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밀꽃 필 무렵… 구름 속 배추들도 아삭아삭 익어간다
2012.8.31
‘효석문학 100리길’ 봉평∼평창을 걷다
‘구름 위의 배추밭’ 안반데기. 강원 평창과 강릉 사이 해발 1100m 고지에 푸른 바다처럼 펼쳐져 있다. 배추 살이 통통하게 올랐다. 푸른 잎사귀의 기운이 성성하다. 이제 곧 수확할 때다. 가을이다. 바람이 서늘하다. 물안개가 스멀스멀 밑도 끝도 없이 떠돈다. ‘아, 그러나 시방 우리는/각각 홀로 있다./홀로 있다는 것은/멀리서 혼자 바라만 본다는 것/허공을 지키는 빈 가지처럼...//가을은/멀리 있는 것이 아름다운/계절이다.’(오세영의 ‘가을에’에서). 배추밭둑엔 보랏빛 쑥부쟁이가 지천이다. 노란 달맞이꽃이 건들거리며 떼로 서 있다. 푸른 달개비꽃이 요염하다. 저 멀리 산등성이 위엔 하얀 양떼구름이 아득하다. 평창=서영수 전문 기자 kuki@donga.com
《‘이지러는 졌으나 보름을 갓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뭇이 흘리고 있었다. 대화까지는 팔십 리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이효석(1907∼1942)의 ‘메밀꽃 필 무렵’에서》
하얀 메밀꽃이 하나둘 피고 있는 평창 봉평 산자락.
하얀 메밀꽃이 피었다. 산허리의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힌다. 메밀의 붉은 대궁이 이슬에 젖어 항라 적삼처럼 아슴아슴하다. 메밀꽃은 아직 일러 자잘하다. 우우우 떼로 피려면 열흘쯤 더 있어야 한다. 그래도 제법 풋풋한 향기가 알싸하다.
강원 평창 봉평에 가을이 왔다.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선선하다. 살갗에 ‘연한 소름’이 돋는다. 매미소리가 잦아들면서 “찌르르∼” 여치 울음소리가 저릿하다. 산허리엔 드문드문 싸락눈이 온 듯 희끗희끗하다. 껑충 큰 노란 마타리꽃이 불쑥불쑥 고개를 주억거린다. 건들건들 억새가 바람에 흔들린다. 햐얀 개망초꽃과 노란 달맞이꽃이 지천으로 깔깔댄다. 물봉선이 오종종 모여 수줍게 고개를 숙이고 있다. 보랏빛 쑥부쟁이는 이미 기세등등하게 활짝 피었다.
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서, 장돌뱅이 허생원은 봉평 흥정천을 따라 밤길을 걸었다. 흥정천 물은 차고 맑다. 쫄쫄! 물소리가 아늑하다. 같은 또래 조선달과 아들뻘인 동이는 말이 없다. 보름을 갓 지난 달빛은 우윳빛처럼 부드럽게 흠뻑 쏟아져 내린다. “딸랑딸랑!” 발에 밟히는 늙은 나귀의 방울소리가 애잔하다. 봉평에서 장평을 거쳐 대화까지는 무려 팔십 리(32km) 길. 지금은 곧게 펴진 아스팔트길로 15km에 불과하지만, 강과 산을 끼고 도는 길은 예나 지금이나 구불구불 서두름이 없다.
‘효석문학 100리길’은 봉평에서 평창까지의 49.2km에 이르는 길이다. 모두 5개 코스 중 제1구간(7.8km)만 길이 열렸다. 봉평관광안내센터∼메밀밭∼흥정천교∼강변집 앞길∼백옥포마을∼금당계곡로∼노루목고개∼용평여울목까지 이효석의 체취가 가장 많이 묻어 있는 곳이다. 느릿느릿 걸어도 2시간 30분 정도면 걸을 수 있다. 허생원과 성씨 처녀의 사랑이 깃든 물레방앗간과 흐드러진 메밀꽃밭을 만날 수 있다.
