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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장진호 전투(長津湖 戰鬪, Battle of Chosin Reservoir)


 장진호 전투(長津湖 戰鬪, Battle of Chosin Reservoir)

 

장진호 전투(長津湖戰鬪)는 한국전쟁 중인 1950년 겨울, 미국 1 해병사단이 함경남도 개마고원의 장진호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임시수도인 강계를 점령하려다 오히려 장진호 근처의 산 속 곳곳에 숨어있는 중국군 제9병단(7개 사단 병력, 12만 명 규모)에 포위되어 전멸 위기를 겪었다가, 간신히 성공한 후퇴 작전이다. 1950년 11월 26일부터 12월 13일까지 진행되었다.

본 전투의 이름의 장진(長津)은 영어로는 일본어 독음을 따서 Chosin(ちょうしん)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당시 한국어 지도가 없고 일본어 지도뿐이었기 때문이다.[1] 1950년도 사건 당시, 미국의 뉴스위크지는 "진주만 피습 이후 미군 역사상 최악의 패전"이라고 혹평하였다.

미군의 전사에 "역사상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록되어 있으며, 1 해병사단 외에 미국 육군 7사단 병력 일부도 함께 하였다. 이 후퇴작전을 통해서, 미 해병1사단은 자신의 10배에 달하는 12만의 중국군 남하를 지연시켰으며, 중국군 12만 명의 포위를 뚫고 흥남에 도착, 흥남 철수를 통해 남쪽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흥남 철수는 193척의 군함으로 군인 10만 명, 민간인 10만 명을 남쪽으로 탈출시킨 사건을 말한다.[2] 흥남 철수의 작전시작한 날은 바로 대한민국이 평양에서 철수한 날이었다. 또한 흥남 철수 작전이 바로 1.4 후퇴의 시작이었다.

미 해병1사단의 이 퇴각작전으로 중국군을 저지함으로써 한국군과 유엔군, 피란민 등 20만명이 남쪽으로 철수할 수 있었으며, 서부전선의 미 8군이 중국군을 방어할 수 있었다. 장진호 전투로 인해 중국군의 함흥 지역 진출은 2주간 지연됐고 중국군 7개 사단은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날짜 1950년 11월 26일 ~ 12월 13일
장소 함경남도 장진호
결과 중공군의 승리
미국군의 전술적 승리
교전국
이미지 국제 연합
이미지 미국
이미지 대한민국
이미지 영국
이미지 중국
지휘관
올리버 스미스 송쉬룬
병력
미국 1 해병사단
미국 7 보병사단 예하 31 연대전투단(31RCT)
중국 9 병단
피해 규모
전사 - 2,500여 명

실종 - 219명
부상 - 5,000명
동상자 다수

전사 - 25,000여 명

부상 - 12,500여 명
동상자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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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역사상 가장 고전했던 싸움'…

한국인도 외면하는 '장진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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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점들이 전부 중공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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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의 9병단장 쑹스룬(宋時輪, 1907-1991), 한국전 당시

 

 

당시 미군은 병력이 10배가 넘는 중공군과 엄청난 혹한을 상대로 싸우면서 퇴각작전을 수행했습니다.


장진호 전투란 1950년 6·25 때 미군 제1해병사단이 함경남도 장진호 부근에서 중공군 7개사단의 포위망을 뚫고 함흥으로의 철수에 성공한 작전으로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 사이에 있었습니다. 미군 제1해병사단은 유엔군의 북진때 원산항으로 상륙하여 서부전선에서 북상중인 미 제8군과 접촉을 유지하려고 장진호 계곡을 따라 강계방면으로 전진하던 중 장진군 서한면 유담리·신흥리 일대에서 중공군 7개사단으로부터 포위, 공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지역은 높이 2,000m 이상의 높은 산들이 남북으로 뻗어 낭림산맥을 이루고 있고, 흥남으로 이어지는 계곡은 깊은 협곡을 이루고 있어 철수작전을 어렵게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 해병은 추위를 무릅쓰고 40㎞의 협곡지대를 돌파하여 철수에 성공하였습니다. 이 철수작전의 성공은 결과적으로 청천강일대에서 수세에 빠져 있는 미 제8군의 철수를 가능하게 하였으며, 또한 중공군의 함흥지역 진출을 2주간 지연시켜 국군과 미군의 흥남철수를 성공시킬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철수작전에서 미군은 6,532명의 병력 손실을 입었습니다.



1950년도 사건 당시, 미국의 뉴스위크지는 "진주만 피습 이후 미군 역사상 최악의 패전"이라고 혹평하였습니다. 미군의 전사에 "역사상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록되어 있으며, 1 해병사단 외에 미국 육군 7사단 병력 일부도 함께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후퇴작전을 통해서, 해병1사단은 자신의 10배에 달하는 12만의 중국군 남하를 지연시켰으며, 중국군 12만 명의 포위를 뚫고 흥남에 도착, 흥남 철수를 통해 남쪽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흥남 철수는 193척의 군함으로 군인 10만 명, 민간인 10만 명을 남쪽으로 탈출시킨 사건을 말합니한다. 이 후퇴작전이 1.4 후퇴의 시작이었습니다. 미 해병1사단의 이 퇴각작전으로 중국군을 저지함으로써 국군과 유엔군, 피란민 등 20만명이 남쪽으로 철수할 수 있었으며, 서부전선의 미 8군이 중공군을 방어할 수 있었습니다. 장진호 전투로 인해 중국군의 함흥 지역 진출은 2주간 지연됐고
중국군 7개 사단은 궤멸적 타격을 입었습니다. 양쪽 군대 모두 절반이상 심한 동상에 걸렸습니다. 당시 개마고원 장진호 일대는 고도 1000미터의 산악지형으로서, 낮기온 영하 20도, 밤기온 영하 45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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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의 포위를 뚫고 흥남으로 철수하던 미 해병대원들이
1950년 12월 눈밭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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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한과의 싸움


