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김유정

김유정의 생전모습
김유정은 1908년 1월 11일 강원도 춘천 실레 마을에서 8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하고 자주 횟배를 앓았다. 또한 말더듬이어서 휘문고보 2학년 때 눌언교정소에서 고치기는 했으나, 늘 그 일로 과묵했다. 휘문고보를 거쳐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결석 때문에 제적 처분을 받고 귀향, 고향에서 야학운동을 벌인다.
1933년 다시 서울로 올라가 소설 창작에 몰두, 그해 처음으로 잡지 ‘제일선’에 [산골 나그네]와 ‘신여성’에 [총각과 맹꽁이]를 발표한다. 이어 1935년 소설 [소낙비]가 ‘조선일보’신춘문예 현상모집에 1등 당선되고,[노다지]가 ‘조선중앙일보’에 가작 입선함으로써 떠오르는 신예작가로 활발히 작품 발표를 하는 한편, 구인회 후기 동인으로도 활동한다. 이듬해인 1936녕 폐결핵과 치질이 악화되는 등 최악의 환경 속에서 작품 활동을 벌인다.
왕성한 작품 활동만큼이나 그의 병마도 끊임없이 김유정을 괴롭힌다. 생의 마지막 해인 1937년, 다섯째 누이 유흥의 집으로 거처를 옮겨 죽는 날까지 펜을 놓지 못한다. 그러나 죽기 열흘 전 오랜 벗인 안회남에게 보낸 편지를 끝으로 1937년 3월 29일, 그 쓸쓸하고 짧았던 삶을 마감한다. 스물아홉이었다.
김유정의 삶과 운명
김유정의 집안은 천석지기의 지주였고, 고향인 강원도 산골(춘천에서 한 이십여 리 가량)이었지만 서울에도 백여 칸 되는 집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부유했다. 그러나, 일곱 살 때 어머니를,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여읜 뒤로 집안을 관리하던 큰형의 방탕한 생활로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그 때 그는 마을의 주막집을 드나들며 집시와 같은 생활을 하고 들병이들과 어울린다. 이러한 경험은 김유정의 문학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들병이는 남편 있는 여인이 시골 주막으로 돌아다니며 술과 몸을 파는 것을 말한다. 들병이의 남편은 아내를 매음시켜 생계를 꾸릴 뿐 아니라 그것을 즐기기조차 한다. 이러한 남편의 의식, 즉 '들병이 사상'이 김유정 문학의 출발점에 놓여 있는데, 그것이 드러난 작품으로 <봄 봄> <동백꽃> <두꺼비> <안해> 등을 들 수 있다.
고향에 있을 당시 김유정은 충청도 광업소(금광)에서 몇 달 동안 현장 감독을 한 적이 있었다. 또 고향 실레에서 오 리 정도 떨어진 '물골'에서는 사금이 나오고 있었는데 그 곳 개울 바닥은 온통 파헤쳐져 성한 곳이 없을 정도였다. 이러한 체험을 바탕으로 김유정은 금을 찾아 횡재를 노리는 인간 군상을 그려 낼 수 있었다.
작품 <금 따는 콩밭> <노다지> <금> 등이 바로 그러한 체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1933년 서울로 올라온 김유정은 폐결핵을 앓는다. 그는 주야로 원고를 쓰면서 병마와 싸웠다. 1937년 3월 29일 김유정은 끝내 병을 이기지 못하고 삼십여 편의 작품을 남겨 놓은 채 세상을 떴다. 경기도 광주의 누님 집에서 누님과 매형이 지켜보는 가운데 쓸쓸하게 임종을 맞았다. 그의 시신은 유언대로 화장되었고, 유골은 한강에 뿌려졌다.
그리고, 여기서 그의 삶과 여자, 그리고 성격을 덧붙인다면, 그가 생전에 어머니를 잃고, 어머니에 대한 김유정의 그리움은 남달랐다고 한다. 심지어 자신이 말하는 '그리움'은 모두 어머니에 대한 환상이었다고 훗날 고백할 정도였다. 세상의 그늘을 모르고 풍족한 환경에서 자라온 어린 김유정에게 어머니의 상실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연이은 아버지의 죽음과 가세의 급속한 쇠락은 어린 김유정을 자신만의 내성적인 세계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이후 폐결핵에 시달리며 김유정은 깊은 우울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나는 숙명적으로 사람을 싫어합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을 두려워한다는 것이 좀더 적절할는지 모르겠습니다.
늘 주위의 인물을 경계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 버릇이 결국에는 말없는 우울을 낳습니다."
(김유정, "어떤 부인을 맞이할까"에서)
어머니에 대한 집요한 그리움과 숙명적 우울, 이러한 상태에서 김유정은 두 여인(박녹주, 박봉자)을 향해 일방적으로 사랑을 갈구한다. 마치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사랑을 무한정 조르듯이..... 하지만 그의 우울과 그리움은 여인과의 사랑에서도 보상받지 못한다.
김유정이 박녹주를 처음 만난 것은 1926년 휘문고보 4학년을 휴학할 즈음이었다. 그들은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목욕을 마치고 나오는 박녹주의 모습을 보고 반하여 김유정은 연정을 품기 시작했다. 그는 박녹주에게 연정을 호소하는 편지를 띄웠으나 번번이 무시되자 그녀를 찾아가 적극적으로 사랑을 호소하였다. 혈서로 편지를 써서 보내기도 하고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김유정보다 연상이고 기생 생활을 하던 박녹주는 끝끝내 그의 사랑을 거절한다.
박녹주는 다음과 같이 대꾸할 수밖에 없었다고 회상한다.
"무슨 학생이 공부는 안 하고 편지질이오?
학생이 기생과 무슨 연애를 하자는 말이오?
학생이 이러면 나도 가슴이 아프오. 공부를 끝내면 다시 나를 찾아 주시오."
(박녹주 "여보, 도련님 날 데려가오"에서)
또 다른 사랑은 1936년 여름부터 시작된다. 김유정은 박봉자에게 연애편지를 보냈다. 이전 박녹주의 경우처럼 편지에 대한 회신은 없었다. 수개월에 걸쳐 서른 통의 편지를 보냈을 때 박봉자는 다른 사람과 약혼한다. 김유정은 그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박봉자는 그 때 일을 이렇게 회상한다.