이효석은 봉평에서 태어나 어릴 적 서당에 다녔지만 초등학교는 당시 대처인 평창에서 마쳤다(1914∼1920년). 아마도 평창에서 하숙 생활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일요일이나 방학 땐 장돌뱅이 허생원이 다녔던, 그 길을 따라 평창∼봉평을 오갔을 것이다. 대화는 바로 봉평과 평창 사이에 있다.
메밀은 강인하다.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란다. 건조한 곳에서도 굳건하게 뿌리를 내린다. 갈색 메밀은 작고 세모졌다. 단단하고 서늘하다. 속이 뜨거운 사람에게 안성맞춤이다. 하지만 찬 음식에 약한 사람은 배탈이 날 수 있다. 메밀국수는 들큼 텁텁하다. 오래된 친구처럼 담담하다.
춘천막국수나 평창 봉평 메밀국수나 그게 그거다. 서울에서 ‘국수’라고 하고, 안동에서 ‘국시’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차이라면 국물이 좀 다르다는 것 정도다. 봉평은 동치미에 과일 채소 국물 등을 많이 넣는다.
‘내 마음 지쳐 시들 때
호젓이 찾아가는 메밀꽃밭
슴슴한 눈물도 씻어 내리고
달빛 요염한 정령들이 더운 피의 심장도
말갛게 심어준다.
그냥 형체도 모양도 없이
산비탈에 엎질러져서
둥둥 떠내려 오는 소금밭
아리도록 저린 향내
먼산 처마끝 등불도 쇠소리를 내며
흐르는 소리’
-송수권의 ‘메밀꽃밭’
평창은 여름이 거의 없다. 해발 700m가 넘는 곳이 62.5%나 된다. ‘하늘이 낮아 고개 위가 겨우 석 자’(정도전)라는 말이 실감난다. 평창읍은 평창강이 휘돌아나가는 물돌이 동네다. 마치 평창강이 평창읍내를 으스러지게 껴안고 있는 듯하다. 장암산(836m) 패러글라이딩 활공장에 가면 발아래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푸른 하늘 아래 푸른 산과 푸른 물이 어우러져 ‘아라리∼아라리∼’ 돌고 돌아간다. 뭉게구름 너머 앞산이 첩첩하고 뒷산도 아득하다.
▼고랭지 배추밭 ‘안반데기’… 해발 1100m에 안반처럼 평평한 둔덕이 198만m²▼
강원 산간지역 경작지는 거의 쪼가리 밭이다. 한마디로 ‘높드리’라고 할 수 있다. ‘높드리’는 ‘높은 산꼭대기에 있는 뙈기밭’을 이르는 순수한 우리말. 산허리나 산등성이에 듬성듬성 조각보처럼 놓여 있다. 그 크기도 들판에서처럼 ‘100평 200평…’식으로 세지 않는다. 보통 ‘가리’나 ‘둔(屯)’을 쓴다.
‘가리’는 골짜기 곳곳에 ‘밭갈이할 만한 땅’을 말한다. 가령 ‘아침가리’란 아침햇살이 잠깐 비칠 때 부쳐 먹을 만한 땅이다. 한자로는 ‘朝耕洞(조경동)’이라고 한다. 연가리는 옛날 담배농사(연초)를 많이 했던 밭이다. 적가리는 가을에 단풍이 붉게 드는 곳. 보름가리는 보름은 갈아야 하는 넓은 땅이다. 인제 4가리가 유명하다. 아침가리, 연가리, 적가리(곁가리·방태산휴양림 자리), 명지가리가 바로 그곳이다.
둔(屯)은 사람들이 모여 살 만한 산기슭의 평평한 둔덕을 말한다. 홍천군 내면 쪽에는 3둔이 있다. 살둔(생둔), 월둔, 달둔이 그렇다.
