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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조선 선비의 삶과 선비정신

조선 선비의 삶과 선비정신
 

 정옥자 서울대 국사학과 명예교수가 로타리클럽에서 펼친 ‘조선 선비의 삶과 선비 정신’ 강연 내용을 요약해 소개한다.

조선시대 지식인은 '선비(士)'다. 선비는 꼿꼿한 지조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두려워 않던

강인한 기개, 옳은 일을 위해서는 사약과 귀양도 불사하던 불요불굴의 정신력,

항상 깨어 있는 청정한 마음가짐이 특징이다.

선비란 성리학을 주 전공으로 하여 그 이념을 실천하는 학인(學人)이었다.

수기치인(修己治人)을 근본으로 사대부(士大夫)가 되는 것을 최종 목표로 하는 존재다.

인격과 학문을 도야하는 '수기'가 어느 수준에 도달해야 다른 사람을 다스리는 '치인'으로 갈 수 있다.

치인이란 남을 지배한다거나 통치한다는 권력 개념보다는 자신을 닦아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군자가 되어 백성(民)을 위하여 이바지하는 봉사 행위를 의미했다.

지행일치(知行一致)를 중시

선비의 전공 필수는 인문학, 특히 철학에 해당하는 경학(經學)이 핵심이었다.

경학이란 성리학의 이기론(理氣論)을 해명하는 것이 최대 과제였다.

우주, 자연, 인간의 모든 현상은 작용으로, 기(氣)와 작용의 원리로서 이(理)에 의하여

일관된 잣대로 생성·변화·소멸한다는 논리다. 또 역사를 중시했는데, 우리 역사와 더불어

동양 문화권의 주도국이던 중국의 역사를 이해하는 게 필수였다. 그 흥망성쇠의 교훈과

변화 요인에서 삶의 지혜를 이끌어 내는 게 목적이었다.

경학과 역사는 '경경위사(經經緯史)'로 이해되었다. 경전의 진리는 세상이 변하고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기 때문에 날줄인 경(經), 역사는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현상이므로 씨줄인

위(緯)로 이해됐다. 이렇게 파악한 진리를 표현하는 매개체는 문장이다. 아무리 위대한

사상이나 진리도 그에 합당한 문장력이 없다면 여러 사람에게 알릴 수가 없다. 문장이란

진리(道)를 담는 그릇인 기(器)로 이해됐다. 도기론(道器論)은 경경위사와 문장론의 상호 보완 관계로 설정된 논리 틀이다.

또 앎을 삶에 일치시켜야 한다는 지행일치(知行一致) 정신에 충실한 게 선비다.

인문학의 진정한 목표는 삶의 질을 끌어올려 인간적인 생(生)의 실현에 있었던 것이며,

그것은 문사철의 보합에서 가능하다고 봤다.

통치자가 부덕할 땐 벼슬을 거부

선비의 길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과거를 보는 것이다. 일종의 자격시험인 소과(小科)

시험을 보고 나서 최종적으로 대과인 문과(文科)에 합격하면 벼슬길에 나아가 9품관부터

시작하는 학자 관료가 된다.

둘째, 산림(山林)의 길이다. 조선 중기에 이르면, 과거를 보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는

대학자를 산림이라 부르며 우대했다. 이들은 세속적인 출세의 길인 과거를 단념하고

몇십 년씩 공부에 몰두, 그 학문적 능력으로 학계는 물론이려니와 정계까지 주도했다.

이때의 정파인 붕당은 학파를 모집단으로 하였기 때문에 정파와 학파가 서로 상호 작용하는 관계였다.

셋째, 부득이한 선택으로 은일(隱逸)이 있다. 세상을 경영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음에도

난세를 당하거나 아직 때가 아니라는 인식에 따라 초야에 은둔해 있던 선비를 말한다.

은사(隱士), 일사(逸士), 유일(遺逸)로도 불린다. 이들은 부덕하고 무도한 통치자가

권력을 휘두를 때 정치판에 나아가는 일을 거부했다.

