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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임 이명섭고교야구감독과 휘75송년회...

휘문고 이명섭신임감독에 관한 <교수신문/조한욱 > 1997년 11월 10일자에 실린 글입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나도 박찬호를 무척 좋아한다. 근엄해야
한다는 교수의 신분도 잊은채 학생들과 함께 중계방송을 보면서 승
패의 명암에 따라 환호나 탄식을 내뿜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동
양의 한 청년이 야구의 본무대에서 체격 좋은 서양의 선수들을 당
당히 제압한다는 사실외에도, 혹독한 시련의 세월을 감내하며 영광
을 이끌어낸 인간 승리의 면모를 보여주었다든가, 정치나 경제가
모두에게 실망을 안겨줄 때 그만이 희망의 빛을 던져주는 등 그는
사람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요소들을 골고루 갖추고 있다. 그래
서 그는 수퍼스타가 되었고,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더욱 좋아한다.
       한편, 그의 승리에 환호작약하다가도, 그가 수퍼스타가 되
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노라면, 우리들의 참모습을 반영하는, 반드시
즐겁지만은 않은 상념의 조각들을 떠올리게 된다. 왜 하필이면 미
국의 스카우트 요원들이 박찬호의 진가를 알아보았을까? 우리에게
는 박찬호라는 명마를 알아볼 백락(伯樂)이 없는 것인가? 이런 상
념은 갈지 않은 보물을 알아보지 못한 야구 지도자들에 대한 푸념
을 넘어, 눈앞의 승리밖에 보지 못하며 재능있는 선수들을 혹사시
켜 수명을 단축시키는 행태에 대한 질책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런 상념의 결말은, 인재를 키우지 못할 망정 훼절시키고 매몰시키
는 서글픈 정치 현실에 대한 탄식으로 매듭지어질 수밖에 없다.
       어떻게 생각한다면 박찬호의 쾌투가 아무리 우리 국민의
자긍심을 올려놓았다 할지라도, 그 궁극적인 목표는 "7백억 정도는
벌어야 한다"는 공언이 말하듯 개인적인 부와 명성의 축적에 다르
지 않다. 그렇지만 우리의 매스컴은 다저스의 승리를 우리 국민의
승리와 동일한 것으로 만들었다. 그런 와중에 박찬호는 수퍼스타가
되었는데, 여기에서도 떠오르는 씁쓸한 상념은 "왜 성공을 거둔 후
에야 온갖 찬사와 후원이 뒤따르는가?"라는 것이다. 어떻게 고투하
며 성공을 거뒀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수퍼스타가 되었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더 열광하는 듯하다. 우리는 그런 선례를 많이 보아왔다.
조치훈이 일본에서 타이틀을 따낸 뒤에야 그의 후원회가 조직되었
으며, 무하마드 알리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권투 구경은 한번도 해
보지 않았을 것같던 당대 인기 절정의 연예인들이 그의 앞에서 다
투어 아양을 떨었던 일을 우리는 기억한다. 이미 탄탄대로가 보장
된 다음에 만들어진 후원회같은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영광
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소진되었던 온갖 정신적, 육체적 고뇌는 도
외시되고 그 자리에 올랐다는 사실에만 흥분하는 세태를 바라보며,
몇번의 실패가 거듭될 경우 그런 열광은 쉽사리 냉담으로 바뀔 수
있다는 단순한 진리를 확인한다는 것 역시 유쾌한 상념은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박찬호를 좋아한다. 이면에서 어떤
사람들이 그의 부가가치를 극대화시키려 하는지 모르겠으나, 그는
정직한 승부의 세계에서 정직하게 겨루며, 패배의 고통을 겸허하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누가 내게 가장 좋아하는 야구인을 물어본다면
나는 이명섭을 꼽는다. 나는 야구인 이명섭이 선수로서 어디에서
어떻게 활약했는지,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내가
그에게 대해 알고 있는 정보라고는 올해초 어느 신문에선가 읽은
박스 기사 하나가 고작이다. 그럼에도 그 짧은 기사를 통해 나는
야구 지도자로서 이명섭이라는 사람의 됨됨이에 감동을 받았다.
       그는 휘문고등학교 야구부의 감독을 맡으며 몇차례 전국대
회의 정상에 올려놓았던 전도유망한 야구인이었다. 몇번에 걸친 전
국 우승의 경력으로 보아 청소년 대표팀과 국가대표팀을 거쳐 프로
팀의 감독을 맡게되는 것이 그에게 열린 순탄대로였을 것이다. 그
러나 그는 그 학교의 감독직을 버렸다. 그 이유는 자신이 가르친
선수가 졸업하면서 대학교와 프로팀 사이의 깨끗하지 못한 스카우
트 파동에 휘말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야구 감독이기에 앞서 스승
으로서 제자를 잘못 가르쳤다는 자책감에 자신에게 보장된 안정된
미래를 버렸던 것이다. 야구계건 정치판이건 누구 하나 "내 탓이오"
를 말하지 않는 풍토에서 그의 행동은 단연 돋보인다. 우리의 야구
계(정치계라고 바꿔 읽어도 무방함)가 발전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
은 더 많은 박찬호보다는 더 많은 이명섭이다.
       나는 지금 이명섭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단지 그
가 잘 살고 있기를 바랄 뿐이다. 혹, 내가 공포의 외인구단이라도
만들게 된다면 나는 꼭 야구인 이명섭을 감독으로 초빙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