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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무쇠팔 최동원 인생을 던지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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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프로야구는 1982년 출범한 이래 수많은 스타를 배출했다. 그 중 최고의 선수가 누구인지 쉽게 말할 수 없지만 최동원(51)의 이름을 빼 놓고 한국 프로야구를 말할 수는 없다. 이제는 그를 알지 못하는 세대들이 자라나고 있지만 한국에는 '야구=최동원'이었던 시절이 아직도 선명하게 빛을 발하고 있다. 최동원의 인생은 그의 선수 시절만큼 굴곡이 많았다. 최동원의 선수 시절이 그의 전매 특허인 불 같은 강속구 같았다면 지금 그의 인생은 그를 대표하는 또 다른 구종인 커프의 곡선을 닮은 듯하다.

강렬한 투혼의 추억한국 시리즈 7전 가운데 혼자 4승을 따내다

이번에 선정한 한국 스포츠 사를 빛낸 50인 중 한국 프로야구에서 활약했던 이는 단 3명이다. 이승엽, 선동열, 최동원. 그렇다면 최동원은 어떤 선수였을까? 그는 1983년 프로에 데뷔한 뒤 8시즌 동안 통산 1037426세이브를 기록한 투수다. 통산 방어율 2.461,019개의 탈삼진을 기록했다. 그러나 그는 통산기록 부문에서 10위권 안에 드는 것이 거의 없는 투수이기도 하다. 그의 이름에 늘 같이 따라다니는 선동열의 통산 146132세이브 통산 방어율 1.20에 비할 바가 못 된다.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최동원을 잊지 못하는 것일까? 그건 1984, 짧았지만 너무나 강렬해서 도저히 지워낼 수 없는 한국시리즈에 대한 짙은 향수 때문일 것이다. 야구 팬들은 롯데가 우승했던 그때의 일을 가을의 기적이라 부른다. 최동원은 74선승제의 한국시리즈에서 혼자 4승을 따내며 약체 롯데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1984년 한국시리즈보다 더 극적인 승부는 아마도 한국 프로야구에서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17이닝 연속 노히트 노런 기록, 그러나 병역이 발목 잡은 메이저 진출

아마추어 야구 시절부터 최동원의 활약상은 눈부셨다. 경남고등학교 2학년 때 전국우수고교초청대회에서 당시 고교 최강인 경북고를 상대로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 이 경기를 계기로 최동원이란 이름이 야구판에 널리 알려졌다. 최동원은 다음 경기인 선린상고전에서도 8회까지 노히트 노런 투구를 이어가 17이닝 연속 노히트 노런 기록을 세웠다. 그 뒤에도 각종 기록을 쏟아 내며 고교 최고 투수로 이름을 날렸고 팬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그를 모델로 그린 만화가 발매될 정도였다. 해외 진출의 기회도 여러 차례 있었다. 첫 번째 기회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해인 1977년에 찾아왔다. 일본 프로야구 롯데 오리온즈(현 지바 롯데 마린스)의 가네다 마사이치 감독이 최동원을 양자로 들이는 조건으로 입단을 추진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결렬됐다. 최동원은 아무리 큰물에서 야구를 하고 싶다고 해도 당시 정서로 볼 때 일본인의 양자로 들어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할아버지를 비롯해 주변 어르신들이 많이 반대하셨다며 그 시절을 떠올렸다.

아쉬움으로 따진다면 1981년 메이저리그 구단과 성사 직전까지 갔던 두 번째 기회가 더 클 것이다. 최동원은 1981년 캐나다에서 열린 대륙간컵 대회에서 캐나다를 상대로 8회까지 퍼펙트 게임을 기록하는 등 호투를 펼치며 대회 최우수선수로 뽑혔다. 최동원의 투구 내용을 높게 평가한 메이저리그 구단들의 입단 제의가 이어졌고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연봉 61만 달러에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최동원의 해외 진출 꿈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병역 문제 때문이었다. 당시 공군에서 뛰던 축구 스타 차범근은 독일 분데스리가에 진출했지만 복무 기간이 6개월 남았다는 이유로 귀국해 복무 기한을 채운 뒤 재진출하는 일도 있었다. 그만큼 해외 진출이 어려웠던 때다. 최동원은 해외 진출을 성사시키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찾아봤지만 결국 포기해야 했다. 최동원은 후회는 하지 않는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는 시기였다. 이듬해 프로야구가 출범해 해외 진출의 꿈을 잊고 열심히 던지며 행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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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팀이 맞상대로 나와도 승패는 아무도 모르는 일"