"김유정의 편지는 서른 통 정도 받았다.
먼저 오빠의 손에 겉봉이 뜯긴 다음 내가 편지를 읽었다.
지금 여성들은 다르겠지만, 당시는 아무리 신여성이라 해도
김유정 같은 뜨거운 구애에는 침묵을 지킬 도리밖에 더 있었겠는가?"
김유정의 문학 세계
김유정의 작품 세계는 작가 자신의 실제 생활 내지 주변 인물들의 생활상과 밀착되어 있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방탕한 형의 억압된 분위기에서 자랐다. 장성하여서는 폐결핵과 가난에 시달리면서, 소박맞아 온 누이에게 얹혀 살기도 했다. 고향에서 들병이들과의 무질서한 생활, 모처럼 손대었던 금광의 실패, 실연(失戀) 등 김유정의 주변에서 일어난 상황들은 그로 하여금 작품 속에다 해학 뒤에 괴어 있는 일말의 애수(哀愁)를 새겨 놓도록 만든 것이리라.
형의 방탕으로 가산이 몰락하고 가난에 쪼들리는 자기의 처지를 그린 “형”, “연기”, “따라지”, 금광에 손댔다가 실패한 경험과 관련된 “금”, “금 따는 콩밭”, 시골 들병이들과의 어지러운 생활을 그린 “솥”, “총각과 맹꽁이”, “산골 나그네”, “아내” 등에서 김유정의 자화상을 본다.
이 같은 김유정의 소설에서 파악되는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향토성
김유정 소설의 배경은 대체로 산골 농촌이다. “소나기”, “산골”, “만무방”, “산골 나그네”, “동백꽃”, “가을”, “봄․봄” 등이 그런 작품이다. 김유정의 소설의 향토성은 작가의 체취다. 김유정이 강원도 춘성군 실레 마을 산골 출신이기 때문이다.
(2) 해학성
김유정의 소설에는 한국적인 특유의 해학이 스며 있다. “봄․봄”은 해학성을 띤 대표적인 작품이고, “아내”, “총각과 맹꽁이”, “땡볕”에도 애수 어린 해학이 깃들여 있다.
(3) 풍자성
김유정 소설 도처에 스며 있는 해학은 단순한 소극(笑劇)의 그것과는 다르다. 우리의 전통적인 해학에 접맥되어 있으며, 그것은 또한 풍자성을 동반한다.김유정의 소설의 풍자성은 1930년대 우리 소설의 한 경향과 흐름을 같이 한다. 채만식의 “레디메이드 인생”, “치숙”, “태평천하” 등도 함께 공부할 문제다.
(4) 인물의 우직성(愚直性)
김유정 소설의 인물 가운데는 소박하고 우직한 인물이 많이 등장한다. 점순이 키만 크면 성례시켜 준다는 교활한 장인에게 속아 사는 “봄․봄”의 주인공, 다 자란 콩포기를 뽑아 내고 금을 캐내려는 “금 따는 콩밭”의 주인공이 대표적이다.그러나 ‘타산적인 전달형 사내’나 ‘야무지고 외향적인 여인’이 등장하는 작품도 있다.
김유정 소설의 여성인물 연구
김유정은 193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소낙비]가 조선중앙일보에는 [노다지]가 각각 당선되면서 문단에 등장했다. 그는 1937년 30세의 나이로 요절할 때까지 병고와 가난에 시달렸다. 그는 짧은 창작활동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현실을 독특한 작품세계로 구축하여 우리 문학사의 한 영역을 넓힌 작가로 위치하고 있다.
김유정이 작품 활동을 벌인 1930년대는 격동의 시기로 조선에 대한 군수기지로서의 수탈정책이 강화되어 정치․경제․문화적 탄압이 극도로 가열되던 때였다. 이러한 때에 그는 사회적․경제적으로 소외된 하층 농민과 도시 빈민들을 제재로 선택하여, 식민지 시대의 수탈당하는 우리 민중의 삶을 독특한 문학세계로 형상화했다.
‘점순이’형의 ‘점순이’는 [봄․봄]과 [동백꽃]에 등장하고 있다.
‘점순이’는 김유정 작품 가운데서 가해 대상으로만 다루어진 여인 중에서 사랑의 의지를 완수한 유일한 인물이며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여인이다. 목석같이만 보이는 남자에게 먼저 접근하여, 그녀의 결혼 요구룰 달성하도록 자기 아버지의 쇰을 잡아채라는 행동지시까지 하는가 하면, 먼저 남자를 끌어안고 쓰러지는 당돌하고 뻔뻔스런 여인이기도 한 것이다. 이처럼 야무지고 당돌하며 외형적 성격으로 소박하고 우직한 남성들을 리드하여 실속을 차리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여인상으로 표출되고 있다.
‘아내’형의 ‘아내’는 궁핍한 생활 속에서 쌓여가는 불평이나 불만을 폭력을 행사함을써 해소하는 폭군, 심지어는 술장사나 매춘을 강요하는가하면, 아내를 팔기까지 하는 남편과 살면서도 주어진 상황을 운명인 양 받아들이며, 불평 한 마디 없다. 뿐만 아니라 남편들의 말에 철저히 따르고 있다. 심지어는 스스로 술장사를 하고 정조를 팔아서라도 남편과 함께 살기를 희망한다.
특히 아내들의 매춘하는 모습이 많이 보이지만 매춘은 어디까지나 생존의 수단일 뿐이지 쾌락이나 애욕의 수단으로 남편을 배반하고 훼절한 아내는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어느 작품에서나 순박한 성격으로 인종의 미덕을 발휘한다. 그래서 희생적이고 순종적이며 생활력 강한 동양의 전통적인 여인상을 표출해내고 있다.
‘누나’형의 ‘누나’는 제복 공장에 다니는 과부로, 놀고 있는 남동생을 먹여 살리느라 자신이 고된 일을 하고 있다는 극심한 피해의식을 드러내는 여인으로 [따라지], [생의 반려], [연기]에 등장한다.
