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kbs.co.kr/1tv/sisa/wedplan/vod/1421977_1068.html
가객(歌客) 배 호
■ 방송일시 : 2006. 11. 1(수) 밤 11시 40분 1TV
■ 프로듀서 : 조인석
■ 연 출 : <봄 저너머> 이창준
<기획의도>
1967년 3월 장충동 녹음실.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한 가수가 힘겹게 녹음을 하고 있었다.
그는 당시 신장염 투병 중이었다.
한 소절 부르고는 의자에 주저앉고 다시 일어서 한 소절 부르고...
한 시간 여 만에 힘겨운 녹음을 마치고 어머니의 부축을 받으며 녹음실을 빠져나간 그 사람.
가수 배호다.
이 날 녹음된 곡은 <돌아가는 삼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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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년의 짧은 생을 살다간 가수 배호. (1971년 11월 7일 타계)
그러나 그의 노래는 35년이 지난 오늘까지 우리들 가슴에 남아있다.
이제 낡은 LP디스크 한 장이 세월의 더께를 걷어내고 오래토록 참아왔던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그 목소리에 담긴 가객의 회한과 가락에 실린 그 시절의 자화상,
그리고 그에게 소리 없이 빚져온 우리 노래의 역사까지...
<주요내용>
1. 1960년대 후반을 풍미한 가수 배호
가수 배호는 60년대 후반 이미자, 최희준 등과 함께 최고의 인기를 누린 가수다.
당시 배호는 독특한 창법, 중절모와 안경을 쓴 특이한 외모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1971년 11월 7일 신장염으로 사망한 후 35년이 지난 지금도 그는 우리
가슴속에 남아있다. 2000년에는 대중가수 최초로 그의 이름을 딴 행정도로가
용산 삼각지에 생겼으며, 2003년에는 정부에서 옥관문화훈장을 추서했고,
올해엔 미발표곡까지 포함된 전집앨범이 10장의 CD로 나왔다.
배호와 이미자 배호와 문희
2. 배호의 창법 분석
1960년대는 한국 대중음악의 부흥기로 기존의 남인수등 전통방식의 트로트에서부터
패티김, 최희준 등의 스탠다드 팝에 기반을 둔 노래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배호는 전통과 현대 음악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을 이루며 그 자신만의 창법으로
대중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것이다.
배호 창법의 바탕에는 나름의 음악적 배경이 있었다.
배호의 외삼촌인 김광수, 김광빈은 KBS와 MBC악단장을 역임하고 서울음대 교수로
재직했던 당대 최고의 음악가들이었고 그들에게 음악수업을 받은 배호는 그 자신이
드러머이면서 12인조 악단을 이끌던 밴드마스터였던 것이다.
그의 창법은 충실한 음악수업과 드러머의 정확한 리듬감을 바탕으로 창조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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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호 외숙모 안마미 외삼촌 김광빈 배호와 그 악단 시절 |
가요사에 한 획을 그은 배호 창법의 인기는 배일호, 신행일 등 수많은 모창가수들의
등장으로 다시 한번 확인된다. 특히 신행일씨의 경우 가짜음반 소동이 벌어졌을 만큼
배호의 노래를 유사하게 모창하는데, 제작진은 숭실대 소리공학연구소의 도움으로
배호와 신행일의 창법을 비교하고,
모창으로는 재현할 수 없는 배호 목소리의 숨은 비밀을 밝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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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실대 배명진교수와 작곡가 김기웅 모창가수와 배호의 음원분석장면 |
3. 29년 짧은 생을 살다간 배호의 가수혼
배호가 <돌아가는 삼각지>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것은 1967년.
그러나 배호는 1966년 이미 당시로는 불치의 병이었던 신장염으로 투병 중이었다.
1971년 그가 사망하기까지 그가 취입한 곡은 무려 200여곡, 동료의 부축을 받아야
무대에 설 수 있었던 그가 항상 하던 말은 “죽어도 무대에서 죽겠다”였다.
숨쉬기조차 힘든 고통 속에서도 무대에 올라 노래했던 그의 가수혼을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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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상에서 노래연습중인 배호 동료의 부축을 받으며 노래하는 배호 |
4. 프로그램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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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떠난 지 수십 년이 흐른 지금, 왜 배호를 돌아보려 했을까.
