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과 그의 시대
저자 이덕일, 출판사 옥당출판사, 2014
조선건국 프로젝트
고려 말, 토지제도가 무너지면서 힘 있고 강한 자는 남의 토지를 빼앗아 더 부농이 되고, 가난한 자는 송곳 하나 꽂을 땅도 없게 되었다. 일 안 하는 소수는 호화롭게 살고 뼈 빠지게 일하는 다수는 가난하게 사는 이런 왕조가 왜 존속해야 할까? 정도전은 무너져가는 고려 왕실을 의연하게 등지고 새로운 왕조를 향해 결연히 나아갔다. 조선 개국의 이념과 조선 왕조 500년의 기틀을 마련한 정도전, 그가 원한 세상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나는 백성이 안녕한 나라를 꿈꾼다!” “백성은 국가의 근본인 동시에 군주의 하늘이다!”
정도전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혼란스러운 고려 말의 위기를 극복하고 조선을 설계했으나 큰 뜻을 제대로 펼쳐보기도 전에 이방원의 칼날에 죽음을 맞이한 비운의 혁명가라는 이미지다. 하지만 조선의 설계자라는 단순한 설명만으로는 그의 삶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그가 살았던 시대, 고려 말 조선 초의 시대적 상황과 그를 세상으로 이끌어낸 원동력을 이해하지 못하면, 왜 그가 이성계를 만나 조선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 했는지, 무엇이 그를 백성을 대변하는 정치가로 만들었는지, 그가 만들고자 했던 나라, 그의 이상은 과연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다.
정도전은 고려 말의 혼란을 불러온 가장 큰 원인을 토지제도로 보았고, 그 폐해를 없애는 것을 새 왕조 개창의 명분으로 삼았다. 과전법은 조선 왕조 개창의 정당성을 설파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었다. 왕조 교체를 정당화할 수 있는 수단이 사전개혁이었고, 과전법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바탕에 성리학이 있었다.
민위귀사직차지(民爲貴 社稷次之)
정도전은 우왕 원년(1375) 5월 개경에서 나주까지 머나먼 귀양길에 오른다. 그가 귀양길에 오른 것은 친원정책을 주장하는 전통적인 보수파에 맞서 친명정책을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고려는 외교정책을 두고 신구 세력이 갈등하고 있었는데, 이인임, 경복흥 등의 구세력은 친원정책을 주장했고, 이색, 정몽주, 정도전 등의 신세력은 친명정책을 주장했다. 신세력의 주장은 공민왕의 유지를 계승해 원나라의 속박에서 벗어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친원 세력인 구세력은 계속 북원과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신세력의 반대 주장을 받아들이기는커녕 정도전에게 원나라 사신 접대를 명했다. 격분한 정도전은 경복흥을 찾아가 “나는 원나라 사신의 목을 베어 오든지, 아니면 오라 지워서 명나라로 보내겠소”라고 따진다. 이를 항명으로 판단한 이인임, 경복흥 등이 정도전을 유배형에 처함으로써 정도전의 인생은 급전직하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렇게 유배형에 처해진 정도전은 장장 9년 동안 유배·유랑 생활을 하게 된다. 살아 있는 권력의 표적이 되어 복권될 희망을 점점 잃어가던 그의 괴로움과 외로움을 달래준 사람은 뜻밖에도 유배지의 부곡민들이었다. 편견의 시선 없이 온정을 베풀어주고, 책이 아닌 경험으로 습득한 인생의 지혜를 알려준 부곡민들 덕분에 그는 마음속에서 자라나던 절망을 버리고 희망의 싹을 틔우게 된다.
그가 발견한 희망은 바로 백성, 곧 민중이었다. 다시 벼슬아치로 돌아갈 수 없는 사대부의 현실에 놓이게 되자 비로소 백성의 삶이 보였고, 백성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 이것이 고려 474년 왕조가 멸망하는 단초가 된다. 현실에서 절망한 한 지식인이 민중의 삶에 주목하게 되었고, 민중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정도전은 자신의 인생을 위해서나 세상을 위해서나 승부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9년간의 유랑 생활에서 쌓은 사상을 실현할 무대가 필요했다. 그래서 정도전은 우왕 9년(1383), 승부수를 던진다. 바로 함주에 있는 이성계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결합은 단순히 불우한 지식인과 촉망받던 무장의 만남이 아니라, 극심한 양극화에 시달리던 고려의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가진 지식인과 이를 실천할 수 있는 군사력을 가진 무장의 만남이었다. 이 만남은 그의 인생과 고려의 운명에 대전환점이 된다.
