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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의 패망 원인을 고찰하여 우리나라 의 현실을 바로알자
이 글을 쓴 이 대용 육사총동창회장은
월남 패망 당시 주월 한국대사관 경제담당공사로서
월남 패망 후 월맹군에 체포돼 5년 동안 억류생활을 한 경력이 있다.
『요즘 자꾸 사이공 함락 장면이 꿈에 나타난다』면서
『베트남과 한국은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일란성 쌍둥이』
라고 말했다.
이회장은 『우리와 역사 문화적 배경이 다른
독일에서 통일의 교훈을 찾을 것이 아니라
월남 패망을 연구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다』라고 말했다.

다음은 이회장의 증언을 요약한 것이다.

1.  월남과 한국은 일란성 쌍둥이

    우리가 역사를 표현할 때 흔히「반만년 배달민족」이라고 하는데,
    월남은「반만년 황룡의 후손」이라고 말한다.
    중국의 지배권에 있다가 식민지를 경험한 것도 비슷하며,
    식민지에서 해방될 때 남북의 허리가 잘려 분단된 사실,
       북에는 공산정권, 남에는 자유 민주정권, 역시 비슷하다.
    지역 감정이 드센 것,  식민잔재 청산 문제로 인한 정통성 논쟁,
    각 정치 세력간의 끝없는 분파와 이합집산,
    어찌 그리 닮은꼴인지 모른다.

2.  한쪽에선 평화회담, 다른 쪽에선 대남공작

    1973년 1월27일 프랑스 파리에서 휴전회담이 열렸다.
    휴전의 담보를 위해 키신저는 월맹에 40억 달러
    (20억 달러는 미국 직접원조, 20억 달러는 IBRD 차관)의 원조를 제공,
    이것으로 피폐한 월맹의 경제 재건을 돕기로 하고 교전 당사국인
    미국,월남,월맹,베트콩(베트남 임시혁명정부)등이 서명 했다.

    휴전 무렵 월맹은 전쟁으로 인해 매년 80만∼100만t의 식량 부족,
    물자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맹은 줄기찬 대남공세를 끝까지 멈추지 않았다.
    휴전협정 이전부터 숱한 공산당 프락치들이 월남 곳곳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캄보디아 국경선 근처 빈룽성 내의 지하 땅굴에 있던 혁명정부 청사에는
    월남 정부의 각 부처와 월남군 총사령부에서 이루어지는 극비 회의 내용이
    단 하루 후면 상세하게 보고될 정도로 티우 정권의 핵심에
    공산 프락치가 침투해 있었다고 한다.

    반면 월남에서는 군사 쿠데타가 벌어질 때마다 대공전문가들이 쫓겨나는 바람에,
    월남 대공기관과 정보기관은 형태만 남아버렸다.
    그들은 대월맹 정보수집은 말 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월남내부에 침투한 공산 프락치 검거에조차도 무기력했다.

    한 나라를 망하도록 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무엇보다도
    그 나라의 정보기관부터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지금 우리 나라 정보기관과 대공기관이
    정권의 부침에 따라 평지풍파를 겪으면서,
    결국에는 간첩 하나 못 잡는 이빨 빠진 고양이로 전락한 사실을
    너무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월남 패망 당시,
    외적이 아니라 내부의 갈등으로 인해
    무너지는 모습과 너무나 흡사하기 때문이다.

3.  국민의 정신적 해이

    휴전협정 이후 월남은 월맹보다 경제력은 물론
    군사력에서도 월등히 앞서 있었다.
    월남 지도부와 국민들은 상황을 너무도 쉽게 낙관했다.
    월맹군이 도발하더라도 즉시 미국의 해·공군이 개입하여
    북폭을 재개할 것이고,  (당시) 세계 4위를 차지할 정도로
    월등한 월남군 기동력과 화력으로
    \"월맹군의 공세에 당연히 맞설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 누구도 공산군이 남침하리라고 믿지 않았다.
    휴전 체제에서 평화를 거부하는 사람은 없었고,
    그래서 국방과 안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람은 전쟁에 미친,
    혹은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받았다.
    결국 그 믿음이 국방을 소홀히 하도록 하였고,
    내부적으로도 극심한 정쟁의 원인을 제공한 것이다.

4.  부정부패

    월남 지배층은 사리사욕과 부정축재,
    황금 만능주의에 빠져 천민자본주의의 극단을 보였다.
    반면 「국가에 대한 의무」라는 말에는 코웃음을 치며
       체제파괴 세력들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했다.

    오늘날 기회가 날 때마다 사회 지도층 인사의 부정부패
    그 아들들의 병역기피 모습은, 25년 전 월남에서 벌어진
    바로 그 일들이 그대로 반복되고 있는것같다
.     후방이 부패와 혼란에 빠지고, 사회에 정의감이 상실되자
   「저따위 썩은 정권과 나라를 위해 내가 목숨을 바쳐야 하는가』     군인들은 전의를 상실했다.
    화해와 평화의 분위기로 공산군에 대한 경계심도 사라져 버렸다.

5.  시민·종교단체를 좌익이 장악

    월남에서는 천주교의 짠후탄 신부, 불교계의 뚝드리꽝 스님,등
    \"구국평화회복 및 반부패 운동 세력\"이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이 사회단체하에 사이공대학 총학생회,시민단체들이 연합하여
    일종의 시민연대를 구성하고, 반부패운 동에 나섰다.

    순수한 반부패 운동 조직에 공산당 프락치들이 대거 침투하여,
    반정부·반체제 세력으로 변질된점이었다.
    목사, 승려, 학생 그리고 좌익인사들이 한데 뒤섞여
    반전운동, 인도주의 운동, 문화운동 등 상상할 수 있는
    그 모든 운동단체들을 총 동원하여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월맹 정규군의 무력침공과 베트공의 게릴라전에 패배한 것 이상으로
    이들 100여 좌익 단체의 선전전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것이다.

6.  거지군대」에 패망한 월남

    패망후 월남의 군인,경찰은 무장해제되고 수용소에 보내졌다.
    공무원과 지도층 인사, 언론인, 정치인들도 모두 체포돼
   「인간개조 학습소」에 수감됐다.
    이중 대부분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반정부·반체제 운동을 벌이던 교수, 종교인, 학생, 민주인사들은
    모조리 체포·처형됐다.
    이유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반정부 활동을 하던 인간들은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똑같은 짓을 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7.  결어

    체제가 안정되었다거나 경제력이 우수하다는 말은,
    조국에 충성하는 국민의식과 군사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전부 잠꼬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월맹 군인 들은 소금만 가지고 하루 두 끼 식사를 겨우 할 정도였고,
    속옷은 구경조차 힘들었다는 점이다.
    월맹군은 전차 부대를 제외하고는 군화를 신은 사람도 없었다.
    그들은 타이어를 잘라 끈으로 묶은 채 질질 끌고 다니며
    월남군과 전투를 했던 것이다.
    이런 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