국가적 위기를 당했을 때 선비는 '처변삼사(處變三事)'를 선택한다.

은둔, 망명, 자결이 그것인데, 어느 것도 맞는 선택이 아니라고 판단될 때는

 '거의소청(擧義掃淸)'을 택했다. 의를 일으켜 세워 적을 쓸어버리겠다는 이 마지막

결정은 국가가 존망의 갈림길에 서 있을 때 행하는 극단적 방법이다.

약육강식 논리를 극복하려는 인본주의

선비의 특징적인 면모는 일관주의(一貫主義)에서 잘 나타난다. 유학에서 강조되는

'일이관지(一以貫之)'의 이념은 일관된 가치 지향과 행동 규범으로 선비의 앎과 행동을

규정하였다. 자신과 타인에게 똑같은 기준을 적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때에 따라서는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박하되 남에게는 후하게 대하는 박기후인(薄己厚人)의 생활 태도를 보여 주었다.

청빈을 미덕으로 삼아 검약(儉約)을 실천하는 청빈검약(淸貧儉約)의 생활 철학도 중요하다.

조 선비에게 있어서 호화와 사치는 금기 사항이며, 공적(公敵)으로 치부되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 청빈은 남의 눈을 의식하거나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을 편안하게 여기며

그 속에서 도(道·진리)를 즐기는 경지에까지 이른 것이었다.

선비가 지향한 가치에서 무엇보다 주목되는 사항은 학문과 행동을 일치시키려는

학행일치(學行一致)의 방향성이다. 배운 것을 실천에 옮길 때에 비로소 그 배움이

의미를 갖게 된다고 인식하였던 것이다. 실천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것이 의리(義理)와

명분(名分)이었다. 그러나 인간이 사는 세상에서 이익을 도외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때문에 선비는 일에 임하여 명분과 실리를 합치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양자의 합치가 어려워 선택의 기로에 서는 결정적인 순간에는 명분을 택하는 것이

선비로서 살아남는 길이었다. 의리를 지키되 인정(人情)과 조화시키려 노력했다.

의리만을 따지면 세상살이가 삭막하고 메마르기 쉽다.

나아가 강한 자를 억누르고 약한 자를 부추겨주며(抑强扶弱), 공적인 일을 우선하고

사적인 일을 뒤로하기(先公後私)를 실천하여 모든 구성원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공생공존(共生共存)의 이상 사회, 즉 대동사회(大同社會·작은 차이는 있지만 크게

볼 때 함께 어우러져 사는 사회)라는 공동체 사회를 내세가 아닌 현세에 건설하려는

이상을 가진 이상주의자들이었다. 더불어 나의 생(生)을 실현하는 것이 중요하듯이

타인의 생을 실현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인식이 전제되어 약육강식이라는 동물 세계의

논리를 극복하려는 인간화 노력이었다.
 

 
이미지
글과 그림 기량을 겨루는 18세기 조선시대 선비들
습속을 그린 풍속화 사인휘호(士人揮毫). 담졸(澹拙)
강희언의 작품이다

 

학예일치 정신이 멋

선비의 멋은 학문과 예술을 일치시키려는 학예일치(學藝一致) 정신에서 빚어진다.

선비는 시(詩), 서(書), 화(畵)를 교양 필수로 하였기에 생활의 멋을 시나 그림,

글씨로 표현하며 운치 있는 삶을 꾸렸다.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고 생각하여

시를 음미하며 그림을 그리고, 그림을 보고 시를 쓰기도 하였다. 또한 그림에 화제(畵題)를 써서

하나의 그림 속에 시·서·화가 어우러져 격조 있는 멋을 일구어 내었다.

이들의 풍류 생활을 가능케 한 조건은 물질적, 정신적 여유와 생활 조건에 기초하였다.

선비의 삶의 공간도 그 조건 중 하나이다. 생활 공간인 안채, 교유 공간인 사랑채,

휴식 공간인 초당으로 구성된 선비의 주택 배치는 이들에게 손님을 맞아 교유할 수 있는 기능성을 제공하였다.