위의 세 작품에 나타나는 이 피해의식은 결국 경제적인 극심한 궁핍이 근간을 이루는 것으로, 동생에게 히스테리를 가함으로써 해소하고 있는 것이다. 누나는 결국 가난이라는 시대적 산물의 피해 여인인 셈이다.
‘들병이’형의 ‘들병이’는 일년 농사를 지어봐야 지주와 빚쟁이에게 빼앗기고 남는 것은 다시 빚 뿐이라는, 1930년대의 농촌현실 위에서 발생한 유랑농민의 변모된 모습이다. ‘내가 술 팔러 왔지 당신의 아내가 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고 타이르는 [총각과 맹꽁이]이 들병이, 남편의 분부대로 아이를 포대기에 들싸서 등에 업고 따라 나서는 [솥]의 들병이, 눈보라 치는 부엌에 쪼그리고 앉아 부지깽이로 솥뚜껑을 톡톡 두드리며 들병이 연습을 하는 [안해]의 아내는,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생활전선에 뛰어든 한결같이 선량하고 순박하고 그러면서도 잡초처럼 강한 생활력을 보이던 우리의 전형적인 한국의 여인상이 변형된 보습인 것이다.
기타에서는 가난한 농민이 소작료와 빚에 쪼들려 유랑농민이 되고, ‘일구녕’이 없어 품을 못 팔아 밥이 없어 들병이가 되고, 도시에 나가 버스 차장이 되고, 공장의 여공이 되고 카페 여급이 되고 기생이 된다. 이들이 등장하는 작품은 제목 자체도 [따라지], [야앵夜櫻], [봄밤], [두꺼비] 등으로 붙여져 있다.
특히 카페 여급인 ‘아끼꼬’의 뻔뻔스럽고 영악한 생활 태도, 애증의 변덕이 심한 생활감정 등을 묘사함으로써 궁핍한 시대에 그럴 수 밖에 없는 여성의 일그러진 모습을 실감있게 보여준다.
이처럼 김유정은 여성에 대해 독특한 인식을 가지고 있음이 드러난다. 기존의 인습은 보통 남성이 집 밖에서 돈을 벌어오는 경제적 활동을 담당함에 비해 여성은 집안에서 출산이나 육아 또는 가사노동을 담당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 성격상의특징으로도, 보통 남성이 적극적이며 의지적이며 용감한데 비해 여성은 소극적이고 우유부단하며 유약하다는 것이 기존의 개념이었다. 그러나 김유정의 작품에서는 여성이 연약한 존재, 무력한 존재, 눈에 띄지 않는 소극적이고 수동적 존재라는 기존의 인습이 완전히 전도되어 나타나고 있다. 즉 애정관계에 있어 남성이 소극적인데 비해 여성은 적극적이며 현실적 문제의 대응 방법에 있어서도 남성이 연약하고 체념적인데 비해 오히려 여성은 강인하고 공격적이다.
한편 궁핍을 해결하는 수단으로 가장 소중하게 보호해야 할 아내의 성까지도 희생시킨다. 이때 작중의 남성들은 별 갈등도 느기지 않고 아내를 타인에게 판다. 그리고 이같은 아내의 ‘성의 상품화’는 남편에 의해 조장, 방조된다는 특징까지 갖고 있다. 이는 여성의 정조를 궁핍을 해결하는 수단으로 삼고 있던 시대적 풍속과 관련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것은 여성 해방론적 입장에서는 여성의 인권을 무시한 전근대적이고 탈윤리적인 여성 창도행위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일제 침탈의 결과 구조적 몰락으로 인한 극한 상황 속에서 생명만이라도 유지하려는 것으로 파악되어야 하겠다.
결국 김유정 문학에서 여성의 ‘성의 상품화’는 생존을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 선택된 어쩔 수 없는 행위로, 일제 수탈의 비극성을 고발한 것이다.
김유정의 단편소설 1. 봄*봄
작품시대 : 근대
성격 : 단편소설
창작연도/발표연도 : 1935년
1935년 12월 『조광(朝光)』에 발표되었다. 그 뒤 1938년 간행된 『현대조선문학전집 2』에 김유정의 대표작으로 실려 있고, 같은 해 간행된 단편집 『동백꽃』에도 수록되었다. 김유정 문학세계의 본령인 해학 내지는 해학적 인간인식이 가장 구체화되어 있는 작품의 하나이다. ‘봄봄’이라는 표제의 봄의 반복은 신생(新生)이나 사춘기 또는 청년기의 표상이기보다는 이 작품의 중심 내용인 안타까운 기다림, 또는 기대의 시간적인 표상어이다.
내용작품의 서술자이면서 주인공인 ‘나’는 3년을 훨씬 넘도록 봉필이라는 마름의 딸 점순이와 혼인하기 위하여 돈 한 푼 안 받고 데릴사위로서 약정된 머슴노릇을 한다. ‘나’는 어서 빨리 점순이와 혼인을 하고 싶으나, 그럼으로써 노동력이 손실될까 우려하는 봉필의 욕심 때문에 그 소망은 번번이 좌절된다. 봉필의 상투적인 이유는 점순이가 채 자라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순진하고 우직한 ‘나’는 내심으로 얼른 점순이의 키가 커주기를 빌기도 하고, 태업을 부리기도 한다. 그러나 봉필의 교묘한 농간에 의하여 언제나 일방적으로 패배한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의 부추김과 점순이의 묘한 반응에 자극을 받은 ‘나’는 관격(關格: 체하여 먹지도 못하고 대소변도 못 보는 위급한 병)을 빙자한 결정적인 태업으로 시위를 벌인다.
역시 결과는 봉필의 공갈과 매질로 이어지지만 ‘나’는 이번에는 지지 않고 결사적으로 장인의 급소를 붙잡고 늘어진다. 그런데 이 때, 성례 요구를 종용했고 내 편을 들어주리라 믿었던 점순이가 장인 편에 서서 자신을 비난하는 바람에 ‘나’는 맥이 모두 빠져버린다.