1982년 한국 프로야구가 출범했다. 그러나 최동원은 서울 세계야구선수권대회 대표로 뽑혀 프로 진출이 1년 유보됐다. 1년 뒤 롯데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고 프로야구에 데뷔했다. 아마추어 야구 최고 스타 최동원은 데뷔 첫해 916패를 기록하며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팀 전력이 좋지 못했던 이유도 있었지만 프로 1년 만에 타자들의 기량이 발전한 점도 최동원이 10승대 투수가 되지 못한 까닭이었다. 그해 최동원은 208이닝을 던지며 2.89의 방어율을 기록했다. 최동원은 데뷔 2년째인 1984년 선발과 중간을 오가며 2713패 방어율 2.40의 좋은 성적을 올렸고 롯데를 한국시리즈로 이끌었다. 한국시리즈에서 맞붙은 삼성 라이온즈는 전기리그 우승을 차지한 당시 최강 전력의 팀이었다. 삼성 김영덕 감독은 시리즈를 앞두고 롯데 에이스 최동원이 정규 시즌에서 우리와 붙어 재미를 보지 못했다며 자신감을 보이자 롯데 강병철 감독은 “1, 3, 5, 7차전에 최동원을 투입해 43패로 이기겠다고 응수했다. 최동원은 강병철 감독에게 “1, 3, 5, 7차전 등판, 이거 너무 무리 아닙니꺼?” 하고 말씀 드렸다. 강 감독은 미안한 표정과 함께 동원아, 우야노 여기까지 왔는데라고 답했고 최동원은 알았심더. 한번 해보입시더라며 결의를 다졌다. 최동원은 당시 삼성은 10번 싸우면 1번 정도 이길 수 있는 강한 상대였다. 그러나 승패는 경기가 끝나기 전에는 모르는 일이기 때문에 열심히 던지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마침내 시리즈가 시작됐고 최동원은 1차전과 3차전에서 각각 9이닝 7안타 완봉승(롯데 4-0 삼성), 9이닝 6안타 2실점으로 완투승(롯데 3-2 삼성)을 기록했다. 5차전에서는 8이닝 6안타 2실점으로 호투했지만 롯데가 2-3으로 졌다. 최동원은 이 경기에서도 완투했다. 강감독은 6차전 5회에 최동원을 구원 투수로 기용해 6-1로 승리하며 시리즈를 최종전으로 끌고 갔다. 7차전을 앞두고 롯데 선수들이 더그아웃에 모였다. 최동원은 객관적으로 열세였던 전력에서 33패로 맞선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니 7차전을 보너스 경기라고 생각하고 마음 편하게 뛰자고 서로를 격려했다고 기억했다. 마운드에 오른 최동원도 가벼운 마음으로 공을 뿌렸다. 경기 초반 4점을 내줬지만 마음은 편안했다. 8회초 롯데 공격에서 유두열이 6차전까지의 부진(17타수 1안타)을 말끔히 씻어 내는 3점포를 쏘아 올렸고 경기는 6-4로 뒤집혔다.

8회말과 9회말만 막으면 된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부담감이 밀려왔다. 앞선 점수를 어떻게 지켜낼 지 스스로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교체는 생각하지 않았다. 에이스인 자신이 막지 않으면 안 됐기 때문이다. 이기든 지든 자신이 마무리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9회말 2사후 최동원의 몸쪽 높은 공에 삼성 장태수의 배트가 돌았다. 주심은 판정을 하지 않았고 최동원은 곧바로 1루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배트가 돌았다는 1루심의 제스처에 최동원은 펄쩍 뛰어오르며 포수 한문연과 포옹했다. 최동원은 그때 감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내 선수 생활 가운데 최고의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한국시리즈에서만 40이닝을 던지며 4승을 올린 최동원은 타격 3관왕을 차지한 삼성 이만수를 제치고 정규 시즌 최우수선수로 뽑히며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어려운 선수들 돕자는 선수협 추진 후부터, 그늘이 찾아오다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뒤에도 최동원은 쾌속 질주했다. 1987년까지 해마다 10승 이상을 기록했고 200이닝 이상을 던졌다. 1988년 최동원은 선수협의회를 결성하고자 했다. 해태 타이거즈의 투수 김대현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보고 선수 복지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최동원은 같이 운동을 하던 선수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지만 도울 수 있는 길이 없었다. 연습생 선수들의 최저 생계비나 선수들의 경조사비, 연금 같은 최소한의 복지 제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선수협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명예욕에 따른 움직임이라는 일부의 편견도 있었다. 그러나 최동원은 나는 1억 원의 연봉을 받는 선수였다. 그 돈이면 당시 강남에 아파트를 마련할 수 있었다. 내 욕심을 위해서라면 선수협을 결성할 필요가 없었다. 어려운 동료들을 돕고 싶었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구단들의 강한 반발에 밀려 선수협 결성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해 11월 최동원은 삼성 투수 김시진과 맞트레이드됐다. 롯데가 아닌 다른 팀의 유니폼을 입는 것은 최동원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트레이드 사실보다 최동원을 힘들게 한 것은 구단이 자신의 의도를 본의와 다르게 받아들였다는 점이었다. 구단에 대한 섭섭한 마음과 함께 선수 생활에 대한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최동원은 1990년 시즌까지 삼성에서 뛰었고 1991년 시즌이 시작하기 전 마운드를 떠났다. 가족들과 의논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32살이었다. 아마추어 야구 시절부터 혹사 당한 게 조기 은퇴로 이어진 것이 아니냐는 견해도 있었다. 최동원은 아마추어 시절이나 프로에서 무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시대에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이름 세 글자에 부끄럽지 않게 맡은 바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한다고 말했다.

은퇴한 뒤 최동원은 야구인으로 살고 싶었다. 지도자가 되고 싶었지만 그를 받아 주는 구단은 없었다. 팬들에게 안부를 전하고 싶어 텔레비전의 오락 프로그램에 출연했지만 사람들은 그의 뜻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야구 선수가 왜 오락 프로그램에 나오느냐는 식으로 바라봤다. 자신의 의도가 다르게 전해진 것을 안 최동원은 1999년부터 방송 출연을 접고 다시 야구 판으로의 복귀를 노렸다. 그러다 2001년 한화 이글스 투수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선수들을 지도하는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겪고 코치 직에서 물러난 뒤 2005년 다시 한화에서 코치를 맡았다. 2007년에는 한화 2군 감독을 맡아 2년 동안 유망주들을 가르쳤다. 2008시즌을 마치고 한화에서 물러난 최동원은 올 시즌부터 한국야구위원회(KBO) 경기감독위원으로 야구장을 찾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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