대관령 일대엔 고랭지 배추밭이 유명하다. 해발 1000m가 넘는 고원의 ‘구름 위에 떠있는 배추밭’이다. 원래 자갈만 있던 둔덕을 사람들이 피와 땀으로 일군 곳이다. 아직도 일부 뙈기밭은 소로 밭갈이를 해야 한다. 안반데기, 육백마지기, 귀네미 등 이름도 재밌다. 이 중 안반데기는 해발 1100m의 높은 곳에 198만 m²(약 60만 평)의 너른 배추밭이 장관이다. 1965년 화전민들에게 국유지를 개간하게 한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 현재는 20여 농가가 살고 있다. 고루포기산(1238m) 일대에 남북으로 독수리날개처럼 펼쳐졌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해돋이도 황홀하다.033-655-5119
‘안반’은 떡메로 떡을 칠 때 밑에 받치는 안반을 말한다. 땅이 평평해서 붙은 이름이다. ‘데기’는 둔덕의 ‘덕’을 말하는 사투리다. ‘안반처럼 평평한 둔덕’이라는 뜻이다. 안반데기의 행정구역은 강릉시 왕산면에 속하지만 그 너머는 바로 평창군이다. 서울에서 승용차로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갈 때도 평창 쪽으로 가는 게 편리하다. 횡계나들목∼용평리조트 방면∼리조트입구 삼거리에서 도암댐 방면 직진∼도암댐 못 미쳐 왼쪽 고갯길로 가면 된다. 아스팔트길이라 일반 승용차로도 너끈하게 올라갈 수 있다.
육백마지기는 평창 미탄면 청옥산(1256m) 정상 부근에 있다. 말 그대로 육백마지기(약 12만 평)쯤 되는 널찍한 배추밭이다. ‘볍씨 육백 말(斗)을 뿌릴 수 있는 곳’이란 설도 있다. 안반데기보다 돌이 더 많고 오르는 길도 험하다. 이곳도 1960년대 개간했다.
태백 귀네미 마을은 1980년대 삼척댐공사로 발생한 수몰민들이 집단 이주해 일군 땅이다. 65만3000m²(약 19만7000평) 넓이.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의 모습이 ‘소의 귀’를 닮아 ‘귀네미’라고 부른다. 배추밭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보는 동해 해돋이도 소문났다. 이 밖에 함백산 너머 태백 매봉산(1303m) 북쪽 기슭의 고랭지배추밭 132만 m²(약 40만 평)도 빼놓을 수 없다. 하얀 풍력발전기와 푸른 배추밭의 어우러짐이 볼만하다.
배추는 섭씨 20도 이하의 선선한 날씨에 밤낮 기온 차가 커야 맛있다. 고랭지배추가 아삭아삭하고 단 이유다. 고랭지배추는 노란 속잎이 꽉 찬 결구배추다. 1800년대 중반 외국에서 들여온 것이다. 잎이 벌어져 푸른 잎사귀만 있는 것은 토종배추다. 고랭지배추는 5월 중순께 모종을 심어 2개월쯤이면 다 자란다. 8월 말부터 본격적으로 거둬들이기 시작한다. 요즘이 넓은 고랭지 배추밭을 볼 수 있는 끝물 기회인 셈이다.
▼9월 7일부터 ‘효석 문화제’▼

봉평의 이효석문학관. 이효석은 이곳에서 ‘장에서 장으로
떠도는 장꾼’들을 보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평창 봉평 일대에선 해마다 메밀꽃 축제(효석문화제)가 열린다. 봉평은 가산 이효석 선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실제 무대일뿐더러, 가산 선생이 태어난 곳이기 때문이다. 올해는 9월 7일부터 16일까지 10일 동안 펼쳐진다. 이효석문학상 시상을 비롯해 백일장, 시낭송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일 예정. 마당극 ‘메밀꽃 필 무렵’과 거리 민속놀이, 국악제도 곁들여진다. 메밀음식이나 봉평 옛 시골장터의 정취도 맛볼 수 있다. 지난해 축제기간 방문객은 35만여 명.
