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령이 발표된 후 20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부락민들은 평민들이 종사하는 농, 수산업과 제조업 또는 서비스업 분야 참여가 사실상 차단되고 있다. 1920년부터 일반학교와 부락학교의 통폐합조치가 시행됐으나 부락학교근무를 발령받은 교사가 근무를 기피하는가 하면 부락민출신교사가 어렵사리 일반학교 부임발령을 받아도 학생들의 수업거부에 부딪치게 된다. 심지어 일반학교에 다니는 부락민출신 학생은 수석을 해도 일반인학생들의 사기가 떨어진다는 이유로 언제나 최하위로 밀려나기도 한다.
20세기 들어서서도 평민지역에 거주하는 부락민은 평민이 경영하는 상점이나 음식점출입이 차단되기가 일쑤였다. 이처럼 사회적인 차별의 벽을 넘을 수 없는 부락민들은 지금도 옛날부터 해온 그들의 생업분야인 동물도축이나 폐사동물처리, 피혁의 처리와 가공 판매, 형무소나 사형집행장의 잡역, 화장과 매장, 염습, 묘지기, 비속예능인, 매춘 등의 분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부락민의 장례식에는 승려조차 장례집전을 거부하며 일 때문에 타지에 갈 경우 부락민은 대부분 주택임차나 매입이 불가능에 가깝다. 또한 부락 밖 타지에서 상점이나 음식점 등을 경영할 경우 신분이 노출될 경우 그 동안의 고객들이 발길을 끊어버리는 일도 허다하다. 젊은 부락여성이 부락생활이 싫어 외지로 탈출해도 그를 기다리는 직업은 매춘이나 유흥업소뿐이다. 일본인들은 부락민을 은유적으로 다른 인종, 다른 민족, 다른 혈통, 또는 다른 가문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21세기인 지금도 취업과 결혼에서 부락민이 당하는 차별은 생존권리에 대한 경제적 정신적 학살에 가깝다. 부락민남자와 평민여자가 결혼할 경우 여자는 족보에서 제거될 운명을 각오해야 하며 부락민남자가 신분을 속이고 평민여자와 결혼했다 신분이 밝혀지면 대부분 강제이혼에 이를 뿐만 아니라 처벌까지 각오해야 한다. 실제로 1900년 후자의 경우가 재판에 걸려 강제 이혼당한 판결이 있었는데, 그 판결내용이 보통상식으론 어이없을 정도다.
“본래 ‘구 에타’는 옛날부터 가장 비천한 종족으로 일반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는 인간이었는데 명치유신 후 에타 라는 명칭이 폐지돼 일반인과 동등한 지위를 갖게 됐으나 오랜 인습에 비추어 구 에타 와의 결혼을 기피하는 것이 일반인에게는 당연한 일임이 명확한 사실이다.” 이 판결정신은 지금도 그다지 변함이 없다. 실제로 이 판결 후 30년이 지난 1933년에도 동일한 취지의 사건이 있었다. 부락민출신 남자가 신분을 숨긴 채 여객선에서 알게 된 일반인 여자와 결혼했다가 에타 출신임이 밝혀져 유괴 죄로 처벌받았다.
2000년에 실시한 후쿠오카시 조사에 의하면 부락민에 대해 대상자의 70퍼센트 차별의식을 갖고 있지 않다고 했으나 부락민과의 결혼에는 40퍼센트가 반대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생각과 표현을 달리하는 일본인의 이중성은 부락문제에 관한 한 이 설문결과 보다 훨씬 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많은 기업들은 흥신소가 발행한 부락지명총람사전을 인사과에 비치해두고 사원채용 때 활용하고 있다.
부락민출신이면서 각고의 노력으로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상당한 지위에 오른 인물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그 수는 개구리가 가득 찬 연못에서 두꺼비를 보는 것 보다 더 어렵다. 중앙관청에서 중간간부에 오르고 교사나 작가로 사회적 신분을 격상시킨 예도 더러 있다. 명치시대에 중의원을 지냈고 현재 중의원으로 활약 중인 부락민도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현 오사카 시장인 하시모토 도루(橋下 徹)이다.
위안부문제로 한국에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극우파 하시모토의 조상은 부락민이었다. 주간문춘(週刊文春)은 2011년 하시모토의 증조부는 관서지방의 한 산촌에 살다가 천민들의 거주지인 오사카부 야오시의 동화지구(同和地區)로 이주했으며 하시모토 시장도 이곳에서 자랐다는 사실을 인정했다고 밝혔다. 하시모토의 아버지는 오사카의 한 야쿠자조직에 속해 있다가 자살했는데 하시모토시장도 이 사실을 시인했다고 월간 신조(新潮)45 가 2011년 11월호에서 폭로했다.
