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냉키의 '양적 완화' 뒤에 숨은 '미국의 미소'
한겨레 입력 2014.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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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버냉키(61) 전 미국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 의장. 2008년 말~2009년 초 금융 붕괴 때 연준 의장으로 전면에 나서 돈을 무제한으로 푸는 '양적완화'(Quantitative Easing) 에 착수하는 등 재임 8년간 세계경제를 재 디자인한 인물이다. 올 2월 은퇴한 그는 일단 브루킹스 연구소의 경제 펠로라는 자리에 머물고 있다. 현직에서 떠났지만 금융위기의 거대한 파고를 헤치고 미국, 나아가 세계 경제를 이끌어온 선장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높다.



최근 <뉴욕타임스>는 버냉키 초청 강연 비용이 미국 내 평균 20만달러, 국외 40만달러라고 보도했다. 연준 의장 때 1년 보수 20만달러와 비교하면 엄청난 액수다. 연간 20회 강연회를 한다면 500만달러(51억원) 안팎을 챙길 수 있다. 미국과 한국의 경제규모가 다르지만 최근 국무총리 후보로 올랐다가 낙마한 전직 대법관의 일수 1000만원 가량의 전관예우(?)에 못지 않다.
무엇이 버냉키의 가치를 결정하는가? 미국의 온라인 매체인 <아메리칸 씽커>에 글을 올린 제임스 V. 들롱은 '벤 버냉키의 연설 : 최소한 한 사업은 번창중'이라는 기사에서 몇가지 근거를 내놨다.
우선 그가 쉽게 들을 수 없는 정보를 얘기할 지 모른다는 기대감이다. 대공황 연구의 대가 버냉키는 연준 의장으로 21세기 초유의 금융위기를 직접 헤쳐나갔다. 아직 책이나 논문으로 그의 생각이 구체화하지 않은 만큼, 강연회를 통해 새로운 통찰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가 강연료를 높이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의 입에서 나온 굵직한 새 정보는 아직 없다.
백만장자 클럽의 사교 무대에서 버냉키의 '디너 파티' 강연회는 격식을 높여준다. 강연회는 주로 뱅커, 헤지펀드 자본가, 업계 총수들이 참석하는데, 이들이 1만달러씩만 내면 초청이 어렵지 않다. 새로운 내용이 아니더라도 금융계 거물들은 네트워크를 확장할 기회를 갖는다.
전관예우라는 시각도 그럴듯하다. 탐욕스런 월가는 '월가의 이익이 미국의 이익이라거나 월가가 무너지면 세계가 무너진다'라는 이데올로기를 지속적으로 생산해낸다. 투기적 파생상품을 고안한 월가의 큰 손들은 2008년의 금융위기를 일으켰음에도 정부의 긴급 구제금융과 유동성 공급으로 살아났다. 대마불사인 것이다. 통화정책의 수장이었던 연준 의장한테 적대감을 느낄 이유는 없다.
버냉키 전 의장의 약발도 남아 있다. 퇴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쟤닛 옐런 현 연준의장 뿐 아니라 통화정책을 결정하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위원들과도 막역한 사이다. 금융계 입장에서는 거물과의 교류가 손해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골드만삭스는 차기 대선후보로 거론되는 힐러리 클린턴 초청에 40만달러를 쓰면서도 버냉키 초청은 포기했다. 공직자가 업무상의 비밀을 퇴임 후 공개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버냉키 의장은 철저하게 자신의 발언에 선을 긋고 있다.
그러나 버냉키 의장이 시장에서 쉽게 사라질 것 같지 않다. 재임중 펼친 양적완화(대규모자산매입) 정책에 이어 올초부터 자산매입을 점차 축소시키는 테이퍼링이 시작됐다. 테이퍼링이 올해말 끝나더라도 시장은 양적완화의 유산을 오랜 기간 얘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버냉키 의장과 동료들은 양적완화를 통해 위기의 자본주의를 구했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버냉키 의장은 2012년 3월 조지워싱턴대에서 4차례 강연을 한다. 강연 내용은 <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와 금융위기를 말하다>(김홍범·나원준 옮김, 미지북스)란 이름으로 올해 초 번역돼 나왔다. 역자인 나원준 경북대학교 교수(경제통상학부)는 "버냉키 의장이 친절하게 설명해 대중서로도 쉽게 읽을 수 있지만, 정책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도 충실해 학술서로서도 가치가 있다고 판단해 번역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 가운데 양적완화의 작동 원리를 설명한 4장 '위기의 여파'는 가장 눈길을 끈다. 버냉키 의장은 경제사가답게 금융위기의 역사와 연준의 역할을 소개하다가, 양적완화 대목에 이르러서는 '경제학이 부릴 수 있는 마술' 같은 현상에 스스로 고양된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비전통적인 통화정책인 양적완화의 정식명칭은 대규모 자산매입(LSAP· Large-Scale Asset Purchases)인데 2007년 5.25%까지 올라갔던 연방기준금리는 2008년초 2% 대에서 그해말 0~0.25%로 떨어집니다. 이 때부터는 경기침체 상황을 막기 위해 더 이상 금리를 완화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비전통적(Unconventional) 방식으로 경기 부양을 위한 통화 정책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연준이 시중은행으로부터 국채나 정부가 보증한 패니와 프레디 증권을 사들이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국채를 사들여 시중에 자금이 풀리는데 2009년부터 2012년까지 총 규모는 2조달러를 넘어섰습니다." 2014년 6월 현재까지 3조달러가 넘게 풀렸다.