1950년 11월 함경남도 장진호(湖)까지 진격했던 미 7사단 3개 대대가 중국군의 매복에 걸려 궤멸당했다. 중국군이 개입하리라는 첩보를 무시한 채 무모하게 내린 북진 명령 탓이었다. 알몬드 10군단장은 "중국의 세탁·청소부 몇몇 때문에 멈춰선 안 된다"고 했다. 그러나 해병 1사단은 되도록 천천히 진격했다. "항상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라"는 소신을 갖고 있던 스미스 사단장은 곳곳에 병력과 보급품을 남겨두고 야전 활주로도 닦아 뒀다.



하갈우리 간이활주로

美 해병 제1사단은 장진호 지역에 진입과 동시에 전투의 계속을 위해 보급물자의 수송을 위한 수송기 이착륙장의 절대 필요에 의거, 장진호 남쪽에 위치한 하갈우리에 활주로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12월 6일, U.N.군사령부의 철수명령에 의거 철수하게 되어 공사진척이 40%정도인 하갈우리 활주로를 이용하여  C-47수송기편에 부상자 4,300여 명을 후송하였다.

 이때 장진호 남쪽끝 일대 지역에는 약 10.000여 명의 병력과 U.N.군에 협력한 1.500여 명의 피난민, 그리고 1.000여 대의 차량들이 집결하고 있어서 매우 혼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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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갈우리의 간이 활주로(공사진척 40%) 물자 수송 및 부상자 후송에 사용됨  - 1950.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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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갈우리 간이활주로에 동체착륙한 미 해병대 수송기(C-47) 승무원은 무사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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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갈우리 간이활주로 지역에서 지원포 사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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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체착륙 후 연소하는 미 해병대 수송기  - 하갈우리 간이활주로 -


▶중국군 제9병단장 송시륜은 15만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넌 뒤 낮에는 산에 숨고 밤에만 이동해 장진호 주변에 매복했다. 중국 황포군관학교를 나온 농민유격대장 출신 송시륜은 주력 부대를 산을 따라 배치해 도로로 진군하는 미 해병 1사단과 7사단, 영국 해병 등 3만여명을 커다란 자루에 넣듯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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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 주변의 미군 배치와 철수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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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pression‍‍!!!s reflecting the showy cold of North Korea, frostbite casualties of First Marine Division and Seventh Infantry Division who linked to break out of Communist encirclement in the Changjin area, North Korea on Dec. 22, 1950, wait for evacuation by plane. (AP Photo/D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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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dies of U.S. Marines, British Royal Marines Soldiers and Republic of Korea troops are gathered for a mass burial at Koto-ri on December 8th, 1950. (U.S. Department of Defense/SGT. F.C. Ker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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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nese communist troops, wearing tennis sneakers, rags and American footgear, surrender to Charley Company, 7th Marines, south of Koto-ri, on December 9th, 1950. (U.S. Department of Defense/SGT. F.C. Kerr)

  

▶총알과 포탄이 빗발치는 포위망은 계곡을 따라 23㎞에 이르렀다. 영하 45도까지 내려가는 강추위에 병사 절반이 동상에 걸렸다. 스미스 사단장은 "어떤 희생이 있더라도 반드시 돌파하라"고 독려했다. 선두에 섰던 장교는 훗날 이 길을 '지옥불 계곡(Hell fire valley)'이라고 했다. 미 해병은 사망 2500명, 부상 5000명에 이르는 사상자 대부분을 수습해 함께 퇴각했다. 역사상 미군이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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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에 참가한 미해병대 병사들의 모습


 

17일간의 참혹한 전투. 패전에서 살아남은 전사는 딱딱하게 얼어붙은 동료의 시신을 수습한다. 패배의 기억을 더듬어 기록하는 것은 결국 누군가 해야 할 일이다. 이를 바탕으로 장진호 전투의 새로운 의미를 찾아야 한다. 더이상 외면하지 않아도 될, 불편하지 않은 역사적 사실말이다.



▶1983년 이 전투에서 싸웠던 미군들이 '초신 퓨(Chosin Few)'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일본 지도밖에 없었던 당시 장진의 일본식 지명 '초신'에, 살아남은 사람이 적다는 뜻의 '퓨(few)'를 붙였다. 소총수로 참전했던 마틴 러스는 '포위망 탈출(Breakout)', 장교였던 조지프 오언은 '지옥보다 더한 추위(Colder than Hell)'라는 책을 펴냈다. 미 해군 순양함 중엔 '초신함(USS Chosin)'도 있다.


▶미 해병 대위 출신 영화감독 브라이언 이글레시아스가 장진호 전투를 기리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다. '초신 퓨' 회원들을 인터뷰해 전멸 위기를 벗어난 영웅들의 이야기를 담는다고 한다. 영화 제목은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이지만 미국인들은 여전히 잊지 않고 기록하고 기념하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6·25 휴전일인 지난 7월 27일을 참전용사를 기리는 국가기념일로 공포했다. '잊혀진 전쟁'이라는 이름은 우리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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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남도의 장진호에서 함흥에
는 첩첩산중의 가도에서 벌어진 이 전투는
세계 전투사에서 전설로 전해질 만큼 역사적인 전투였죠.

그럼 장진호 전투가 얼마대단한 전투였는지 좀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합시다.