김성기 이효석문학관 관장은 “축제기간 메밀꽃은 피겠지만, 올해 너무 가물어서 메밀 키가 무릎쯤밖에 차지 않을까 걱정이다. 예년처럼 메밀대궁이 허리 위쯤까지 껑충 올라와야 하는데…. 아마 9월 10일쯤 꽃이 가장 좋을 것으로 생각된다. 생가나 문학관 주변보다는 무이예술관 부근의 꽃이 훨씬 나을 것 같다”고 말했다.
김화성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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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문의 로드포엠]메밀꽃 필 무렵

봉평 연가
꽃이 피고, 그 꽃길을 걸었지요
나지막한 꽃들은 정강이를 적시고 우리,
그저 흐드러졌지요
노래로 치면 어찌 꽃만이야 하겠으나
사랑이야 남김없이 우리들 몫이니 그저,
흐드러졌지요
햇빛은 오롯이 옥수수 이파리에서만 반짝이고
꽃대궁은 꿈결인 양 슬려 다녔어요
바람이 일고, 그 바람에 대고 속삭였지요…
사랑한다고-
봉평 메밀꽃밭*
해마다 9월이 오면 강원도 평창 봉평 일대는 온통 새하얀 메밀꽃 천지가 된다.
한때 수익성에 밀려 사라지는 듯했던 메밀밭이 다시 봉평 일대를 뒤덮게 된 것은 순전히 한 편의 소설 때문이었다.
가산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장돌뱅이의 삶과 애환을 그린 이 한 편의 소설은 작가의 고향 봉평을 무대로 해서 태어났다. 비록 장평에 있던 가산의 묘소는 1998년 유족과 주민들 간의 한바탕 실랑이 끝에 끝내 파주의 통일공원으로 이장되고 말았지만, 고향 사람들은 그의 소설과, 소설이 주는 향취를 무던히도 되살려냈다.
그 사연이 어떠하든 메밀꽃은 다시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그 소설의 줄거리야 어떠하든 연인들은 메밀밭에서 마냥 즐겁다..jpg)
On road
영동고속도로 둔내IC - 양두구미재 - 태기산|고산야생화 - 보광휘닉스파크 - 봉평|효석문화제(9월8일~17일)/이효석생가/이효석문학관/가산공원/재래장터/흥정계곡/허브나라/무이예술관 - 대화장 - 금당계곡
길은 지금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 이효석 '메밀꽃 필 무렵'
이효석의 메밀꽃을 보러 가는 길은 봉평이나 대화, 아니면 진부에서라도 장이 서는 날이 좋다. 이 시골장터들이야말로 '메밀꽃 필 무렵'의 주무대들이다. 비록 규모도 줄어들고 옛 모습도 거지반 잃어버려 소설 속 같은 분위기는 찾아보기 어렵겠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강원도 산골장터의 면모를 더듬어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 중에 하나들이다.
마침 봉평장은 2·7일, 진부장은 3·8일, 대화장은 4·9일장이므로 1과 10으로 끝나는 날만 피한다면 세 곳 중 한 곳은 넉히 둘러볼 수가 있다.
옥수수와 감자 같은 풋것들을 좌판이랍시고 벌린 할멈이나, 도무지 이런 시골바닥에서는 별 효용이 없을 것 같은 분재화분들을 늘어놓고 긴 간이의자에 누워 늘어지게 잠만 자는 장사치나, 장터 한 구석에서 메밀전 지지는 냄새로 시장에 겨운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인심 좋게 생긴 아낙들로 이루어진 풍경은, 적어도 내게는 메밀꽃보다 더 토속적이고 더 탐미적이다.
