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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도세자(思悼 世子)의 죽음

사도세자(思悼 世子)의 죽음

 

1762 7 12, 복중 더위에 뒤주에서 돌아가시다

            

[역사의 향기]

'호랑이가 깊은 산에서 울부짖으니 큰 바람이 분다.'

이 시구를 지은 이는 바로 비운의 왕세자 사도세자(1735~1762).


호방한 기운을 가지고 있던 그는 효종을 계승한 북벌(北伐)이 꿈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경전 공부보다는 전쟁놀이를 하거나 진법서와 병법서 읽기를 즐겼다병자호란의 치욕을 극복하기 위해 조선 국방력을 강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영조는 어린 시절부터 사도세자의 무인적 기질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세자에 대해  "태산(泰山)을 끼고 북해(北海)를 뛰어넘는 기질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영조는 천재성을 지니고 있는 아들을 사랑했고, 아들의 강인한 성격을 조금만 부드럽게만 하면 자신을 능가하는 군주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영조는 어느 순간부터 세자를 미워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바로 세자가 소론(少論) 주장에 동조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숙종의 둘째 아들이었던 영조는 노론(老論) 관료들 지지에 의해 국왕이 된 인물이다.

그가 비록 탕평을 부르짖었지만 실제 권력은 노론에게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사도세자는 소론 정책을 지지했고, 영조가 일본과 교류를 강조한 것과 달리 북벌을 주장했던 것이다.   
     

영조는 자신과 다른 정치적 성향을 가진 아들에게 서서히 회의감을 갖게 됐고 나중엔 대놓고 세자를 미워했다. 노론 역시 세자가 장차 국왕이 되면 자신들 권력기반이 사라질까   두려워 영조와 세자를 이간질하기 시작한다.


아버지의 미움에 대한 충격으로 급기야 사도세자는 정신질환까지 앓게 되고, 이런 아들 모습을 지켜본 영조는 천륜의 정을 끊기 위해 창경궁 휘령전 앞마당에서 세자를 뒤주에 가두었다.

결국 사도세자는 뒤주에 들어간 지 8일 만인 1762년 윤 5 21일 숨을 거두었다. 양력으로 환산하면 7 12일이다한여름 뙤약볕 아래 그는 8일 동안 뒤주에서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고  '질식사' 하고 만다.

더구나 영조에게 세자에 대한 처분은 죽음밖에 달리 방도가 없다고 건의한 이가 세자 생모인 영빈 이씨이고, 뒤주를 직접 가져온 이가 장인 홍봉한이요, 죽음을 명령한 이가 친아버지이니 세자의 죽음은 비극 그 자체였던 것이다.


아버지가 자식을 믿지 못하고 권력을 위해 아들을 죽이는 세상! 

그만큼 권력은 무서운 것이다. 이 뜨거운 여름날 뒤주 속에서 생을 마감한 사도세자를 생각하며 우리가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깊이 고민해 봤으면 한다.      

 


김준혁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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