 전사가(戰史家)들은 6.25전쟁을 크게 3단계로 분류한다.

▲제1단계는 1950년 6월25일 북한의 남침에 따른 개전과 함께 인천상륙작전으로 정세의 전환이 이루어진 시점이다.

▲제2단계는 38선을 돌파해 압록강까지 진출해 거의 전쟁이 끝날 것으로 여겨졌던 시점.

▲제3단계는 중공군의 참전에 따른 UN군의 후퇴와 그 이후 휴전까지 전개됐던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시기이다.  



이 가운데 ‘장진호(長津湖) 전투’(1950.11.27~12.11)는 6.25전쟁의 제2단계에서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 이후 38선을 돌파한 UN군이 북한의 청천강 이북까지 진격했다가 중공군의 대병력(12만 명)을 만나 후퇴를 하게 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전투이다.

 

전쟁초기 청천강 유역의 서부(西部)전선에는 美8군 휘하의 美 제1군단(美 제24사단, 국군 제1사단, 英연방 제27여단으로 구성), 중앙에는 제9군단(美 제25보병사단, 제2보병사단, 여단규모의 터키 전투단), 그리고 조금 동쪽으로 국군 제2군단(국군 제6사단, 7사단, 8사단), 예비대로 美 제1기병사단과 英연방 제29독립보병연단이 전개하고 있었다.

 

美 해병1사단, 중공군 12만 명과 사투(死鬪)벌여


동부전선에는 원산에 상륙했던 해병대 병력과 육군 병력으로 구성된 美 제10군단(美 제1해병사단, 美3사단, 美7사단), 국군수도사단과 3사단을 주력으로 하는 국군 제1군단이 전개하고 있었다.

 

당시 동부전선을 담당하고 있는 美 제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은 ‘크리스마스 공세’의 공격개시일을 11월27일로 정하고, 美 제1해병사단에게 무평리를 목표로 진격해 제8군과 연결할 것을 명령했다.

 

이에 제5 및 제7연대는 11월 25일 유담리까지 진출한 후, 11월 27일 아침에 유담리에서 무평리를 향하여 공격을 시작하였으나, 중공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공격이 저지되고 말았다.

 

동부전선의 美 제10군단에 예속되어 있던 美 제1해병사단(1만 2,000명)은 장진호 북방으로 진출하던 중공군 제9병단의 공격을 받고 7개 사단 규모(12만 명)의 중공군이 포위망을 형성한 장진호 계곡을 빠져나오기 위해 2주일 동안에 걸친 死鬪를 벌인다.


이 전투에서 美 제1해병사단은 혹심한 추위를 무릅쓰고 유담리로부터 진흥리까지 40㎞가 넘는 협곡을 겹겹이 에워싼 중공군 포위망을 벗어나는 동안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 그러나 美 제1해병사단은 공군의 근접 항공 지원 하에 과감한 돌파작전을 전개해 함흥으로 철수하는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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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2월9일 美10군단은 모든 UN군으로 하여금 흥남지역으로 철수하라는 작전명령을 하달했다.
이에 따라 12월10일 오전 6시, 美해병 제1사단은 행군 행렬이 함흥에 도착하기 시작했고, 12월11일
저녁까지 최종부대가 함흥에 도착했다. 흥남에서는 14일~24일까지 UN군 12만 명과 피난민 10만 명이
해상으로 철수했다. 사진은 흥남부두 폭파를 지켜보고 있는 호의 모습이다.





‘장진호 전투’의 주인공인 美 제1해병사단은 1950년 10월 26일 원산에 상륙한 후, 11월 2일 함흥 북방 수동 일대에서 중공군을 물리치고 진격을 계속해 진흥리와 황초령을 거쳐 고토리를 점령했으며, 11월16일에는 장진호 남단 하갈우리에 도달했다.

 
당시 美 제1해병사단을 공격하고 있는 중공군 제9병단(제20, 26, 27군) 12개 사단은 11월 초순 집안에 도착, 곧 압록강을 넘어 장진호방면으로 신속히 남진해 있다가 서부전선에서 중공군의 1차공세를 통해 시간적 여유를 얻은 후 11월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 때 유담리에 있던 美 제1해병사단 2개 연대에 투입된 부대는 4개 사단이었다.


서부전선에서는 중공군의 2차 공세로 인해 美 제8군의 전선이 붕괴되자 UN군사령부는 11월30일 전면철수를 명령했다. 이에 따라 유담리의 해병 2개 연대는 사단사령부가 위치한 하갈우리로 철수해 사단과 합류한 후 흥남으로 철수하기로 했다.

 

11월30일 美 제1해병사단의 주력부대는 유담리에서 돌파작전을 시도, 12월2일 덕동고개까지 진출한 후, 하갈우리로 향한 돌파작전을 실시했다. 하갈우리에는 스미스 장군 휘하 약 1만 명의 병력과 1천대 가량의 차량이 있었다. 그러나 해병대에게 하갈우리의 도착은 철수의 첫 단계에 불과했다. 고토리, 진흥리, 그리고 최종 목적지인 함흥까지는 여전히 갈 길이 멀었기 때문이었다.


 *11월27일부터 12월11일까지 미국 1 해병사단은 전사상자 3,637명, 비전투전사상자 3,657명을 기록했고 비전투사상자 대부분은    동상 환자였습니다. 중국군 9병단은 장진호 전투로 무력화되었는데 10월15일부터 12월15일까지 전사 25,000명, 부상 12,500명에    가까운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양쪽 군대 모두 절반 이상 심한 동상에 걸렸는데, 당시 개마고원 장진호 일대는 고도 1000미터의 산악지형으로서, 낮기온 영하 20도, 밤기온이 영하 32도였다고 합니다.