어쩌다가 허름한 주막이라도 기웃거릴라치면 탁배기 한 잔에 시름을 나누는 노인네들의 담소 속에서 '허생원'이나 '동이'의 후일담이다 싶은 이야기들을 엿듣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세월은 흐르고 세상은 변했다. 몇 점 남지 않은 이 낡은 풍경들은 이미 과거의 몫이고, 이내 사라질 시간들에 속한다. 장터를 벗어나기 무섭게 이국적인 팬션들이며 이물스런 건물들이 진을 치고 있다. 양두구미재 아래 휘닉스파크나 흥정계곡 깊숙이 들어앉은 허브나라의 풍경은 어떠한가.
한겨울 설원을 뒤덮는 원색의 스키복 물결이나, 사시사철 허브티 한 잔을 사이에 두고 아로마향 같은 정담을 나누는 젊은것들 앞에서 나는 속절없이 주눅이 들고야 만다. 객기를 부려 기를 쓰고 그들 사이를 비집어보지만, 얼마 가지 않아 마치 발에 맞지 않은 신발을 신은 사람처럼 뒤처지기 십상이다. 이러니 나는 어쩔 수 없이 또 다른 의미에서의 '된장남'인 게다.
글·사진/유성문<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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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밀꽃 필 무렵
줄거리
여름 장이란 애시당초에 글러서, 해는 아직 중천에 있건만 장판은 벌써 쓸쓸하고 더운 햇발이 벌여놓은 전 휘장 밑으로 등줄기를 훅훅 볶는다. 마을 사람들은 거지 반 돌아간 뒤요, 팔리지 못한 나무꾼 패가 길거리에 궁싯거리고 있으나, 석유병이나 받고 고깃마리나 사면 족할 이 축들을 바라고 언제까지든지 버티고 있을 법은 없다. 춥춥스럽게 날아드는 파리 떼도, 장난꾼 각다귀들도 귀찮다. 얼금뱅이요, 왼손잡이인 드팀전(온갖 피륙을 팔던 가게)의 허생원은 기어코 동업의 조선달에게 나꾸어보았다.
드팀전의 허 생원과 조 선달이 장을 거두고 술집에 들렀을때 벌써 먼저 온 동업의 젊은 녀석 동이가 계집을 가로채고 농탕치고있었다. 허 생원은 괜히 화가 나서 기어코 그를 야단쳐서 쫓아내고 말았다. 장돌뱅이의 망신을 시킨다고 말이다. 그런데 뜻밖에 그는 얼마 후 되돌아와서 허 생원의 나귀가 발광을 하고 있다고 일러 주는 것이었다. 허 생원은 어이가 없었다. 얽음뱅이요 왼손잡이인 허 생원은 계집과는 인연이 멀었다. 때문에 장돌림을 시작한 지 20년이 넘었건만 아직 홀몸이었다. 그러므로, 자신과 늘 함께하는 나귀의 신세가 느꺼웠던 것이다.
밤이 들어 허 생원은 조 선달과 동이와 함께 나귀를 몰고 다음 장으로 발을 옮겼다. 봉평장으로 가기 위해서다. 달이 환히 밝았다. 달밤이면 으례, 허 생원은 젊었을 때 봉평에서 겪었던 옛일을 애기하는 것이었다.
개울가에 모밀꽃이 활짝 핀, 달 밝은 여름 밤이었다고 한다. 그는 멱을 감을 양으로 옷을 벗으러 방앗간에 들어갔다가 거기서 우연히 울고 있는 성 서방네 처녀를 만나서 어쩌다가 정을 맺었던 것이다. 그녀는 봉평서 제일 가는 일색이었다. 그는 오늘도 기이한 인연에 얽힌 이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동행을 하다가 허 생원은 이날 밤 동이가 아버지를 모르고 자라난 사생아임을 알게 되었다. 더욱이 그의 어머니의 고향은 봉평이라 했다. 허 생원에게는 맺히는 것이 있었다. 동이 어머니가 제천에서 홀로 산다는 말을 듣자 그는 놀라 개울에 빠지게 된다.