의의와 평가주인공인 ‘나’는 우직하고 바보스러운 인물이지만 이 작품은 그러한 인간의 우행(愚行)을 연민이나 타애적(他愛的) 감정으로 용인하려는 해학의 따뜻함을 지니고 있다. 또한 서술에 있어 속어적인 어조가 토착적인 정감과 전래의 바보사위 이야기와 같은 인간의 바보스러운 순진성에 대한 연민의 해학미를 더욱 유발시킨다.
한편 이와는 다른 측면에서 이 작품은 인간의 간교함에 대한 비판도 내재하고 있는바, 봉필의 행태가 그것이다. 봉필은 데릴사위 제도를 이용하여 순진한 사람의 노동력을 교묘히 착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작품은 표제가 암시하듯, 기대의 지평을 향한 초조와 조종자의 조작의 마찰이 빚어내는 인간관계를 희화화(戱畫化)하여, 작자 특유의 웃음으로 이끌었다는 점에서 김유정 문학의 백미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한국단편소설연구(韓國短篇小說硏究)』(이재선, 일주각, 1972)
「김유정(金裕貞)의 소설연구(小說硏究)」(김영화, 『국문학논문선』10, 민중서관, 1977)
<<줄거리>>
주인공인 '나'는 '봉필'이라는 마름의 머슴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의 딸 점순이와 결혼하기로 계약하고서 돈 한 푼 안 받고 데릴사위로 들어가서 머슴노릇을 하고 있다. '나'는 어서 빨리 점순이와 혼인을 하고 싶다. 그러나 3년이 지나도록 장인 될 봉필이는 '나'를 장가 들여 줄 생각도 않는다. 봉필이가 '나'와 점순이를 결혼시키지 않는 이유는 점순이가 채 자라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순진하고 우직한 '나'는 얼른 점순이의 키가 커 주기를 빌기도 하고, 꾀병도 부리고, 또 집을 나가겠다고 떼도 써 본다. 그러나 봉팔이가 교묘하게 꾀고 어르고 해서 '나'는 언제나 지고 만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의 부추김과 점순이의 묘한 반응에 자극을 받은 '나'는 아프다는 핑계로 일을 하지 않는다. 역시 봉필의 공갈과 매질로 이어지지만 '나'도 이번에는 지지 않고 결사적으로 장인의 급소를 붙잡고 늘어진다. 그런데 이 때, 아버지에게 결혼시켜 달라고 요구하도록 부추긴 점순이가 내 편을 들어주지 않고 봉필의 편에 서서 '나'를 비난한다. '나'는 맥이 모두 빠져 봉필의 매질을 그냥 맞고만 있다.
<< 등장인물 >>
* 나: 주인공. 작중 화자. 우직하고 순박한 데릴사위인 머슴. 자신이 처한 현실을 알면서도 거기서 탈피할 수 없는 어리숙한 인물. 정적 인물
* 장인(봉필): 자신의 딸을 미끼로 여러 명의 데릴사위를 번갈아 두고 무보수로 노동력을 착취하는 교활하고 욕심 많은 영감. 배 참봉 댁의 마름으로 있음. 정적 인물
* 점순: 깜찍하고 야무진 성격의 '나'의 배필감. 16세가 되었으나 키가 작다. '나'를 배후에서 조종하지만, '나'의 장인과의 싸움에서는 엉뚱하게 장인 편을 든다.
- 마름이란: 지주로부터 소작지(小作地)의 관리와 감독을 위임받은 사람
마래미라고도 하며, 마름이라는 말은 ‘舍音’에서 음차(音借)된 것이다. 조선 후기에 궁원전(宮院田)과 내장전(內庄田)이 크게 늘어나면서 그 관리를 위하여 두게 된 최하급 장토관리자(莊土管理者)였다. 대개 장토 내의 전호(佃戶) 중에서 선발하는 것이 원칙이고, 1명 혹은 여러 명을 두었다. 자격에는 신분제한이 없었으나, 어느 정도 문필력이 있어야 하였으므로 지방 유지나 중농층 이상의 사람이 많았다. 한 장토 안에 여러 촌락이 있을 때에는 각 촌락마다 마름을 두고 그 위에 도마름[都舍音]을 두었으며, 이들은 부역이나 조세가 면제되었다. 마름을 임명할 때에는 도서첩문(圖書帖文)이 발급되고, 담당지역과 임무가 명시되었다.
마름의 임무는 궁차(宮差)나 도장(導掌)이 소작료를 징수하러 나오면 이를 수합(收合)하여 제공하는 것이 가장 큰 일이었다. 이 밖에도 추수 때의 서역(書役)과 제반 동역(洞役)을 담당하였고, 감관(監官)과 함께 전호(佃戶)를 총괄하였다. 이들의 구실이 컸기 때문에 마름이 중앙에서 파견되었을 경우에는 마름료[舍音料]를 지급하였고, 장토 내의 전호 출신인 경우에는 소작료를 면제해 주었다. 이러한 마름제도는 궁장토에만 있던 것이 아니고, 지주제가 급속히 발전하면서 일반 민전(民田)에도 두게 되었다. 지주가 서울 기타 도시에 거주하거나, 소유 토지가 멀리 떨어져 있는 지주들은 친척이나 심복을 마름으로 하여 소작인을 감독하게 하고, 소작료의 결정 ·징수 ·보관 ·운반 등을 맡겼다.
이러한 권한을 위임받은 마름들은 점차 그 횡포가 심해져 소작료의 중간착복 수단으로 소작인에게서 소작료를 받을 때는 말을 수북이 고봉으로 되는 ‘마당통’으로 받아 이를 지주에게 넘길 때에는 말의 전을 훑어서 되는 ‘가량통’으로 되었다. 궁장토의 마름은 국권피탈과 함께 없어졌으나, 민전의 마름은 일제 강점기에도 계속되다가 8 ·15광복 후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가을
복만이는 어려운 생활로인해 부인을 소장수에게 판다. 그리고 이때 계약서를 내가 써준다. 그런데 팔려간 그 부인이 며칠후 동망가고 복만이도 마을에서 사라지자 소장수는 사라진 부인과 복만이를 찾으러 돌아다닌다. 그러던 중 소장수는 재봉이를 찾아와 행패를 부리며 주재소로 끌고 간다. 그러다 복만이가 덕냉이 큰집에 있을 줄도 모른다는 말에 소장수는 당장 덕냉이 큰집으로 향한다.