당시의 혹독한 추위로 인해 중기관총은 반드시 부동액을 채워야 했고 경기관총은 불발을 방지하기 위해 목표가 있건 없건 주기   적으로 사격을 해야 했습니다. M1총은 윤활유가 얼어붙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엷게 발라야 했죠. 공중에서 투여되는 보급품도 땅 표면에 부딪쳐서 깨지는 바람에 탄약의 경우는 25%정도만이 사용 가능한 상태였습니다. 차량도 일정간격으로 가동을 시켜지 않으면 시동이 걸리지 않았고 땅 표면도 두껍게 얼어있어 참호를 파거나 축성을 하는 일은 극심한 노동이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동상 방지였는데 전투나 작업 후에 땀을 흘리고 나면 발과 발싸개 사이에 얇은 얼음막이 생겨 양말을 갈아신지 않을    경우 대부분 동상에 걸렸습니다. 부상자를 위한 수혈관이나 모르핀도 얼어버려 사용이 어려웠으며, 부상자를 위한 부대로 함부   로 갈 수 없었죠. 전투식량도 일일이 녹여 먹을 수 없어서 얼음조각이 있는 상태로 먹었기 때문에 전투 기간 내내 병사들은 심   한 장염과 설사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계속되는 전투로 침낭에 들어가 잠을 자는 것도 거의 불가능했는데 적의 기습에 대비해낭 속에서 잘 때에도 지퍼를 잠그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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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한과의 싸움



미 해병대는 전사한 전우의 명예를 생각해서 죽음을 무릎쓰고 부상자와 시신을 회수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동료 전사자의 시신을 거두기 위해 또 다른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죠.

 

당시 전시에 동원된 중국군 사단은 6,500명에서 8,00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포병은 미군의 공습 때문에 대부분 후방에 둔 채 투입되었습니다. 당시 중국 9병단의 임무는 서부전선에서 미 8군단과 대치 중인 제13병단의 측면을 방어하는 것과 장진호 부근의 미 10군단을 공격하는 것이었습니다. 중국군은 11월 초 미 제1기 병사단과의 전투 이후에 미군 보병은 보급이 끊기면 전투의지가 약화되고 후방과 연결이 차단되면 후퇴하며, 야간 공격에 취약하다고 분석하였습니다.




올리버 사령관, 사병들과 生死 함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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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진호 전투를 승리로 이끈
올리버(Oliver P. Smith)  미 제1해병사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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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 당시의 모습.
사진 맨 오른쪽 인물이 美해병 제1사단을 지휘한 올리버 소장이다.




중공군은 美 해병 2개 연대에 4개 사단을 투입하여 공격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이를 만회하기 위해 하갈우리로부터의 미군 철수로에 대하여 종전의 4개 사단에다 추가로 5개 사단을 투입했다. 또한 중공군은 하갈우리-고토리-진흥리 도로상에 주요 교량을 폭파하고 장애물을 설치하여 美 해병의 철수에 치명타를 입힐 준비를 끝내고 있었다.


이에 UN군 측에서는 철수를 제의하기도 하였으나 美 제1해병 사단의 사단장 올리버 스미스 사령관(Oliver P. Smith, 소장)은 이를 거절하고, 육로 철수를 단행했다.

 
당시 2차 대전의 경험이 있는 일당백의 전투력을 자랑하는 노련한 해병대원들과 올리버 사령관은 부대가 중공군에게 포위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직후 헬기로 포위 지역에 지휘소를 차리고 사병들과 生死를 같이 하겠다는 결의를 보여주었다.

 

당시 올리버 사령관은 이 작전이 후퇴작전이냐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후퇴라니! 우리는 새로운 방향으로 공격 중”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때부터 美 해병 제1사단은 “후퇴가 아닌 새로운 방향으로의 공격”을 위한 긴 여정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12월 6일 하갈우리를 출발한 美 해병대와 美 보병 제7사단 1개 연대는 끝내 죽음의 통로를 통과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11일에는 최종 목적지인 함흥과 흥남간의 집결지에 도착함으로써 14일간의 철수작전을 마치게 되었다.


11월27일~12월11일까지 美 제1해병사단은 전사상자(戰死傷者) 3,637명 비전투전사상자(非戰鬪戰死傷者) 3,657명을 기록했다. 비전투사상자 대부분은 동상환자였다. 중공군 제9병단은 장진호 전투로 무력화됐다. 10월15일~12월15일까지 戰死 25,000명, 負傷 12,500명에 가까운 사상자가 발생했다.


미 해병 제1사단의 자랑이 된 장진호 전투에서 사단장이던 스미스(Oliver P. Smith) 소장의 리더십은 상당히 유명한데요. 오늘날에그가 보여준 지휘능력은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스미스 소장은 무리한 진격을 삼가했습니다. 그는 아군이 대공세에 나섰던 1950년 10월 북진당시에 UN 군부대 중 거의 유일하게 후의 안전을 확보하고 난 후 사단을 이동시키는 신중함을 보였습니다.

 비록 진출은 더딜 수밖에 없었지만 이런 철저한 준비는 중공군의 출몰 이후 대책없이 무너져 내린 여타 부대들과는 다르게 후퇴시기에도 미 해병 제1사단이 놀라운 전투력을 유지시주었던 힘이 되었죠.