이 돈을 미국 재무부 조폐창의 윤전기로 찍어냈을까? 버냉키 의장은 여기서 양적완화의 마술이 나온다고 주장한다. "증권을 매각한 은행은 연준에 예치하는 지급준비금(reserve balances) 계좌를 갖고 있습니다. 연준이 증권 매입 대금을 지급하는 방식은 기본적으로, 은행들이 연준에 개설하고 있는 계좌에 지급준비금 액수를 늘려주는 것입니다. 연준이 취득하는 증권의 대금 지급을 위해 돈을 찍어내고 있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증권을 취득하기 위해 연준이 돈을 찍어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연준 대차대조표-자산(그림 1)을 보면 2008년말부터 대규모자산매입(LSAP) 규모가 2조달러 이상 늘어났다. 연준 금고로 그만큼의 채권이 쌓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연준 대차대조표-부채 및 자본(그림 2)을 보면 가장 아래 연방준비제도권(민간보유현금)의 증가추이는 가파르지 않다. 본원통화를 늘렸지만 통화량이 크게 늘어나지는 않았다.
버냉키 의장은 "양적완화 이후에도 민간이 보유하는 현금통화는 약간 늘었지만 거의 변화가 없습니다. 결국 돈을 찍어내지는 않으면서 대신 전자적으로 시중은행의 지급준비금에 기입한 것입니다. 지급 준비금은 실제로 유통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급준비금은 어떤 광의의 통화량 지표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지급준비금은 본원통화의 일부분이지만 현금은 아닙니다"고 했다.
양적완화는 일본중앙은행이 2001년 경기 부양을 위한 '양적금융완화'에서 처음 등장하지만, 규모나 파장 면에서 2008년 연준의 양적완화는 세계사적이다. 제로 금리 상황에서 정책 수단이 한계에 이르자, 바닥 밑의 지하실을 파내려가듯 새로운 동굴을 뚫은 것이다. 버냉키 의장은 "대규모 자산 매입으로 시중 국채의 가격이 올라가면서, 역으로 수익률은 떨어뜨리는 방식으로 전체적으로 국채, 주택 모기지를 비롯해 회사채 등의 금리도 낮출 수 있었다"고 밝혔다.
연준 홈페이지도 "지급준비금의 증대는 현재와 미래의 단기금리를 내리게 된다. 이런 조처가 은행의 대출이나 통화공급을 늘려 경기를 부양한다. 만약 이런 조처가 장기간 유지된다면 상대적으로 높은 지급준비금 수준과 저금리로 인해 인플레이션 압력이 높아지게 된다. 하지만 이미 단기금리가 현재 거의 제로인 마당에 시중금리가 더 낮아질 여력도 없다. 결과적으로 현재의 지급준비금 증대가 인플레이션 압력을 높이는 쪽으로 작용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버냉키 의장이나 연준의 발표가 꼭 맞는 것은 아니다. 미국에 가면 동포들이 "미국은 크게 해먹는다"라며, 상대적으로 "작은 득실에 연연하는" 정서를 비판하는 얘기를 하는 경우가 있다. 미국식의 '허허실실'을 얘기하는 것인데, 양적완화의 내막을 들여다보면 세계를 경영하는 금융 대제국(?)의 스케일이 실감난다.