시대가 바뀌어 20세기로 들어서면서 부락민들도 사람으로서 누려야 할 인권을 찾기 위한 행동에 나섰다. 1922년에 시작한 전국수평사운동(全國水平社運動)이 그 첫 포문이었다. 이 운동은 일본전역에 산재해 있는 부락민의 단결을 선언하고 부락민을 향한 동족 일본인의 모멸적인 언행을 규탄한 부락해방운동의 첫 봉화로 기록됐다. 수평사운동은 1946년 부락해방전국위원회로 발전 계승됐으며 1955년 부락해방동맹으로 개칭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07년엔 일본의 양식 있는 학자와 법조인, 퇴임관료 및 언론인 등 15명이 ‘부락해방운동을 위한 제언’을 발표했으며 구체적인 대책강구가 진행 중이다.
일본정부도 부락민차별문제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국가적 수치라고 판단하고 교육차별철폐와 언론을 통한 일반국민의 의식전환강조, 그리고 영화, 문학 등 각종 문화운동을 전개하고 있으나 효과는 여전히 미미한 수준에 머물고 있다. 1969년 10년 한시법으로 동화대책사업특별조치법이, 그리고 1982년엔 지역개선대책특별조치법이 5년 한시법으로 제정되기도 했다. 일본헌법 14조는 인종, 신조, 성별 또는 가문 또는 사회적 신분 등에 의한 차별은 인정되지 않는다고 명기하고 있으며 정부도 1965년 특수부락민의 차별철폐를 주장하는 동화대책심의회가 제출한 답변서에서 부락차별은 용납될 수 없는 사회문제라고 확인했다.
그러나 일본정부와 학계 등의 이 같은 부락차별철폐를 위한 노력과 조치에도 불구하고 결혼과 취업, 교육과 후생 및 거주이전 등 인간의 기본적 생존여건확보에 대한 사회적 차별의식의 벽은 여전히 넘기 어려울 정도로 높은 게 현실이다. 일본에서는 언론이 부락문제 보도를 금기사항 1순위에 올려놓고 있고 사랑과 용서와 봉사를 설파하는 종교마저 부락민차별폐지문제에 입을 꽉 다물고 있는데 차별철폐를 위한 침묵인지 아니면 문제제기가 일본의 치부를 스스로 폭로하는 결과가 될까 두려워서인지 확실치 않다. 국가도 국민호적공개행위를 비롯하여 인권을 침해할 소지가 많은 민족차별, 국적차별, 여성차별 및 장애인차별규정을 철폐하여 인권을 옹호해야 함에도 이를 실현할 구체적인 법적 근거를 마련하지 않고 있다.
부락민들은 인간이 누려야 할 천부의 존엄성을 유린하고 생존권을 박탈하는 부락민차별행위나 조치가 부당하다는 사실을 각급학교에서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정부의 반응은 여전히 소극적이다. 유네스코가 주도한 불화와 대립해소를 위한 ‘사회제과학의 학제적 협력’이 발표한 ‘사회적 긴장의 연구’는 “전후 일본이 취한 부락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혁신적, 선진적이지 못하며 이는 이 문제에 관한 일본사회 전체의 상황을 반영하는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지금도 일본에는 신분차별을 의미하는 ‘에타’가 기재된 옛날 지도가 복간되고 있으며 도서관의 도서 분류에도 ‘특수부락’이란 항목이 남아있다.
에타는 햇빛을 받지 못한 채 어두운 지하에서만 살아야 하는 두더지와 다름 없었으며 빈궁과 굴욕과 모멸을 온 몸으로 느끼며 음산한 사회 밑바닥에 내팽개쳐진 저주받은 삶이었다고 부락민들은 절규하고 있다. 출판의 자유가 완벽하다고 자랑하는 일본에서1990년 초까지만 해도 부락민의 역사와 해방운동을 다룬 서적이 금서로 취급 받아 판매금지 당하기까지 했다. 노예제도도 서아프리카의 모리셔스가 1981년 불법화함으로써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일본의 부락민은 어떤 의미에선 노예보다 더 인간 이하의 차별과 멸시를 받고 있다. 세계를 향해 인종차별과 인권침해의 부당성을 강조하는 일본이 정작 나라 안에서 그 것도 동족에 대해 사람 아닌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내버려둘 수 있느냐는 부락민들의 울부짖음은 지금도 메아리만 돌아올 뿐이다.
해방령 발표 당시 30여 만 명이었던 부락민이 지금은 공식집계로 130여 만 명에 이르고 있다. 이는 일본 전체인구의 1퍼센트에 해당한다. 그러나 부락해방동맹은 부락을 떠나 신분을 숨기고 타지에 살고 있는 부락민을 모두 포함시키면 그 수는 300만 명 선에 이른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재 부락민만 살고 있는 부락만도 4,600개를 넘어서고 있다.
참고문헌 賤民とわ何か(喜田貞吉) 部落の歷史(現近代20講. 朝治武, 黑川みどり, 吉村智博, 渡邊俊雄) 被差別部落一千年史(高橋貞樹) 近代部落史(黑川みどり) 對論 部落問題(組坂繁之, 高山文彦) 2014-05-28 梨谷 權 泰 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