이튿날 그는 동이를 따라 제천으로 가 볼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문득, 그는 나귀를 몰고 가는 동이의 채찍이 동이의 왼손에 잡혀 있음을 똑똑히 보았다. 아둑시니같이 어둡던 그의 눈에도 이번만은 그것이 똑똑히 보이는 것이 었다.
오래간만에 가보고 싶어 동행하려나, 동이?
나귀가 걷기 시작하였을 때, 동이의 채찍은 왼손에 있었다. 오랫동안 아둑신이같이 눈이 어둡던 허생원도 요번만은 동이의 왼손잡이가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
걸음도 해깝고 방울 소리가 밤 벌판에 한층 청청하게 울렸다. 달이 어지간히 기울어졌다.
감상의 길잡이
이 작품은 인간 심리의 순수한 자연성을 허 생원과 나귀를 통해 표출하고 있는 낭만주의적인 소설이다. 강원도 땅 봉평에서 대하에 이르는 팔십리 공간적 배경으로 삼아, 그 길을 가는 세 인물의 과거사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본연적 사랑을 드러내고 있다. 늙고 초라한 장돌뱅이 허생원이 20여년 전에 정을 통한 처녀의 아들 동이를 친자로 확인하는 과정이 푸른 달빛에 젖은 메밀꽃이 깨알깨알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밤길 묘사에 젖어들어 시적인 정취가 짙게 풍겨나온다. 낭만성과 탐미주의 성향이 어우러진 이효석 문학의 대표작이다.
서정주의적 경향이 많으며 암시와 추리를 통해 주제를 간접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대화 형식으로 플롯이 진행되며 반복되는 지명(地名)으로 의식과 감정을 고조시킨다. 낭만주의적인 경향이 많으나 파장 무렵의 시골 장터의 모습이나, 주인 허 생원을 닮은 나귀의 모습이나, 메밀꽃이 하얗게 핀 산길의 묘사같은 것은 뚜렷한 사실성을 가지고 서술되었다.
허 생원이 동이가 친자(親子)라는 것을 확인한 후의 모든 기쁨은 독자의 상상력에 유보되어 있다. 물론, 확인하는 과정의 중요한 단서가 된 '왼손잡이'가 과연 유전이냐 하는 의문은 걷어 치우고라도 허 생원과 친자로 예상되는 동이가 모두 장돌뱅이라는 사실은 부전자전(父傳子傳)의 동일성을 확인해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모티브는 김동리의 [역마]에도 나타나 있다.
이 작품은 김유정과 같은 고향인 봉평에서 오래 살았다는 황일부 노인에 의해 거의 모든 등장인물, 특히 허 생원과 충줏집이 실제 인물이라는 것이 알려져 있다.
개관 정리
▷ 주제 : 장돌뱅이 생활의 애환을 통한 인간 본연의 속성으로서의 애정
떠돌이의 삶을 통해 본 인간 본연의 애정
▷ 성격 : 낭만적. 서정적. 묘사적.
▷ 갈래 : 단편 소설, 본격 소설, 순수 소설
▷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 성격 : 낭만적, 서정적, 묘사적, 유미적(서정적 소설→시적 소설)
▷ 구성 : 단일 구성
▷ 표현
- 향토적 어휘
- 대화체 문장
- 갈등이 거의 나타나지 않음
- 두 축(남녀의 만남과 헤어짐 + 친자 확인)
▷ 행선지 : 봉평→대화→제천
▷ 배경 : 오후∼밤중, 봉평∼대화의 산길
작가 소개
가산 이효석은 강원도 평창에서 출생하였다.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 제국대학 영문과를 졸업하였으며,
1928년 '조선지광'지에 단편소설 '도시와 유령'을 발표하면서 문단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효석의 문학은 시적 서정을 소설의 세계로 승화함으로써 한국 단편소설의 백미를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실적 묘사보다는 장면의 분위기를, 섬세한 디테일보다는 상징과 암시의 수법을 이용하는 그의 문체는 우리 단편소설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메밀꽃 필 무렵'에 이르러 전성기를 누렸다.