지금도 그는 우리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죽은 지 35년이 지났는데도 한국인의 애창가요 다수가 그의 노래이고
300여개가 넘는 팬클럽이 사이버 공간을 채우고 있으며,
아직도 그의 목소리를 흉내 낸 가짜 배호가 떠돌고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스타들이 탄생했다가 사라지는 지금,
사후 35년인 지금에도 배호의 노래는 왜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 것일까.
우리는 왜 그를 떠나보내지 않는 것일까.
안개속으로 가버린 사랑
돌아가는 삼각지
안개낀 장충단 공원
누가 울어
비내리는 명동거리
마지막 잎새
파도
두메산골
영시의 이별
당신
막차로 떠난 여자
배호노래 모음 18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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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는 천재가수다, 매혹의 저음 가수다, 라고 말합니다.
왜, 우리는 그를 못잊어 하고 있고, 또한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는 그의 이름이 회자되고 있는가?
그는 어떠한 가수였는가?
여기에 그의 못다 이룬 음악세계 모든 것을 실어 많은 분들과 함께 그의 음악 인생을 정리해 봅니다.
해방과 함께 서울로 돌아 온 그는 창신 초등학교를 거치고 독립 운동가로 활동하고 해방후 방황하던 부친의 타계로 인한 삶의 어려움으로 부산으로 내려와 그곳에서 모자원을 운영하던 이모님의 가족과 함께 생활하며 삼성중학을 다니다, 음악에 대한 끼를 버리지 못해서 중학을 중퇴하고 서울로 올라갑니다.
당시 서울에는 국내 악단계를 주름잡고 있던 셋째 외삼촌인 김광수 악단이 KBS등 주요 악단을 도 맡아 있었으며, 또한 넷째 외삼촌인 김광빈 악단도 가족 악단으로 구성되어 업소와 문화방송 초대악단으로 활동하며
이들 형제 악단이 장안을 휩쓸고 있었습니다.
또한 넷째 외삼촌인 김광빈은 중국 제남에서 배호 가족과 함께 생활하며 음대를 졸업하고 국내로 들어온 후 역시 자신의 가족으로 구성된 악단을 운영, 자신과 그의 처(안마미), 조카(배호), 처남(안건마-김정호/어니언스등 음악지도), 처제(안미미,안로미)들로 구성하여 서울 장안의 여러 업소와 문화방송 초대악단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는 아코디언 주자로 탱고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천재적인 음악성을 담고 있으며 유명한 "사랑의 배신자"등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애띤 그의 목소리에서 가수로써의 이름을 알리지는 못하였고 그는 김광빈의 도움으로 20대 초반에 자신의 악단인 "배호와 그악단"이라는 악단을 만들어 업소에서 본격적인 자신의 음악을 키워가게 됩니다.
그 때쯤 김광빈은 그 에게 본격 데뷔 음반을 낼 수 있도록 자신이 만들고 연주한 "두메 산골" "굿바이" "차디찬 키쓰" "녹색의 장미" "사랑의 마술사" "그대만이" 등 6곡을 발표하게 합니다.(1964년-22세)
그러나 막 알려져가는 그에게 무리한 활동이 원인이었을까? 그는 당시 불치의 병인 신장염을 얻게 됩니다.
아직 건강했을 때 방송을 타기 시작한 그의 다음 노래들(황금의 눈,등)은 본격 투병과 함께 묻혀지고, 병상에서 발표한 그외 곡들도 크게 알려지지 못한 채 음반사 창고에서 머물게 됩니다.
돌아가는 삼각지"는 그의 숨에 찬 목소리에 이내 세간의 화제가 되면서 방송사의 인기와 팬들의 성원이 이어져 이내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지는 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25세)
내 놓는 곡마다 히트하면서 평균 일주일에 한 곡씩을 내놓게 되는데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활동기간 5년동안 상당기간을 투병 중에서 보냈기에 가끔 있었던 녹음에서는 하루에 몇 곡씩을 녹음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렇게 힘들 게 이어져 오던 삶이 운명의 장난인가, 노랫말처럼 "마지막 잎새"를 유작으로 남긴 그는 이제 떠나야 할 때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1971년 11월 7일 "팬 여러분 고맙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틀린 것 같습니다"라는 말을 끝으로 그는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