 이후 스미스는 위기의 순간에도 전부를 구해내는 용기를 보였습니다. 애당초 안전한 철수가 불가능해 보이자 상부로부터 병력만이라도 항공편으로 철수시키라는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스미스는 본대 철수를 위해 비행장을 확보하려면 일부 병력이 적지에 낙오될 수 있고 또한 장비가 중공군에 넘어가면 나중에 더 큰 위험이 되므로 그는 4,300명의 부상자만 항공편으로 철수시키기로 결정하고 적과 교전하며 육로로 탈출하는 길을 택하였습니다.

 
스미스는 해병대는 하나이며 결코 좌절하지 않는다는 신념을 전 예하장병에게 전하여 사기를 북돋은 후 전 병력과 장비는 물론 사자의 시신까지 수거하여 적진을 돌파하여 탈출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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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 전투에서 美해병대는 해병대의 전통에 따른 부상자뿐만 아니라
전사한 전우들의 시신과 함께 철수했다. 

 

당시 스미스가 부대원들에게 "우리는 철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적을 격멸하고 후방을 향하여 새롭게 공격하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훈시를 내렸고 이 말은 지금까지도 전설적인 구절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방향으로 진격한다!

 

스미스 소장은 우선 5연대와 7연대에 하갈우리로 내려오도록 지시했고 고립된 미육군 7사단 31연대를 구출하기 위해 특공대를 긴급 편성했다. 장진호 주변에 포진한 병력을 빨리 하갈우리로 집결시킨 후 남쪽의 고토리로 이동하여 해병 1연대와 합류하고 황초령을 넘어 진흥리로 철수하는 것이 세부계획이었다. 진흥리부터는 길이 좋고 철도가 놓여 있어서 흥남까지 내려가는데 큰 무리가 없었다.

 

극동공군은 하갈우리 임시 활주로에 주목하고 수송기를 활용한 공중철수를 제안하지만 스미스 사단장은 이를 거부했다. 공중철수를 한다면 비행장 방어진지를 점차 줄이면서 철수해야 하는데, 이럴 경우 1~2개 대대 병력은 마지막까지 비행장을 사수하다가 전멸할 수 밖에 없다. 스미스 소장은 미해병대의 전통을 고려할때 전우의 죽음을 방치하는 그런 명예롭지 못한 철수작전은 할 수 없다고 판단, 전원 육로로 철수할 것임을 천명했다.

 

모든 부대들이 중공군의 기습으로 곤경에 처했지만 가장 심각한 곳은 미육군 7사단 31연대 쪽이었다. 장진호 동쪽에 주둔한 7사단 31연대는 퇴로가 완전 차단되어 해병대보다 큰 어려움에 처했다. 철수하려면 얼어붙은 장진호를 가로질러 장진호 서쪽의 유담리로 가거나 포위망을 뚫고 남쪽의 하갈우리로 가야 하는데 둘다 위험한 루트였다. 31연대 1대대장 페이드 중령은 포위망을 뚫기로 하고 결심하고 페이드 특수임무대를 결성, 취약한 지점을 향해 화력을 집중했다. 다행히 하갈우리에서 급파된 특공대가 합세하면서 무사히 탈출했지만 31연대는 연대장이 실종되고 대대장 페이드 중령이 전사하는 등, 전멸에 가까운 손실을 입었다. 실종된 연대장은 중공군에 포로가 되었으며 나흘 뒤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유담리에 있던 5해병연대와 7해병연대는 일주일간 격전을 치루면서 후퇴한 끝에 하갈우리에 도착하였다. 유담리에서 하갈우리까지 거리가 22km라는 점을 고려할때 시간이 많이 걸린 것이었다. 후퇴하는 동안137명이 전사하고 4400여명이 부상을 입었지만 두 연대는 건재를 유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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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담리에서 작전 중인 미해병 장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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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장진호 전투)에 지친 美해병 제1사단 소속 장병의 모습.



또 하나의 적, 엄청난 추위

 

미해병대 입장에서는 10만이 넘는 중공군 대부대도 큰 적이었지만 엄청난 추위 역시 큰 적이었다. 장진호가 위치한 개마고원은 한반도에서 가장 추운 곳 중 하나로 전투가 시작되었을 당시 낮 기온은 영하 20도, 밤기온은 영하 32도였다고 한다. 이는 체감온도가 영하 30도에서 50도 정도의 강추위였음을 의미하는데 이런 온도에서 맨살을 노출시키면 곧바로 동상에 걸려 버린다.

 

적과 싸우는 것도 중요했지만 이런 강추위 속에서 장비를 보존하는 것도 문제였다. M1소총은 윤활유가 얼어붙어 기능고장을 일으켰고 음식은 모두 얼어버렸다.소총 외에 기관총도 얼어붙었다. 미군들은 총이 얼버붙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가끔 허공으로 사격을 해야했다.


거기에 침낭 사용도 제한이 있었다. 추위 속에서 잠을 자려면 침낭 지퍼를 끝까지 올려 보온을 해야하는데, 문제는 지퍼가 얼어붙어 침낭에서 나올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침낭 사용시 지퍼를 끝까지 올리지 말도록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강력한 추위는 지원사격에도 영향을 주었다, 미군이 중공군보다 우위에 있었던 것은 강력한 포병화력이었다. 그런데 강추위가 몰아치면서 찬 공기의 밀도가 높아지자 105밀리 곡사포의 사거리가 짧아지기 시작했다. 거기에 얼어붙은 땅에서 박격포를 사격하자, 포판이 단단한 땅에 부�히면서 깨지는 사태가 생겼다. 얼어붙은 땅에서는 참호를 구축할 수가 없어 시체를 쌓아 참호처럼 사용하기도 했다. 엄청난 강추위 때문에 무기들이 작동을 멈추거나 고장나는 일이 빈발했고 수혈용 혈액과 몰핀 주사제가 얼어버려 부상자 치료에도 장애가 되었다.