산골
산골 마을에 사는 청춘 남녀인 "이뿐이"와 "도련님"은 서로에 대한 사랑을 조심스럽게 키워 나간다.
어느 날 "이뿐이"가 마님의 입맛을 돋울 나물을 캐러 산으로 가는데, "도련님"은 이뿐이에게
딴청을 부리는 듯하면서 관심을 보이며 접근한다. 이뿐이도 그런 도련님이 싫지만은 않다
"이뿐이"는 자신과 도련님의 관계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 챈 마님와 엄마의 주의를 받는다. 어느 날, 이뿐이와 도련님은 또다시 서로 만나다가 마님에게 들켜 이뿐이는 모진 처벌을 당하게된다.
"이뿐이"를 향한 도련님의 구애는 계속되고, 도련님의 집요한 구애가 이뿐이는 싫지 않다. 급기야 도련님은 이뿐이에게 자신이 서울로 공부하러 떠날 계획울 알리고, 함께 도망치지 않겠느냐고 제안하지만 이뿐이가 확고한 답을 하지 못한 채 도련님은 옷고름 한 조각을 믿음의 징표로 남긴 채 예정대로 서울로 떠나고 만다.
이뿐이는 자신에게 마음이 있는 마을 총각 "석숭이"에게, 도련님에게 보낼 편지를 써달라는 부탁을 하게 되고, 석숭이가 편지를 다 써 오자 도련님에게 편지를 전해 줄 우체부가 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린다.
산골 - 인물의 성격
◆ 이뿐이 → 도련님 앞에서는 다소곳하고 고분고분하지만, 석숭이 앞에서는 쌀쌀맞고 당차게 대항하는 인물로, 신분의 장벽을 인식하면서도 신분 상승에 대한 욕구도 함께 지니고 있다
◆ 도련님 → 자신의 감정 표현에 솔직하지만, 다소 현실에 대한 감각이 떨어지며 자신의 말과 행동에 제대로 책임을지지 못하는 무책임한 면모를 지닌다.
◆ 석숭이 → 일편담심 이뿐이만을 바라보는 순수한 인물로, 객관적인 상황 판단이나 상대방의 심리 판단에는 미숙한 어수룩한 인물이다. 작품 전체의 우울하고 어두운 분위기를 밝고 경쾌하게 변화시킨다.
◆ 이뿐이 엄마, 마님 → 전통적인 신분 장벽의 관습에 충실히 따르는 인물

그리고 뭣에 떠다 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푹 파묻혀 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깃한 그 내음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왼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 김유정의<동백꽃>중에서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에 나오는 동백꽃은 남쪽 해안에 피는 상록교목의 붉은 동백꽃이 아니라 생강나무의 꽃이다. 강원도 사람들은 생강나무 꽃을 동백꽃 혹은 산동백이라고 불러왔다.
「정선아리랑」의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너주게 / 싸릿골 올동박이 다 떨어진다’의 올동박이 바로 생강나무 노란 꽃이나 까만 열매를 의미한다. 대중가요「소양강처녀」의 ‘동백꽃 피고 지는 계절이 오면 / 돌아와 주신다고 맹세하고 떠나셨죠’에 나오는 동백꽃도 생강나무 꽃이다.
김유정은 소설에서, 붉은 동백꽃과 구별이라도 하려는 듯이 ‘노란 동백꽃’이라 표현하고 있다. 당시 강원도의 동백꽃이 생강나무라는 것을 알 턱이 없었을 것인데 ‘알싸한’ 그리고 향깃한 그 내음새‘라고 꽃 냄새를 절묘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산수유를 꼭 닮은 생강나무꽃 - 김유정의 소설에서는 '노란동백꽃"으로 묘사된다.
박록주에 대한 구애가 거절당한 데다 연희전문에서 제적까지 당하자 유정은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괴로워하다가 불현듯 고향 춘천의 실레마을로 내려간다. 그가 고향에 내려간 것은 남은 재산을 마지막으로 탕진하고 있는 형을 상대로 한 재산분배를 주장하는 소송을 내기 위한 일도 겸해 있었다. 형에게 병 치료와 생활비를 요구한 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둘째 누이와 함께 동거생활을 하고 있던 매형 정씨의 꾐으로 그런 일을 벌였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김유정이 고향산천을 찾아 돌아왔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항상 잊지 못하고 살아온 고향의 산골 정취가 다분히 감상적인 그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또한 김유정은 고향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그 시대 농촌사람들과 만나게 된다.
가난하지만 순박한 그네들의 삶을 통해 그는 구원받는 느낌이었다. 학교에서 제적당한 울분이나 박록주로 인한 마음의 상처가 시골 농민들의 가난한 생활을 바라보면서 어느 정도 가셔졌던 것이다.
박록주에게 열중했던 것처럼 그는 고향에서 자기 자신을 다 던져도 좋을 그런 신명나는 일을 찾고 있었다. 그는 금병산을 오르내리며 봄이면 잎이 나기 전 노랗게 피어나는 동백꽃(생강나무꽃) 향기에 취했으며 마을 사람들을 만날 때면 그네들의 투박한 강원도 사투리 속에 깃든 원초적인 인간미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그네들과 한 덩어리가 되어 어울리고 싶었다.
그러나 김유정이 고향 마을에서 가장 정을 많이 준 사람들은 역시 자기보다 연상인 들병장수 여자들이었다. 박록주에 대한 미련이 여기저기 짚시처럼 떠돌며 술을 파는 들병이로 옮겨진 것이다. 들병이가 등장하는 작품 『솥』, 『산골 나그네』, 『총각과 맹꽁이』등은 거의 실화에 가깝다는 것이 뒷날 확인되었다. 들병이들을 찾아다니면 거의 매일 마시는 술로 치질이 더욱 악화되는 가운데 늑막염까지 겹쳐 건강은 매우 좋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김유정은 고향집 언덕받이에 움막을 파고 한때 자기네 마름집 아들인 조명희, 조카 영수 등과 뜻을 맞춰 동아일보의 농촌계몽운동 교육교재로 야학을 열었다.