민지본토위(民之本爲土)
고려 말, 백성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을 겪고 있었다. 고려 말 권문세족들이 가진 토지의 크기는 산천으로 경계를 삼을 만큼 컸다. 그렇게 거대한 토지를 만드는 방법은 가난한 농민의 땅을 강탈하는 것이었다. 대다수 농민들은 권세가에게 땅을 빼앗기고 전호, 즉 소작인이 되거나, 권세가의 집에 자신의 토지를 기탁해 노비로 전락하는 수밖에 없었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 <부전>에서 고려 말의 토지 상황을 “토지제도가 무너지면서 세력 있고 강한 자는 남의 토지를 겸병해서 농토가 끝도 없이 이어졌지만, 가난한 자는 송곳 꽂을 땅도 없게 되었다”라고 개탄했다. 또 《고려사》 <식화지>에는 “권세가들이 남의 땅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이라고 우기면서 주인을 내쫓고 땅을 빼앗아 한 땅의 주인이 대여섯 명이 넘기도 하여 전호들은 세금으로 소출의 8~9할을 내야 한다”라는 구절도 있다. 가난한 전호가 소출의 8~9할을 빼앗기고 어떻게 먹고살 수 있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이 농장들은 국가에 세금도 내지 않았다. 그러니 국가로서도 여간 큰일이 아니었다. 국가에 세금을 내는 백성들이 권귀에게 투탁해 노비로 들어가 세입원이 줄어든 데다 막대한 땅을 가진 권귀마저 세금을 한 푼도 안 내니 국가는 가난해진 반면, 권귀들만 부자가 되었다. 백성의 불만은 점점 거세졌고, 부곡민들과의 교류를 통해 농민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 정도전은 백성을 위한 새로운 토지제도를 구상하게 된다.
정도전은 대사헌 조준이 전제개혁, 즉 토지개혁에 관한 상소문을 올리게 한다. 1388년 7월, 조준은 “임금의 정사 중에서 경계를 바로잡는 것, 즉 토지제도를 바로잡는 것만큼 중요한 게 없다”라면서 강력한 토지개혁을 주장하는 상소문을 올린다. 조준 등은 1389년 12월 다시 상소문을 올려 토지 문제에 대한 처리 방안을 이야기하고, 대대적인 양전 사업의 결과 총 50만 결의 토지를 찾게 된다. 그간 이 농지 상당수가 권세가들의 개인 소득이 되었던 것인데, 이것이 정도전, 조준 등의 역성혁명파가 새 나라를 개창할 물적 토대가 된다.
토지는 사회 구성원 전체가 나누어 사용해야 하는 유한재이므로 한 사람이나 한 집단이 독점할 수 없다. 역성혁명파는 이런 당연한 진리를, 그러나 실천하기에는 너무도 힘든 진리를 실천한 것이다. 과전법은 이런 토대 위에서 공포되었다. 조선 개창 1년 전인 1391년 5월의 일이었다.
과전은 공전과 사전으로 나누었으며, 죽으면 반납해야 하는 토지이므로 토지의 소유권이 아니라 수조권, 즉 세금 받을 권리를 주었다. 조와 세에 대해서는 이렇게 규정되어 있다. 무릇 공전과 사전을 막론하고 1결당 조는 수전, 즉 논이면 조미 30말이고, 한전, 즉 밭이면 잡곡 30말인데, 그 이상을 제멋대로 거두는 자는 장죄, 즉 뇌물죄로 처벌한다. 무릇 토지를 점유한 자는 세를 나라에 납부해야 하는데, 논은 1결에 백미 두 말, 밭은 1결에 황두, 즉 누런 콩 두 말로 한다.
해당 농지의 수확이 몇 퍼센트 줄어들었는지 판단하는 것도 체계적이고 공정했다. 각 주현의 수령이 직접 가서 조사하여 이를 감사, 즉 지금의 도지사에게 보고하면 감사는 담당관을 보내 재심하게 하고, 감사와 수령관이 삼심하는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고 있었다.
또한 벼슬아치들이 수조권을 남용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농민들의 경작권을 강력하게 보호했다. 농민의 경작권은 벼슬아치의 수조권에 당당히 맞설 수 있는 법적인 권한이다. 과전법에서는 농민의 경작권도 국가에서 법으로 철저히 보호했다. 높은 벼슬아치라고 마음대로 농민의 경작권을 빼앗을 수 없었다. 경작권이 사실상의 소유권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경작권을 타인에게 매매하는 것을 금지해 사전의 발생을 억제하고 농민생활을 보장하려 했다.
역사의 거울(歷史的鏡鑑)
역사는 반성의 도구다. 역사서에 송나라 사마광의 《자치통감》이나 조선 서거정의 《동국통감》처럼 ‘거울 감鑑’ 자를 쓰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현재의 우리를 돌아보게 하는 거울이란 뜻이다. 옛사람들은 역사를 전철, 즉 앞서 지나간 수레바퀴라고 했다. 잘못된 길로 가다가 수레가 엎어졌던 시대를 교훈 삼아 현재의 우리를 돌아보고 미래의 길을 잘 선택해야 한다는 뜻이다. 지금 ‘정도전과 그의 시대’를 되돌아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도전이 살았던 쉰여섯 해는 현재의 우리를 되돌아보게 하는 거울로 부족함이 없다.
한 지식인, 한 사상가의 전략으로 고려가 무너졌다는 것은 그만큼 체제 내에 문제가 많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런 문제가 비등점을 향해 달려갈 때 체제 교체의 기운이 싹트는 것이다. 정도전의 인생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근본적인 메시지는 ‘한 사회가 내부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할 경우 체제 자체가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과 부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고, 이를 사회 내부에서 순리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면 비등점을 향해 치닫게 될 가능성이 있다. 정도전의 인생은 그런 불행한 사태를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자신에게 배우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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