 
추운 날씨일수록 따뜻한 음식을 먹어야하지만 미군들에게 그것은 그림의 떡이었다. 그들에게는 꽁꽁 얼어붙은 시 레이션 음식 밖에 없었다. 추운 날에 차가운 음식을 자꾸 먹게 되자 설사를 하는 장병들이 급증했으며 강추위 속에 설사를 하면서 항문 동상 환자도 급증했다. 

 

미군들은 밤에도 잠이 들 수 없었다. 중공군들이 주로 낮에는 숨고 밤에 기습을 해왔기 때문에 잠을 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낮동안 행군으로 지친 몸으로 야간전투를 벌이는 것은 매우 피곤한 일이었다. 거기에 추운 밤에 30분 이상 잠들면 얼어죽을 수 있기 때문에 중공군의 기습이 없더라도 숙면을 취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추운 날씨는 미군이나 중공군 모두에게 큰 적이었다. 그나마 미군은 동계피복이 잘 보급되어 상황이 나은 편이었다. 물론 지급된 동계피복을 껴입으면 옷 두께가 15cm나 되기 때문에 움직이기가 힘들긴 하지만, 누비솜옷 밖에 없는 중공군들에 비해 훨씬 나은 편이었다.

 

추위로 인한 양측 인명피해는 컸다. 미 제 1해병사단에서 동상으로 항공후송된 인원은 3000명이 넘었다. 그리고 중공군 중 5만 명이 동상에 걸렸고 그 중 1만명은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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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독한 추위에 凍死한 美해병대 장병들의 모습. 그들은 추위속에서 조국과 가족을 그리워하며 죽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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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수 중에 있는 미 해병 제1사단 장병들.


험난한 후퇴의 길, 마지막 관문, 황초령!

 

미 해병 5연대와 7연대, 그리고 육군 7사단 31연대는 속속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하갈우리에 도착했다. 하갈우리의 사단 사령부는 1만명의 병력과 1000명 이상의 피난민, 그리고 1000여 대의 차량이 모여들어 북적거렸다. 일단 장진호 주변에 있던 부대들이 하갈우리에 집결했으니 남쪽으로 내려가는 일만 남았다. 다음 목표지점은 고토리였다. 고토리에 주둔하고 있는 미 해병 1연대와 합류해서 같이 철수해야 했다.

 

하갈우리를 떠나기 전 대부분의 부상자들은 항공편으로 철수시켰다. 부상자 수송과 아울러 보충병들이 항공기 편으로 속속 도착했다. 부상자, 전사자 속출로 전투력이 약화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하갈우리의 임시 활주로가 아니었다면 이런 일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임시활주로를 건설한 스미스 소장의 혜안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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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장진호 남쪽에 보이는 비행장. 하갈우리 임시 활주로이다.(출처--구글어스)

 



고토리로 철수하는 동안 중공군은 9곳에서 미군을 공격했다. 미군은 중공군의 기습을 물리치며 고토리까지 철수하는데 성공했으나 전사 86명, 부상 506명의 피해를 입었다. 고토리에서 미 해병 1연대가  합류한 후 철수대열은 진흥리로 향했다. 진흥리에 도착하려면 도중에 해발 1200미터의 황초령을 넘어야 했다.

 

황초령에서 연합군은 최대의 난관과 마주쳤다. 황초령 수문교가 파괴된 것이다. 장진강발전소는 장진호의 물을 황초령으로 역류시켜 전기를 생산하는   유역변경식 발전소였다. 그래서 역류지점에 수문교가 있었던 것이다. 중국군이 황초령 수문교를 파괴하면서 연합군은 후퇴길이 막혀 버렸다. 다른 길은 없으니 반드시 수문교를 복구해야 했지만 이를 복구하기 위해 4개의 조립교가 필요했다. 

 

연합군 공병대에는 조립교가 없었기 때문에 방법은 수송기에 의한 공중투하 밖에 없었다. 중공군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중공군 58사단, 59사단, 60사단이 북쪽에서 내려오고 있고, 중공군 60사단 179연대는 황초령 남쪽 진흥리에 매복한 상태였다.

 

공군은 조립교 투하문제를 두고 고심했다.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으니 황초령까지 날아가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조립교가 중공군 수중으로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것과 무사히 낙하하더라도 얼어붙은 대지에 충돌하면 조립교가 손상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었다. 연구 끝에 공군은 조립교 8개를 C-119 수송기에 실어서 투하하기로 했다. 8개를 투하하면 일부가 손상된다 해도 4개 정도는 온전할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8대의 C-119 플라잉 박스카 수송기가 황초령 상공에 나타났다. 전 세계가 숨죽이고 지켜보는 가운데 8개의 조립교가 낙하산을 달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 결과 6개의 조립교가 연합군 수중에 들어갔다. 나머지 1개는 얼어붙은 대지에 떨어져 손상되었고 다른 하나는 중공군 영내에 떨어졌다. 중국군 9병단장 송시륜은 황초령에서 연합군을 몰살시키겠다고 장담했지만 조립교 공중투하 장면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복구된 수문교 위로 연합군 후퇴대열이 이틀에 걸쳐 무사히 통과했다. 황초령을 통과함으로써 마침내 연합군은 중공군의 포위망을 벗어난 것이었다. 진흥리에 중국군 179연대가 있긴 했지만 그것은 지금까지의 전투에 비한다면 소소한 것이었다.