김유정은 대학 공부에 대한 미련을 안고 다음 해(1931년) 봄, 다시 상경하여 보성전문(普成專門)에 입학했으나 그곳에서도 곧바로 퇴학한 것으로 전해진다.
다시 실의에 빠진 유정은 매형 정씨의 주선으로 병 휴양 차 충청도의 어느 광업소 현장감독으로 내려갔으나 광부들과 어울려 매일 술만 먹게 되어 결국 건강만 더 망친 상태로 서너 달 만에 다시 고향 실레마을로 돌아오게 된다. 광업소에 있던 경험을 살린 작품으로 『금』이 있다.
고향에 다시 돌아온 김유정은 먼저와는 딴판으로 사람이 달라져 야학 일에 열중하면서 마을 청년들을 모아 농우회와 부인회 등을 조직해 본격적인 농촌계몽운동을 벌인다.
거룩하도다 우리 집 농우회/손에 손잡고 장벽 굳게 모이었네
흙은 주인을 기다린다/나서라 호미를 들고
지난 엿새 동안에 힘 다해 공부하고/
오늘 일요일 또 합하니 즐거워라
삼삼오오 작반하야 교외 산보를 나가/
산수좋은 곳을 찾아 시원히 씻어보세.
* 당시 실레마을에서 불려진 농우회가
그 농우회를 금병의숙(錦屛義塾)으로 개칭하여 2년제 간이학교로 인가를 받은 뒤 학생들을 모아 가르쳤는데 그때의 금병의숙 앞에는 유정의 뜻을 기리는 「김유정기적비」(김동리 휘호)와 느티나무가 서 있다.


김유정이 고향 마을에 머물었던 기간은 1930년부터 1932년까지 불과 1년 7개월 정도밖에 안 되지만 박록주를 향했던 그 병적 열정이 탈바꿈되어 새로운 길을 찾음으로써 어느 정도 마음의 안정을 얻는다.
그러나 김유정은 고향 마을에서 가끔 싸움판을 벌였다. 인근부락 청년들이 볼 때 서울에서 내려와 농민회니 부녀회니 만들어 놓고 꺼덕이는 꼴이 아니꼬워 시비를 걸어왔기 때문이다. 김유정은 싸움만 붙으면 야학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이 범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고 싶어 했다. 비교적 건장한 덩치와는 달리 병으로 쇠약해가는 자신의 건강에 대한 불만이기도 했을 것이다. 증리에 살고 있는 당시의 제자들에 의하면 김유정은 싸움만 붙으면 몹시 날래게 움직여 수십 명을 상대해 쫓아버렸다고 한다.
어떻든 김유정은 실레마을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농촌 청년들을 깨우치는 일에 어느 정도 신명을 낸 것은 사실이지만 뭔가 그 일이 자기에게 걸맞지 않는다는 생각에 시달린다. 그가 들병이를 찾는 것도 그렇게 가슴이 허망하게 비어드는 시간이었다.
어느 날 그는 팔미천에서 목욕을 하고 돌아오다가 길가 오막살이 돌쇠네 집에 들러 돌쇠 어멈으로부터 그 집에 며칠 머물다 도망친 어떤 들병이 여자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것이 그의 처녀작이 된 『산골 나그네』인 것이다.
그리고 실레 마을에 딸만 여럿 낳아 데릴사위를 들여 부려먹으며 욕을 잘하는 박봉필이란 사람을 관심깊이 살펴보곤 했다. 나중에 그 실제의 인물을 모델로 쓴 작품이 바로 『봄?봄』이다.
『총각과 맹꽁이』『소낙비』『노다지』『산골』『동백꽃』『만무방』『금따는콩밭』
『안해』『가을』『두포전』 등이 모두 고향 마을을 배경으로 쓰여진 것들이다.
김유정 연보
1908년 2월 12일(음력 1월 11일) 강원도 춘천부(春川府) 남내이작면(南內二作面) 증리(甑里-실레) 427번지, 지금의 강원도 춘천시 신동면 증리에서 부친 김춘식(金春植) 모친 청송(靑松) 심씨의 2남 6녀 중 일곱째이자 차남으로 출생, 10대조 김육(金堉)은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한 실학(實學)의 선구자였으며, 9대조 김우명(金佑明)은 현종(顯宗)의 국구(國舅-임금의 장인)였고 숙종(肅宗)의 외할아버지였다.
고조부 김기순(金基恂) 때 춘천 실레마을로 이주했다. 증조부 김병선(金秉善)은 실레마을에
화서학파(華西學派)의 거유(巨儒)인 김평묵(金平默)을 초빙, 학당(學堂)을 열고 자제들을
교육케 했다. 화서학파의 위정척사(衛正斥邪) 학풍(學風)을 이어받은 조부 김익찬(金益贊)
은 춘천 의병(義兵) 봉기의 배후 인물로 재정 지원을 했다.
조부때 6천석 추수를 하는 춘천의 명가(名家)가 되었다. 음직(蔭職)으로 도사(都事)벼슬.
김유정이 탄생하는 그해에 춘천의 2차 의병봉기로 정미의병(丁未義兵)의 기세가 드높았다.
1914년 11월 26일 유정의 조부 도사(都事)벼슬을 했던 김익찬(金益贊)사망.
이때부터 부친 김춘식(金春植)을 참봉으로 호칭. 이해 겨울에 한양(漢陽-지금 서울)의 종로구 운니동(당시 진골)에 대저택을 마련, 가족이사. 춘천에 집을 그냥두고 소작농으로 하여금 농사를 짓게 함.
1915년 7세. 3월 18일 어머니 청송 심씨 사망. 춘천에 내려갔던 형 유근(裕近)이 미처 오지 못하자 홀로 상주가 됨.
