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 1번지' '가족오락관'… 개그작가 1호 전영호씨, 노숙인 자활 도우며 인생 2막 열다]
심장판막증으로 쓰러지고, 인터넷 교육사업 뛰어들었다 삶도 몸도 벼랑 끝까지 가봤죠
'개그'란 허를 찌르는 것… 상대 괴롭혀서 웃기는 게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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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전 개그작가로 한창 활동하던 시절의 전영호씨 모습. /유창우 기자
'유쾌한 청백전', '자니윤쇼', '웃으면 복이 와요', '유머 1번지', '토요일이다 전원 출발', '가족오락관'…. 1980~90년대를 주름잡은 코미디와 예능 프로그램에는 개그작가 전영호가 있었다. 그가 만든 '개그'에 전 국민이 웃었고, 방송국은 이 '웃음 보증수표'를 모셔가기 위해 혈안이 됐었다.
지난 4일 오후 개그 작가
전영호(60)씨를 만난 곳은 방송국이 아닌 서울역 인근의 노숙자 쉼터 '소중한 사람들' 교회 식당이었다. 식판을 들고 길게 줄 선 노숙인들에게 밥을 퍼주는 전영호씨의 안경에 김이 서렸다. 비닐 앞치마를 두르고 비 오듯 땀을 흘리면서도 만면에 웃음이 가득했다. "남들 웃기는 게 직업이던 시절, 정작 저 자신은 웃지 못했어요. 남들이 왜 웃는지, 어디서 웃는지 연구해야 하니까요."
개그 작가 전영호의 전성기는 한국 코미디의 전성기였다. 개그 작가라는 직명도 그가 만든 것이다. "개그(Gag)는 입에 재갈을 물린다는 뜻이죠. 상대의 의표를 찔러 할 말을 잃고 웃게 하자는 것. 1973년 전유성씨와 이 '개그'를 해보자고 의기투합했어요. 각각 개그맨, 개그 작가 1호인 셈이죠."
갓 서른 나이인 1981년, 그는 '토요일이다 전원 출발'의 메인 작가를 맡았다. 이주일을 코미디 황제로 등극시킨 프로그램이다. 그가 대본을 집필하는 프로그램이 동시에 7~8개에 이르기도 했다. 1995년에는 '깊은 밤 전영호쇼'로 직접 개그맨에 '데뷔'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주는 대가로 웃음을 잃었다. "최고의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이 웃음을 거둬버렸죠." 남들이 폭소를 터트리는 순간이 그에겐 가장 신경이 곤두선 순간이다. 기발한 아이디어가 나올 때까진 잠도 이루지 못했다.
이미 심장판막증을 앓고 있던 그에게 설상가상 신경성 당뇨가 찾아왔다. 식전 혈당 수치가 600㎎/㎗(정상 수치 100㎎/㎗ 이하)을 넘어섰다. 망막과 신장에도 이상이 생겼다. 2000년엔 인터넷 교육 사업을 벌였다가 실패했다. 그는 "1등을 향해서만 달리던 삶을 그제야 돌아보게 됐다"고 했다.
노숙인들을 만나게 된 것은 2000년대 중반이다. 자신처럼 힘들고 웃음을 잃은 이들이었다. 그는 노숙인들에게 자신을 보고 용기를 얻게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노숙인들을 만나면서 생리적 웃음만을 추구하던 개그 작가가 내면의 웃음에 눈을 뜨게 된 겁니다. 경쟁을 버리고 마음을 바꾸니 건강도 빠르게 회복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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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호씨가 노숙인들의 식사를 챙기며 활짝 웃고 있다. 그는“1등에 집착하던 스타 개그 작가 시절에는 이 소중한 웃음의 가치를 알지 못했다”고 했다. /이명원 기자
전영호씨는 주 3∼4회 노숙인을 위한 배식 봉사와 상담을 하고 있다. 그는 "노숙인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스스로 자기 문제가 풀리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얼마 전엔 노숙인들을 도우며 바뀐 자신의 삶을 다룬 에세이 '당신도 물 위를 걸을 수 있다'를 펴내기도 했다. 판매 수익금 전액은 서울역 노숙자 아침 무료 급식 등에 쓰일 예정이다.
그는 개그계의 원로로서 후배들을 위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전영호에 따르면 80~90년대 개그에는 기승전결이 있었다. 충분한 이야기 구조 안에서 웃음을 찾아냈다. "채널 돌리고 싶어도 리모컨이 없어 귀찮아 그냥 보던 시대"였다. 지금은 즉각적으로 웃음을 주지 않으면 바로 채널이 돌아간다. "스타 개그맨의 수명이 그만큼 짧아졌고, 상대를 괴롭히고 따돌려서 웃기는 코너가 많아진 점이 아쉽다"고 했다.
"요즘 '개그 콘서트'의 '나쁜 사람'을 재미있게 보고 있어요. 경찰이 범인을 심문하다 그 딱한 사정에 공감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폭소가 터집니다. 남을 해치지 않고도 얼마든지 웃음을 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코너죠. 이젠 저도 개그 프로 보면서 마음 편히 웃습니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