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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민비(閔妃)와 민영환(閔泳煥)


민비(閔妃)와 민영환(閔泳煥)

 

마지막으로 우리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고

 

“오호라, 나라의 수치와 백성의 욕됨이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 경쟁 가운데에서 모두 진멸 당하려 하는도다.

대저 살기를 바라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기를 각오하는 자는 삶을 얻을 것이니,

여러분이 어찌 헤아리지 못하겠는가?

 

영환은 다만 한 번 죽음으로써 우러러 임금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우리 이천만 동포 형제에게 사죄하노라.

 

영환은 죽되 죽지 아니하고, 구천에서도 여러분을 기필코 돕기를 기약하니,

바라건대 우리 동포 형제들은 억 천만 배 더욱 기운 내어 힘씀으로써

뜻과 기개를 굳건히 하여 그 학문에 힘쓰고, 마음으로 단결하고 힘을 합쳐서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한다면,

죽은 자는 마땅히 저 어둡고 어둑한 죽음의 늪에서나마 기뻐 웃으리로다.

 

오호라, 조금도 실망하지 말라.”

 

 

민영환

 

주지하다시피 이상은 충정공 민영환이 을사늑약 직후 자결하면서 쓴 유서입니다.

사실은 민비에 대하여 쓰고 싶었는데 그녀가 생전에 남긴 말도 없고

그녀의 먼 촌 조카뻘인 민영환의 유서를 소개하며 그녀의 이야기도 쓰고자 합니다.

 

민영환은 민비의 먼 촌 오빠인 민겸호의 아들인데

겸호는 임오군란 때 병조판서로 반란을 일으킨 구식군대에게 맞아 죽었습니다.

영환은 다른 민씨들과 더불어 민비의 후광을 업고 고속승진의 길을 달렸습니다.

 

군부대신, 참정대신, 탁지부 대신 등 고위직을 두루 걸쳤고

러시아 황제 대관식 참관 대표로 러시아도 방문하고 영국도 여행하며

개화의 필요성을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동학란이 일어나면서 전봉준 등은

고영환 등과 함께 민영환을 탐관오리 3대 적으로 꼽았습니다.

실제로 탐관을 했는지 아니면 민씨들이 워낙 발호하는 중 승승장구했던 민영환이

탐관의 대표로 지목되었는지 어쨌던 이점에 있어서

역사는 그에게 조선의 패망에 일조한 4인의 한명으로 지목합니다.

그러나 나라를 잃고 자결한 저 젊은 세도가는 과거의 과오를 씻었습니다.

 

 

민비

 

민비를 ‘명성왕후’로 개명하고 연속극 뮤지컬 등에서 띄우면서

우리 역사상 ‘네 번 째가는 위인’으로 여론조사에 올랐다고 하니 이것은 역사의 코미디입니다.

 

물론 그녀가 어느 날 새벽에 자다가 일본 부랑배들이 휘두른 칼에 찔리어 사망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고

그런 흉악한 일을 저지른 일본 녀석들을 모조리 무죄 방면한 일본 재판관들은 살인범들의 공범들입니다.

편협하고 잔인한 섬나라 근성입니다.

 

아명이 자영인 그녀는 여흥 민씨 집에 태어나 9살 무렵 고아가 되어 조부모 슬하에서 외롭게 살던 중

대원군의 눈에 들어 고종의 비가 됩니다. 대원군은 고종의 외척이 힘이 좋고 세가 좋으면

자기가 누리던 권력을 빼앗길 것을 염려하여 고아나 다름없는 민씨를 간택했는데

민씨가 비가 되자 그녀의 먼 척 친척들이 속속 그녀의 덕을 보아 요직에 등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성이 민 씨면 무조건 한 자리 차지 한다는 소문이 날 정도였습니다.

 

대원군을 권좌에서 끌어 내리고 그녀가 사실상의 권력의 중추가 되어 나라의 살림을 하는 중

관직을 팔아먹고 민겸호 같은 탐관오리를 중용하여 임오군란을 야기하고

임오의 반란군이 궁중으로 들어와 그녀를 살해하려 했는데

궁녀의 옷을 입고 탈출하여 장호원 어느 농가에 피신하였습니다.

 

대원군이 재집권하면서 그녀를 찾았으나 찾지 못하고

그녀의 옷을 관에 넣고 국상을 치르는 코미디를 연출하였습니다.

 

그녀의 수하들이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여 대원군을 청으로 납치하여 10년간 ‘보호‘ 했고

그동안 민비는 정권을 다시 잡고 복수의 칼을 휘둘러

대원군의 서자 이재선등 많은 사람을 죽이거나 유배 보냈습니다.

 

그녀는 미신을 좋아하여 궁내에서 굿을 하고 어떤 무당에게는 벼슬까지 주었답니다.

쪼들리는 나라살림에 그녀의 심한 낭비벽이 더해져 국가 재정은 바닥이 났습니다.

그녀 혼자서 국고의 1/6을 탕진했다는데

프랑스 혁명 때 루이 16세 비 마리 앙뚜아네트가 3%,

청나라 서태후는 국가예산은 건드리지 않고 황실예산만 썼다고 합니다.

 

민비의 낭비벽이 어느 정도 인지 알 수 있겠습니다.

이런 민비를 백성들은 가장 저급한 욕설로 저주했다고 합니다.

민비가 일본 부랑배 들에게 살해되었을 때 슬퍼하는 백성이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민비는 고종과 더불어 매관매직으로 돈을 긁어모았습니다.

민비는 주로 수령직을 팔았답니다.

돈을 주고 산 수령들은 본전에 자기 몫까지 합쳐서 뽑기 위하여 백성들을 쥐어짰다고 합니다.

 

고종이 한성판윤(서울시장)을 백번이나 바꾸었다고 합니다.

평양감사를 돈을 주고 사서 부임하는데 뒤에서 누가 쫓아오며

'여보시오, 걸음을 돌리시오. 감사자리가 바뀌어 내가 되었소이다.‘

이런 코미디 같은 일들이 그 당시에는 비일 비재 하였다합니다.

 

민비는 질투가 워낙 심하여 고종과 자는 후궁이나 기생은 모조리 잡아 죽였다고 합니다.

지금의 진명, 숙명, 양정학교를 세운 엄 귀비가 고종과 동침한 사실을 안 민비가 엄귀비를 죽이려 하자

고종이 빌었답니다. 그래서 귀비는 폐서인되고 낳은 아들과 함께 성 밖으로 쫓겨났다고 합니다.

민비가 시해당한 후 엄귀비는 다시 궁궐에 들어가고 그 부끄러운 ‘아관파천’을 대담하게 주도 했습니다.

 

한 마디로 민비는 쓰러지는 왕조를 위하여 다시 한 번 살려 보려고 노력한 것이 아니라

자기와 자기 권속의 영달에만 신경 쓴 여인입니다.

우리나라 역대 위대한 인물 4위에 올리게 한 사람들의 죄가 큽니다.

민비가 4위면 이완용은 5위입니까?

 

이 나라 엉터리 역사교육과 TV연속극이 합작한 사기극에

젊은이들이 현혹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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