 

진흥리에 도착한 연합군은 전원 기차와 트럭에 나누어 타고 흥남으로 향했다. 이리하여 혹한의 추위와 10만이 넘는 중국군과의 대혈전은 막을 내렸다. 트루먼 대통령은 장진호 철수작전을 두고 "가장 큰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했다고 하니, 미국 등 전세계 지도자들이 장진호 철수작전을 지켜보면서 애간장을 많이 태웠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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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초령 상공에서 수문교를 투하한 C-119 플라잉 박스카 수송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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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 장진호전투 작전지도.

제2차 전역(동선) 작전 요도: 제2차 전투(동부전선) 작전지도: (1950년 11월27일~12월24일)
함흥, 흥남, 진흥리, 고토리 등의 지명이 보인다. 
포위망에 갇힌 미군을 쫓는 상황이 확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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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참전국 인원손실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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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만 피습 이후 미군 역사상 최악의 패전
장진호 전투
영화화


이 영상은 2010년에 만들어진 Chosin이라는 다큐영화 트레일러입니다.
2011년에 헐리웃에서 장진호 전투 배경으로한 영화 "17Days of winter" 가 개봉되었습니다.


 

 


개마고원 장진호에서 미군 1개 사단이 중공군 7개 사단과 맞서 싸워 흥남부두 피난을 도왔던 장진호 전투를 아십니까?

장진호 전투는 미 해병 1사단이 1950년 11월 27일부터 2주간 개마고원 근처 장진호에서 7개사단 규모의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후퇴하기 위해 벌인 전투입니다.

이 후퇴작전을 통해서, 미 해병1사단은 10배를 훨씬 넘는 중공군 대 병력의 남하南下를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 속에서 중공군의 함흥지역 진출을 2주간이나 지연 遲延시켰으며, 중공군의 포위망包圍網을 뚫고 마지막 관문인 황초령(黃草嶺 장진호 입구 함경남도 장진군 신남면과 함주군 하기천면 사이에 있는 고개 1,210m)을 차단 포위한 중공군도 격멸, 와해시키고 죽음의 함정陷穽을 탈출하였고, 흥남에 도착, 흥남 부두를 통해 남쪽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12월 9일에는 사령부로 부터 10군단 전 병력은 흥남 지역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12월 10일 6시 선두부대가 함흥에 들어오는 것을 시작으로 12월 11일 저녁까지 후위 부대 전부가 함흥으로 철수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흥남 부두에서 14일 부터 24일까지 전설적인 해상 퇴각이 벌어지는데 무려 민간인 10만과 UN군 12만이 겨우 백수십척의 배로 탈출하는 전설의 흥남 철수 작전이 이루어지지요.

 

이 전투의 결과로 전사 3637명, 비전투 사상 3657명을 기록했고 중공군 또한 부상 12500명, 전사 25000명으로 부대 자체가 무력화 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덕분에 초기 중공군 계획대로 흥남까지 밀고 내려간다는 것은 좌절될 수 밖에 없었지요. 또한 이런 심각한 타격으로 인해 미8군까지 기사회생 할 수 있었고 당시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침낭 속에서 잠을 자는 것도 연속된 공격으로 쉽지 않았고 혹여 쉬더라도 침낭 자크를 잠그는 일은 금지되었었습니다.

 

또한 이 전투의 치열함은 최고 등급의 명예 훈장 (Medal of Honer) 수상자가 131명인데 그 중에 해병대 수상자가 46명이고 그 중에서 장진호 전투로 수상한 자가 13명이 되니 이 며칠의 싸움이 얼마나 무시무시 했는지를 알려주는 사례라 할 수 있겠습니다.

 

장진호 전투로 미군 7200여명이 희생되고 중공군은 미군의 10배 이상이 사망했습니다. 당시 흥남에서 1만4,000명을 태우고 거제도까지 항해한 빅토리아호는 전세계인의 가슴을 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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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 전투 '우리만 빠진 '美-中의 영화 전쟁

 

SBS | 윤춘호 기자 | 입력 2013.03.25

 

중국과 미국이 한국전쟁의 최고 격전으로 꼽히는 장진호 전투를 소재로 한 영화를 각각 만든다고 합니다.

미국에서는 3D입체 영화의 거장인 에릭 브레빅 감독이 2010년부터 '혹한의 17일'이라는 제목으로 영화를 제작 중인데 조만간 상영 예정이라고 합니다. 장진호 전투를 소재로 한 미국 영화는 '지옥의 철수작전'(RETREAT! HELL)(1952년)를 비롯해 몇 편 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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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맞대응이라도 하듯 중국도 장진호 전투를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중국 인민해방군 산하 바이(八 一)영화제작소 책임자가 최근에 이 같은 계획을 밝혔습니다. 감독은 펑샤오강이 맡을 예정이고요,

 

장진호 전투가 어떤 전투였기에 미국과 중국이 서로 영화로 만들려고 하는 것일까요? 장진호는 한반도의 지붕이라고 불리는 함경남도 개마고원에 있는 호수입니다. 1934년에 장진강을 막아 만든 인공호수입니다. 평균 높이가 1천 미터가 넘고 2천 미터에 육박하는 말 그대로 고산준령으로 이어진 개마고원 한 가운데에 있는 호수지요.

여기에서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13일까지 17일 동안 미군과 중국군이 한 판 붙었습니다. 당시 전황은 미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이 북한군을 압록강까지 밀어붙이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북한 정권의 붕괴는 시간문제라고 여겨졌습니다. 미군들은 그 해 크리스마스는 고향에서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하던 상황이었습니다.