선비의 맑고 깨끗한 품격과 맞아떨어지는 백자는 자기의 발달 단계로 보아도 청자보다

안정되고 발전된 상태라 한다. 백자의 태토인 고령토의 순도가 가장 높고 굽는 온도도

높아 노력과 품이 훨씬 많이 드는 고급 자기라는 것이다. 결백하고 청초한 백자,

특히 청화백자는 선비의 이미지를 상징적으로 대변해 준다.

유배와 낙향도 불사

선비가 사대부 생활을 하다가 당하는 좌절은 유배와 낙향이다. 바른 소리를 하여 사약을

받는 일도 불사하는 존재가 바로 선비인지라 귀양살이 정도는 기개 있는 선비라면 한 번쯤

당하는 일이었다. 또한 사직소를 올리고 혼란스러워지는 관계를 미련 없이 떠나 낙향하는

것도 선비가 취하는 선택이자 권리였다.

특히 조선 후기 붕당정치가 본격화하여 당쟁이 격화되자 유배 문화라고 할 만한 현상까지

나타나고 귀양살이는 다반사가 되었다. 특히 북변에 유배되면 노령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기후변화 때문에 목숨을 잃는 일이 흔하였다. 때로는 격화된 정쟁에서 아까운 인재를

보호하기 위하여 잠정적으로 유배형에 처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현실에 한 발짝 더

가까워지는 유배 생활을 한 이야말로 진정한 선비의 자격을 획득할 수 있었다.

이들은 이 좌절의 시기를 재충전하는 기회로 활용했다. 다시 수기의 단계로 돌아가 학문

연마에 골몰하고 유배지의 인재를 모아 양성하여 지방 문화를 살찌우는 데 한몫을 톡톡히 했다.

▲ 정옥자 서울대 국사학과 명예교수
 

조선왕족 이경검, 장남 아닌 딸한테 저택 물려준 까닭은…

“어린 딸에게 한 失言이라도 지켜야”

김상운 기자입력 2014-07-31 03:00:00 수정 2014-07-31 08:35:01

장서각, 재산상속문서 ‘分財記’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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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6년 조선 왕족이었던 이경검이 아홉 살짜리 딸효숙에게 25칸짜리 저택을 물려주겠다고 한
 ‘이경검 부부 별급문기’ 원문. 그는 “어린 딸에게 집을 주겠다고 한 것이 실언이었지만 한 번 뱉은
말은 지켜야 한다”며 저택을 줬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제공

“비록 내 어린 딸에게 무심코 건넨 실언이지만 약속대로 집을 사주겠다.”

1596년 성종의 4대손으로 임진왜란 공신이었던 이경검은 분재기(分財記·재산 상속문서) 한 장을 썼다.  

당시 9세에 불과한 어린 딸 효숙에게 한양 명례방(明禮坊·지금의 서울 필동)에 있던 25칸짜리 저택을

물려주겠다는 내용이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은 한산 이씨 종가의 분재기인 ‘이경검 부부 별급문기(李景儉 夫婦 別給文記)’를

번역해 최근 공개했다. 분재기에 따르면 장자 상속의 원칙을 깨고 이경검이 어린 딸에게 비싼 저택을

물려주게 된 사연이 이채롭다.

이경검은 딸 효숙을 무척 아꼈다. 그는 임진왜란으로 부서진 집을 고치면서 딸을 업고 다니며 공사를

감독했다. 그는 어느 날 집에 들어서며 딸에게 “수리를 마치면 이 집을 주겠다”며 농담을 건넸다.

하지만 효숙은 이를 진심으로 믿었고 주변 사람들에게 자기 집이 생겼다고 자랑했다.

이를 물정 모르는 딸의 애교로 치부하고 무시할 수도 있었지만 이경검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주(周)나라 성왕 때 고사를 언급하며 “부모와 자식 간의 믿음보다 중한 게 어디 있겠는가.

