 그리하여 부모의 생애를 알고 그것에 경의를 바친 다음에, 대한민국의 역사에 애정을 가진 다음에야 정치판에 명함이라도 내밀 군번이 되는 것이다, 

<프런티어타임스 김동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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