또한 '돈''메밀꽃 필 무렵' 등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성(性)의 탐색을 통해 그는 일제시대의 암울한 현실과 대비되는 순수하고, 순결한 세계를 인간의 원초적 본능인 성(性)과 결합시킨 시적 서정소설로 새로이 개척해냈다.
이로써, 자연과 인간 본능의 순수성을 시적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평가와 함께 당시 이태준, 박태원 등과 함께 대표적 작가로 주목받았던 이효석은 그러나 그의 황금 같은 문학적 결실을 다 누려보지도 못한 채 1942년 결핵성 뇌막염으로 36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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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밀꽃 필 무렵’
21~24일 대한민국오페라페스티벌 무대에 올라


지난달 29일과 30일 홍천 대명 비발디 파크 소노펠리체 살롱 콘서트에서 이효석 원작 우종억 작곡의 '메밀꽃 필 무렵'이 오페라 갈라 형식으로 열렸다.
'메밀꽃 필 무렵'은 탁계석 평론가가 대본을 쓰고 우종억 작곡가가 4년여에 걸쳐 심혈을 기울인 작품으로 원작에 충실하면서도 이효석 문학의 탁월한 서정성을 음악예술로 한 차원 높게 끌어 올렸다는 평가를 받으며 지난해 오페라연합회로 부터 대한민국오페라대상에서 '금상'을 수상한 작품.
그간 지자체 마다 자기 고장을 알리기 위해 이순신, 안중근, 유관순, 박정희 등 역사물 중심의 창작오페라를 올렸지만 그 대부분이 일회성 공연에 그치고 말았다. 관객의 반응 또한 기대에 못 미쳐 창작오페라가 침체된 분위기에서 '메밀꽃...' 오페라는 문학오페라로 한국창작 오페라의 새 이정표를 제시했다는 전문가들의 평가를 받고 있다.
관객들은 "서양 오페라에서는 누가 주인공인지, 원어로 해서 줄거리 조차 잘 알 수 없었던 답답함이 있었는데, 우리 오페라를 보니 마치 햄버거나 치즈만 먹다 된장이나 김치를 먹은 듯 시원함을 느꼈다"는 반응들.
허생원 역을 맡은 김승철 교수는 "오늘은 갈라 콘서트 형식으로 올렸지만 하루속히 본 무대인 봉평에서 제대로의 오페라 작품이 무대에 오를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고 동이 역의 손정희 테너는 "이 작품은 세계무대로 나가 승부수를 띄울 수 있는 작품인 만큼 우선 전국 투어를 통해 확산 시킨후 세계로 뻗어가는 오페라로 푸치니나 베르디의 수입구조에서 벗어나 21세기는 오페라를 수출할 수 있는 때가 온 것"이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첫날 관객들은 이 오페라의 백미인 허생원의 아리아 '메밀꽃은 달빛에 흔들리고'를 탁 평론가의 가창지도로 아리아를 배웠고 공연 직후 관객들이 출연진과 합동 촬영, 사인회를 하는 등 대극장이 아닌 소극장 살롱콘서트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이 날의 배역은 허생원 김승철(바리톤), 여인 구수민(소프라노), 동이 손정희(테너), 조선달 홍순포(베이스) 주모 이수미(메조 소프라노) 피아노 박은순과 연출 정철원.
한편 대명 레저산업 측은 "고객들에게 최고의 문화 서비스를 위해 격조 높은 콘서트를 정례화해 레저와 문화가 조화를 이룬 최고의 레저문화를 선도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탁계석 평론가는 "이번 공연에 호응이 너무 좋아 강원도 전역을 투어 할 계획이라며, 강원도와 교육청, 예총과 협의 시, 군과 학교 순회를 통해 지역에서부터 오페라를 애호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며 곧 강원 지역 음악가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오디션을 할 것"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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