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10년 1회 졸업식 기념 사진. 9월 말 한 중앙일간지가 ‘한국 사회 파워 엘리트’에 대한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내용 중엔 ‘고교별 파워 엘리트 배출 순위’를 매긴 것도 있었는데, 그중 한 학교의 이름이 유난히 시선을 끌었다. 휘문(徽文)고등학교였다. ‘1950년 이전 출생’ 엘리트 배출 순위는 23위이던 것이, 50년대생 수는 13위, 60년대생은 8위, 70년대생에 이르러서는 3위를 차지한 것. 이렇듯 지속적인 교세 확장을 보여준 학교는 휘문이 유일했다. 아닌 게 아니라 개교 당시부터 휘문은 명문 사립으로 명성이 드높았다. 휘문의 모태가 된 것은 명성황후 조카인 민영휘 공이 1904년 학생 30명을 받아들여 자택에서 문 연 ‘광성의숙’이다. 1906년 고종 황제로부터 ‘휘문’이라는 교명을 하사받아 서울 종로구 원서동 옛 관상감 터(현재 현대그룹 계동 사옥 자리)에 교사(校舍)를 신축했다. 그해 첫 입학시험을 치러 1회 130명을 선발했다. 휘문이 1904년이 아닌 1906년을 교사(校史) 원년으로 삼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일제강점기, 휘문은 사립임에도 인쇄부·서적실·각종 과학실험 기기 등 각종 ‘첨단교육 시설’을 갖춰 다른 학교들의 부러움을 샀다. ‘귀족학교’ ‘신사학교’로 불리기도 했는데 자유로운 학풍, 인문학적 교양이 넘치는 분위기 때문이었다. 일본인이 많다 해서 공립을 마다한 다수의 명문가 자제들이 휘문을 택했다. 소설가 김훈(58회) 씨는 “6·25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60년대에도 휘문의 학풍은 자유로웠다. 다른 학교 학생들은 머리를 빡빡 깎고 다녀야 했지만, 우리는 머리를 길렀고 교복도 여러 종류 중 골라 입을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 같은 분위기는 오늘날도 여전해, 김선규 교장은 “우리 학교는 3년 전에야 다시 교복을 입기 시작했다. 아마 가장 늦게까지 ‘사복’을 고수한 학교 중 하나일 것”이라 말했다.
휘문을 빛낸 문인들
|
 |
김유정, 정지용 휘문은 우리 문학사를 떠받치고 있는 대표적 문인들을 여럿 배출했다.
소설가로서는 박용철(1916년 입학), 박종화(11회), 이무영(1920년 입학), 이태준(1921년 입학), 김유정(21회), 최태응(1930년 입학), 오장환(1931년 입학), 방영웅(53회), 김훈(58회), 오세영(65회) 등이 있다. 시인은 더 쟁쟁해 홍사용(10회), 정지용(15회), 김영랑(21회), 이인영(21회) 등이 휘문 출신이다. 정지용 시인은 특히 모교 영어교사로 근무해 많은 학생들에게 지워지지 않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임꺽정’의 홍명희, ‘오발탄’의 이범선, ‘얄개시대’의 조흔파(본명 조봉순), 전광용, 정한숙 등도 휘문의 교사로 근무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