2013년 11월 매킨지글로벌연구소는 '양적완화의 초저금리:분포상의 효과와 위험'이라는 보고서를 낸다. 경제가 살아나려면 투자와 소비의 두 축이 활발하게 작동해야 하는데, 양적완화의 경기 부양 효과가 실제보다 크지 않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풀린 돈이 정작 돈이 필요한 중소기업으로 많이 흘러가지 않았고, 지급준비금의 초과보유로 대출을 활성해야할 은행조차 지급준비금 계정에 주어지는 연준의 이자(0.25%) 수입이 안정적인 만큼 적극적인 대출이나 신용창출로 통화승수를 높이지 못하고 돈더미에 주저 앉았다." 금리를 제로 수준으로 끌어내렸지만 더욱 까다로워진 대출 심사로 기대했던 투자활성화로 이어지지 못했다. 이자율이 하락하면 주로 대출을 받은 젊은 층 채무자들은 이득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저축이나 연금에 주로 의존하는 55살 이상의 노령층에서는 이자소득 감소가 나타났다. 두 부분을 상쇄하면 손실이 더 크다. 돈이 돌아야 소비가 확장되지만 미국 소비자들은 예금을 택했다. 보고서는 양적완화가 주식시장에 미치는 영향도 전문가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크지 않다고 분석했다.
더 극적인 것은 양적완화의 최대 수혜자가 미국 정부라는 설명이다. 초저금리로 국채 원리금 상환 부담이 줄어든 미국정부는 2007~2012년 기간에 9000억달러의 소득 효과를 본다. 2009~2012년 연준이 불어난 자산에서 나온 이자 수익을 재무부에 보낸 것만도 1450억달러로 추정됐다. 양적완화로 경기를 살리기보다는, 구제금융과 정부지출 등으로 출혈이 심했던 국가재정에 1조달러 이상을 기여한 것이다. 규모는 작지만 영국이나 유로, 일본도 양적완화로 인한 정부의 재정상황 개선이 나타난다. 미국의 비금융권 기업도 2007~2012년 초저금리로 인한 원리금 상환 부담 축소로 3100억달러의 절감 혜택을 보고, 1% 이상 예대마진의 확대로 미국의 은행도 1500억달러의 혜택을 본 것으로 분석됐다.
그럼 누가 손해를 본 것일까. 매킨지글로벌연구소 보고서는 보험사·연금보험, 가계, 외국 투자자들이 집중적인 손실을 입었다고 보았다. 40~50년 뒤에 확정 보험금과 이자를 지급해야 하는 보험사는 현재 들어오는 재원에서 얻는 이자로는 약정된 미래 지출을 감당할 수가 없다. 당장 새로운 고객을 확보하면 낮은 이율을 적용할 수 있지만 영업망을 확충하기도 쉽지 않다. 자금의 상당부분을 국채 등으로 보유하고 있지만 이자율이 지속적으로 떨어지고 있다. 미국의 가계도 2007~2012년 동안 3600억달러 손실을 입었다. 미국의 초저금리는 세계에도 파장을 미친다. 매킨지 보고서는 미국을 제외한 세계가 연준의 초저금리로 인한 2007~2012 누적 이자 손실을 4800억달러로 추산했다. 미국발 양적완화가 차악의 경제후퇴를 막았지만, 부정적 효과 또한 지구적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버냉키 의장 뿐 아니라 최근 자서전을 낸 티머시 가이트너 전 미국 재무장관도 2007년말~2009년초 금융위기 상황을 딛고 자본주의 엔진을 다시 돌게 만든 것은 자신을 비롯한 미국정부와 연준이었다고 '자화자찬'을 했다. 그러자 딘 베이커 미국 경제정책연구센터 공동소장이 "제 2 대공황 위기의 파국을 막았다"는 식의 평가는 지나치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라구람 라잔 인도 중앙은행 총재가 "연준이 통화정책을 펼때 신흥국들과도 정보를 공유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도 양적완화가 이머징 마켓에 끼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2013년 5월께 연준의 테이퍼링 검토 발표가 나왔을 때, 양적완화 뒤 폭발적으로 늘어났던 채권 투자 외국자본이 한꺼번에 신흥국에서 빠져나가 주가가 폭락하는 사례가 발생했다. 올해 말 테이퍼링이 마감되고, 연준이 점차 기준금리를 올리게 될 경우 후폭풍도 만만치 않다. 라잔 인도중앙은행 총재가 "자본의 대규모 신흥국 유입과 탈출 등으로 금융혼란이 올 수 있다"며 걱정하는 이유다. 매킨지글로벌연구소도 테이퍼링 마감 뒤 이어질 금리 인상의 시기에는 시장 변동성이 몹시 클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미국의 경제 대통령으로 세계를 움직였던 버냉키 의장은 자본주의의 위기의 최전선에서 해결사 구실을 했다. 하지만 연준 의장은 미국의 경제 대통령일 뿐이며, 미국의 민중보다는 금융자본이나 기업과 가까워 보인다.
김창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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