1917년 9세. 5월 23일 아버지 김춘식 사망. 고아가 됨. 형님과 형수 누님의 사랑을 받음. 운니동(雲泥洞)에서 관철동(貫鐵洞)으로 이사. 1919년 봄까지 3년 동안 한문 공부와 붓글씨를 익힘. 김유정 작품에 나타나는 동양 고전지식은 이때 익힘.
1920년 12세. 재동공립보통학교(齋洞公立普通學校)에 입학. 재동공립보통학교가 있던 지역은
당시 우리나라 정치, 경제, 문화, 사회의 중심지
1921년 13세. 3학년으로 월반
1923년 15세. 재동공립보통학교 4년 (제16회)졸업. 4월 9일 휘문고등보통학교(徽文高等普
通學校)를 검정(檢定)으로 입학. 숭인동(崇仁洞) 80번지로 이사. 학적부에는 가족 11명,
형제 2명, 재산 5만원 성질을 질박, 키는 5척. 이름을 김나이(金羅伊)로 고쳐 집에서 부름.
소설가가 된 안회남(安懷南)과 같은 반으로 각별히 친하게 지냄.
1926년 18세. 휘문고보 3학년을 마치고 휴학
1927년 19세. 휘문고보 4학년에 복학
1928년 20세. 형 유근가족 춘천 실레로 이사. 유정은 봉익동 삼촌집에 얹혀 지냄. 인간문화재
박녹주(朴綠珠) 공연을 처음 관람
1929년 21세 .휘문고보 5년 졸업(제 21회). 삼촌댁에서 사직동 둘째 누님 유형(裕瀅)집으로 거처를 옮김(누님은 이혼 후 양복공장 근무)
1930년 22세.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交) 문과에 입학하였으나 6월 24일 학칙 제 26조에
의거, 제명처분 당함. 유정은 더 배울 것이 없다고 자퇴했다고 함.
박녹주를 짝사랑했으나 끝내 거절당함. 춘천 실레에 내려와 방랑생활. 들병이와 친해짐.
늑막염 재발. 안회남의 권고로 소설을 씀
1931년 23세. 4월 20일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상과에 다시 입학. 그 후 자퇴함.
(퇴학자 명단에만 있을 뿐 상세한 기록은 없음). 실레 마을에 야학당(夜學堂)을 열다.
농우회, 노인회, 부인회 조직. 농우가(農友歌) 지어 부름
1932년 24세. 야학당을 금병의숙(錦屛義塾)으로 넓히고 간이학교로 인가받음. 느티나무
를 식목함. 6월 15일 처녀작 단편 <심청>을 탈고(4년 뒤인 1936년 중앙지에 발표).
1933년 25세. 서울에 올라와 사직동에서 누님과 함께 기거. 폐결핵 발병진단.
1월 13일 <산골 나그네> 탈고, 안회남의 주선으로 제1선지 3월호에 발표.
8월 6일 <총각과 맹꽁이>를 탈고, 신여성 9월호에 발표.
공식적으로 발표된 작품으로 쳐서 처녀작은 <산골 나그네>가 됨.
사직동 시대 유정은 톨스토이가 되고자 함. 이석훈(李石薰), 채만식(蔡萬植),
박태원(朴泰遠), 이상(李箱) 등을 만남.
1934년 26세. 누님이 사직동 집을 처분. 혜화동 개천가에 셋방을 얻어 밥장사.
충남 예산 등지의 금광을 전전함
8월 16일 <정분> 탈고. 9월 10일 <만무방> 탈고. 12월 10일<애기> 탈고. <노다지><소낙비>를 12월에 탈고. (1933년의 <따라지의 목숨>을 1934년 <흙을 등지고>로 개작, 신문사와 협의 <소낙비>가 됨) 안회남이 대신 신춘문예 응모작으로 부침.
1935년 27세. 조선일보 신춘문예 현상모집에 <소낙비>1등 당선. 조선중앙일보 신춘문예 현상모집에 <노다지>가작 입선. 1월 20일 아서원서 신춘문예현상 1등 당선 축하회. 6월 3일 백합원서 조선문단사가 주최한 문예좌담회에 참석. 김유정은 안회남(安懷南), 김남천(金南天), 이학인(李學仁), 박영호(朴英鎬), 이선희(李善熙), 함대훈(咸大勳), 이헌구(李軒求), 이석훈(李石熏), 김환태(金煥泰), 이무영(李無影), 한인택(韓仁澤), 서항석(徐恒錫), 정지용(鄭芝溶), 김희규(金憘奎), 이하윤(異河潤), 김광섭(金珖燮), 방인근(方仁根), 최정오(崔定吾) 와 함께 연회에도 참석했다.
단편 <금따는 콩밭>, <개벽> 3월호, <금>발표지 미상, 1월 10일 탈고, <떡>중앙 6월호,<만무방> 조선일보 7월, <산골>조선문단 7월호, <솟>매일신보 9월, <정분>의개고작, <봄·봄>조광 12월호 등을 발표한다. 이 한해에 소설 9편과 수필 <잎이 푸르러 가시든 님이>조선 중앙일보 3월 6일, <조선의 집시-들병이 철학>매신일보 10월, <나와 귀뚜라미> 조광 11월호 등, 3편을 발표, 6월 3일 <조선문단>이 주최한 문예좌담회에서 이태준(李泰俊)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임.
구인회(九人會) 후기 동인으로 참여. 이상과 깊은 친분을 가짐.
<안해>를 사해공론(四海公論) 12월호에 발표하여 문단의 찬사를 받음
1936년 1월부터 8월까지 9편의 소설과 4편의 수필을 발표.
단편<심청>중앙1월호, <봄과 따라지>신인문학 1월호, <가을>사해공론1월호,<두꺼비>시와소설, <봄밤>여성 4월호, <이런 음악회>중앙 4월호, <동백꽃>조광5월호, <야앵>조광7월호, <옥토끼>여성7월호 가 각각 발표됨. 미완의 장편소설 <생의 반려>는 중앙 8,9월호에 연재됨.
수필<오월의 산골짜기>, <어떠한 부인을 마지할까>, <전차가 희극을 낳아>, <길>등을 5월에서 8월 사이에 발표하고 <행복을 등진 정열>은 여성지 10월호에, <밤이 조금만 짤렀드면>은 조광지 11월호에 발표.단편소설 <정조>는 조광지 10월호에, <슬픈이야기>는 여성지 12월호에 발표, 마지막 여인 박봉자를 짝사랑 하였다.