아무리 말실수라도 딸이 약속으로 받아들였다면 지켜야 한다”고 선언했다. 주 성왕은 어린

시절 동생과 소꿉놀이를 하다가 농담으로 동생을 제후로 봉하겠다고 했고 이후 왕위에 오른 뒤

그 말을 지켜 드넓은 땅을 내주었다. 이경검도 바로 분재기를 작성했다.
 

혹시 자식 간 재산 분쟁이 불거질 것을 대비해 분재기 끝에 ‘자식들은 이 상속에 불평을 품지 말라’는  

단서조항을 두고 장남인 안국의 수결(사인)까지 받았다.

이로부터 9년 뒤 효숙은 영의정 이산해의 손자인 이구와 결혼하면서 이 집을 혼수로 가져갔다.

22세에 남편을 잃은 그는 1636년 충남 예산군에 마을을 개척하고 새로 집을 짓는 등 여장부로서

삶을 살았다. 효숙이 예산에 지은 집이 ‘수당고택(修堂古宅)’으로 그의 10대손이자 구한말 항일

운동가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수당 이남규(1855∼1907)가 이 집에서 태어났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횡설수설/고미석]아홉 살짜리 딸과의 약속

고미석 논설위원 ; 입력 2014-08-01 03:00:00 수정 2014-08-01 03:00:00

 

중국 춘추시대의 유학자인 증자(曾子)의 집에서 생긴 일이다. 어린 아들이 장에 가는  

엄마를 따라가겠다며 떼를 썼다. 엄마가 “얌전히 기다리면 다녀와서 돼지를 잡아 요리해 주겠다”는

말로 달래놓고 장에 갔다 오니 증자가 소중한 돼지를 잡고 있었다.

깜짝 놀란 아내는 “그냥 해본 말인데 진짜 잡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따졌다.

그러자 남편은 “자식에게 속임수를 가르쳐선 안 된다”며 손을 저었다.

▷고전에 나오는 ‘증자의 돼지’는 말의 책임, 약속의 중요함을 일깨우는 고사(古事)다.

증자보다 훨씬 통 큰 인물이 조선시대 중기에 살았다. 왕족이자 문신인 이경검은 자식에게 한

말을 지키기 위해 25칸 집 한 채를 아홉 살짜리 딸에게 물려주겠다는 내용을 담은 상속문서를 작성했다.

훗날 자식들 사이에 재산 다툼이 생길까봐 문서에 ‘다른 자식들은 불평하지 말라’는

조항과 맏아들의 서명까지 챙겨 두었다. 최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이 번역 공개한 ‘이경검

부부 별급문기’(1596년)에 담긴 내용이다. 
 

▷완고한 유교 사회에서 아들 제쳐놓고 어린 딸에게 집을 물려준 사연은 이렇다.  

이경검은 ‘딸 바보의 원조’였던 듯하다. 임진왜란 와중에 망가진 집을 수리하는 것을 감독하러

가면서 금지옥엽 외동딸을 업고 다녔다. 그때 무심코 “다 고치면 이 집을 주겠다”고 농담처럼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딸은 자신이 이 집의 주인이라고 사람들에게 자랑했다. 단순한 말실수라고 얼버무릴 수

있었겠지만 그는 아버지로서 선비로서 자기 말에 책임지는 길을 택했다.

▷훌륭한 모범을 보여준 조상과 달리 21세기 한국인들은 책임지지 못할 말이나 약속을 쉽게 남발한다.

우리 사회의 밑바닥에 불신과 냉소의 무거운 공기가 흐르는 이유다. 유병언 죽음과 관련해 국내 최고의

감식 기관이 과학적 조사를 거쳐 발표한 내용을 부정하면서 ‘가짜 시신’이라는 무책임한 의혹을 퍼트리는

사람들이 있다. 정치인들이 상식에 어긋난 말을 일삼는 걸 보면 볼테르의 말이 떠오른다. “상식은 그리 흔한 것이 아니다.”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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