 

유일한 변수가 있다면 중국이 이 전쟁에 개입할 것인지 여부였습니다. 중국의 대규모 개입 여부에 대해서는 당시로서는 부정적인 전망이 많았습니다. 국공내전에서 승리해 정권을 수립한 지 1년 여 밖에 안 된 신생 중국이 세계 최강 미국을 상대로 전면전을 벌이기는 힘들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예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습니다. 당시 중국은 40만 명이 넘는 군대를 북한에 이미 투입한 상태였습니다. 철저하게 밤에만 이동해 미군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미 해병 1사단은 북한의 임시수도였던 강계를 향해 진군하고 있었습니다. 험준한 개마고원의 깊은 산중을 헤치면서 말이지요. 중국군 9병단은 이런 미군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미군을 장진호 주변에서 완전히 포위하는데 성공합니다. 미 해병 1사단은 그야말로 독안에 든 쥐 꼴이 된 거지요.

 

당시 미군 병력은 약 1만 5천 여 명, 중국군 9병단은 7개 사단 12만 명이었습니다. 병력의 차이도 컸지만 중국군의 대규모 참전을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당한 기습 포위 공격으로 미군은 큰 타격을 입고 후퇴합니다. 통계에 따라 숫자가 엇갈리지만 미군 사상자는 총 7천 여 명이 넘습니다. 이 가운데 사망자는 3천 6백 명이나 됐습니다.

미군이 한 전투에서 이렇게 많이 죽은 것은 유례를 찾기 힘듭니다. 더구나 해병 1사단은 미군의 정예 가운데 정예였습니다. 당시 미국 뉴스위크는 이 전투를 일본의 진주만 습격 이후 미군 사상 최악의 패배라고 보도했습니다. 미군 해병대사에서도 장진호 전투는 미군이 가장 고전한 전투라고 기술돼 있습니다.

한국전쟁의 최종적인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던 미군은 이 전투를 계기로 후퇴하기 시작합니다. 미군으로서는 치욕적인 전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들보다 병력 수에서 10배에 가까운 중국군의 기습 포위 공격을 뚫고 성공적으로 후퇴작전을 했다는 점, 17일 동안 중국군 대병력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미군이 일방적으로 패배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중국은 이 전투에서 미군에 큰 타격을 주고 한국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했습니다. 세계 최강의 군대라는 미군을 패퇴시켰다는 점에서 신생 중국은 자신들의 힘을 전 세계에 알릴 수 있었습니다. 붕괴 일보 직전에 있던 북한 정권을 기사회생시킨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것도 이 전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전투를 통해서 중국군도 4만 여 명이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어 9병단은 한동안 정상적인 작전이 불가능했습니다. 미군을 완전히 포위, 기습했지만 미군을 완벽하게 궤멸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외양으로는 승리였지민 중국의 내상도 대단히 컸습니다. 중국 지도부도 이 전투를 통해 미군이 말로만 세계 최강이 아니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는 계기가 된 셈이지요.

장진호 전투는 한낮에는 영하 20도, 밤에는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혹한 속에서 벌어졌습니다. "역사상 유례가 없는 잔인하고 야만스러운 전투였다"라는 평을 듣습니다. 2차대전의 모스크바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함께 세계 3대 冬季전투라고 합니다. 어찌나 추웠던지 휘발유와 윤활유까지 얼어서 무기와 차량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을 정돕니다.

전쟁이 주는 극한 상황, 그 안에서 벌어지는 전우애, 양측 지휘관의 지략 대결 등 극적인 요소가 고루 갖추어져 있습니다. 영화적 요소로 가득한 것입니다. 여기에 중국의 급부상도 이 전투가 영화화되는 이유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중국은 이제 미국에 버금가는 G2 국가가 되었습니다. 스크린이긴 하지만 세계 최강 미국과 중국이 정면으로 한 판 붙는 것은 관객을 유인하는 좋은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중국의 자신감도 느껴집니다. 중국은 어쩌면 장진호 전투 영화를 통해 이미 60 여 년 전에 미국을 꺾은 적이 있다고 말하고 싶은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중국版 '장진호 전투'는 규모 면에서 미국의 그것에 뒤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장진호 전투 영화를 두 나라가 경쟁적으로 만든다는 뉴스를 접하면서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장진호 전투에 국군 일부 병력이 참전하긴 했지만 주요 변수는 아니었습니다. 북한도 마찬가집니다. 우리 땅에서 벌어진 전투였지만 주역은 미국과 중국이었습니다. 우리는 조연에 불과했습니다.

당시 지도에 장진호는 초신이라고 표기됐습니다. 군사 지도가 일제시대에 만들어져 '長津'이란 지명이 일본식인 '초신'으로 표기된 겁니다. 지명에서조차 우리는 소외돼있었던 것입니다.

미국과 중국은 장진호 전투에 대해 할 말이 많은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영화를 만드는 것이겠지요.
앞으로 만들어질 두 영화에서 한국은 어떻게 그려질까요? 한국군이나 북한군이 등장할까? 등장한다면 어떤 모습으로 나올까? 戰史에는 잘 나오지 않긴 하지만 당시 전투의 최대 피해자는 누구니 누구니 해도 그 지역에 살고 있던 민간인이었을 겁니다. 우리 동포들 말이죠.

그 사람들의 피해와 고통, 슬픔은 영화 속에서 어떻게 그려질까요? 그려지기나 할까요? 당시 거기에 살고 있던 주민의 눈에 장진호 전투는 어떻게 비쳤을까요? 미군과 중국군은 또 어떤 사람들로 다가왔을까요? 침략자? 해방자? 우리들의 시각에서 우리들의 손으로 만드는 한국版 장진호 전투 영화가 곧 나오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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