병이 깊어져 김문집이 병고작가 구조운동을 벌임.
1937년.
서간문 <문단에 올리는 말씀>을 조선문학 1월호에 게재.
수필 <강원도 여성편>여성 1월호, <병상 영춘기>조선일보 1월 29일∼2월 2일 발표.
2월 조카 진수에 의지하여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상산곡리 100번지의 매형 유세준의 집에 옮겨와
요양 치료함.소설 <따라지>조광 2월호, <땡볕>여성 2월호, <연기>창공 3월호 발표.
서간문<병상의 생각>을 조광지 3월호에 발표하고, 세상뜨기 11일 전인 3월 18일 <필승전>으로
되어 있는 마지막 편지를 안회남에게 보냄.
3월 29일 오전 6시 30분에 30세의 나이를 다 채우지 못하고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상산곡리
100번지 매형 유세준의 집에서 사망함. 서대문 밖(홍제동 화장터)에서 화장되어 유해는 한강에 뿌려짐.
이 해의 사후 발표작으로 수필 <네가 봄이런가>여성 4월호, 단편소설 <정분>조광5월호,
번역동화 <귀여운 소녀>매일신보 4월 16일∼21일, 번역 탐정소설 <잃어진 보석>조광 6월∼11월호 발표됨
1938년 단편집 <동백꽃>(三文社) 발간됨
1939년 사후 발표된 소설로 <두포전> 소년1∼5월호, <형>광업조선 11월호, <애기>문장12월호가 있다.
미친 사랑의 노래
그리고 그 품에 안기어 저의 기운이 다 할 때까지 한껏 울어보고 싶사외다.......
-미완성 장편소설 '생의 반려' 중에서
김유정이 일곱 살이 되던 해, 어머니를 여읜 슬픔은 그의 자전적 소설 '생의 반려' 속에 잘 나타난다. 매일매일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살던 김유정은 휘문고보를 졸업하던 해에 어머니를 닮은 한 여자를 만난다. 그가 바로 김유정의 첫사랑 박녹주이다. 그때부터 김유정은 박녹주에게 2년여 동안 광적인 구애를 했으나, 그의 애절한 마음은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당대의 유명한 명창이자 기생이었던 박녹주가 네 살 연하의 김유정의 마음을 알아줄 리 없었다.
......어디 사람이 동이 낫다구 거리에서 한번 흘낏 스쳐본, 그나마 잘 낫으면 이어니와, 쭈그렁 밤송이같은 기생에게 정신이 팔린 나도 나렷다. 그럿두 서루 눈이 맞아서 달떳다면야 누가 뭐래랴 마는 저쪽에선 나의 존재를 그리 대단히 너겨주지 않으려는데 나만 몸이 달아서 답장 못받는 엽서를 매일같이 석달동안 썼다....... -소설 '두꺼비' 중에서
그래도 김유정은 끊임없이 "벌거숭이 알몸으로 가시밭에 둥그러저 그님 한 번 보고지고"를 외쳤다.
우리는 구인회 동인지 [시와 소설]속에 실렸던 소설 '두꺼비'를 통해 김유정과 박녹주의 그런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박녹주와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자, 김유정은 실의에 빠지게 되고, 고향인 춘천 실레마을로 돌아오게 된다. 이산 저산이 어머니 품처럼 포근히 마을을 감싸고 있는 고향마을에서 김유정은 마음의 안정을 찾게 된다.
고향에서도 김유정은 나이 많은 들병이들과 같이 어울리며, 마을 사람들과 정을 나눈다.
이런 것들이 바탕이 되어 '봄봄', '솥', '산골나그네', '총각과 맹꽁이'등 12편의 작품이 고향을 배경으로 쓰여졌다.
김유정의 여인들
박녹주
1906.2.15~1979.5.26 판소리 명창. 본명 명이(命伊). 경북 선산(善山)출생.
12세 때 박기홍(朴基洪)에게 소리를 배우기 시작하고 뒤에 송만갑(宋萬甲),
정정렬(丁貞烈), 유성준(劉成俊), 김정문(金正文) 등에게 배웠다.
1937년 창극좌(唱劇座)에 입단하였으며, 1945년에는 '여성국악동호회'를 조직하여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64년 중요 무형문화재 제5호인 판소리<춘향가>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가,
1970년 <흥부가>의 예능보유자로 변경, 지정되었다.
박봉자
시인. 박용철의 동생이다. 잡지 <조광>에 '사랑의 편지'란 공동 제목으로 김유정과 나란히 글이 실린 것이 인연이 되어 김유정으로부터 30여 통의 편지를 받았으나 답장은 일절 없었다. 차후 김유정과도 알고 지내던 평론가 김환태와 결혼하여 김유정을 또 한 번 좌절케 했다.
| ||||||||||
| ||||||||||
| ||||||||||
| ||||||||||
| ||||||||||
| ||||||||||
|
|
| |||||||||||||||||||||||||||||||||||||||||||||||||||||||||||||||||||||||||||||||||||||||||||
|
- 16797 휘문64회 이동화 2013년도 하계야유회 및 64회 합동 환갑자축연 안내 2013-05-16
- 16796 휘문60회 나영길 오래된 청춘 2013-05-16
- 16795 휘문60회 나영길 추억의 옛풍경 2013-05-16
- 16794 휘문60회 나영길 섹소폰 연주모음 480곡 2013-05-16
- 16793 휘문70회 임두묵 투 언더 5월 행사 2013-05-16
- 16792 휘문55회 안용진 [Slide Show] 휘문고 졸업 50주년 기념 사진 스라이드 (53분2... 2013-05-15
- 16791 휘문64회 이동화 교우들 동정 2013-05-15
- 16790 휘문60회 나영길 추억의 영화 15편 2013-05-15
- 16789 휘문70회 김근석 경기 남부 모임 결과 2013-05-15
- 16788 휘선회 이순실 김유정의 작품세계 2013-05-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