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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 선배님
비행사 안창남(安昌男). 그는 1921년 22세의 나이로 일본 항공국에서 실시한 제1회 비행사면허시험에 당당히 합격을 하고 그 이듬해 12월 경성악대(京城樂隊)의 우렁찬 환영의 주악과 5만 군중의 환호성을 받으며 여의도 상공에서 쌍엽 비행을 한 최초의 한국인 파일러트(Pilot)이다. 떴다 보아라 안창남 비행기 내려다 보니 엄복동의 자전거 그가 여의도 상공 곡예비행을 무사히 마친 후부터 퍼지기 시작한 노래이다. 우리의 민요 청춘가에다 가사를 그렇게 바꾼 것으로써 이른바 <안창남 비행기>로 알려진 노래인데, 그 당시 이은상(李殷相) 작사 <사우(思友)>와 함께 한국인이라면 빼놓을 수 없는 애창곡 중의 하나로 유명했었다. 그 노래는 어느덧 동네에 일본 순경이 나타나기라도 할라치면 아이들은 그 순경의 등 뒤에다 대고 「떴다 보아라 안창남 비행기, 내려다보니 엄복동의 자전거」를 일부러 크게 불러대며 꺾여진 민족의 자존심을 일으켜 세우는 데 한몫을 차지하였던 노래이기도 하다. 일본한테 땅을 밟히고 인권을 무참히 유린당해야만 했던 치욕의 시절에 유행된 <안창남 비행가>는 당시의 울분을 달래줄 수 있는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면 최초의 한국인 파일러트였던 안창남이 지닌 민족성, 그가 비행기 추락으로 서른 한 살의 생을 마칠 때까지 가슴 속 깊이 파묻고 다녔던 통곡의 한은 과연 무엇이었겠는가를 후세의 우리들은 꼭 기억해 볼 필요가 있다. 1900년, 정치적으로는 한·일 통상조약이 맺어지고, 사회적으로는 한강 철교가 준공되고, 경인철도가 완전 개통되는가 하면, 경인간 시외 전화가 연결되던 시대이다. 이 시대 한성 서북촌 평동 무악재, 지금의 서대문 무악재 부근에서 안창남이 태어난다. 한때 길이 하도 험해 몇 사람을 모아서 넘을 수 있는 길이라 하여 모아재라고 불렸었지만 안창남이 태어날 무렵에는 길이 넓게 뚫리고 전신주까기 세워졌는가 하면 서울에 땔감 나무를 실어 나르는 우마차 길로 다듬어진 길이었다. 안창남은 네 살 때 어머니를 잃었다. 계모 밑에서 자란 안창남은 의관인 아버지의 덕택으로 휘문의숙을 다니게 된다. 그러나 안창남은 나이 열 다섯 되던 해 아버지마저 잃어야 하는 불행과 함께, 다니던 휘문의숙을 중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삼년 동안 무악재 부근에 봉분된 아버지의 묘소를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찾아가 아버지의 넋을 달래는 정성을 들였다. \"아버지, 불효자 창남이가 왔습니다. 흑흑흑…….\" 그는 아버지 묘소를 찾아간 삼년동안 눈물을 안 흘려 본 날이 없었다. 조국은 이미 일본놈이 빼앗아가 버리고 꿈과 용기를 북돋아줄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셨으니 저는 어떡해야 합니까 하며 산봉우리가 내려앉도록 울 수밖에 없었다. 그는 상복을 벗고도 사흘이 멀다 하고 아버지의 묘소를 둘러보는 효자이기도 했다. 아버지의 묘소 왼쪽으로 한참 거슬러 올라가면 한강이 질펀하게 내려다보이는 바위가 있었다. 안창남은 그 바위에 걸터앉아서 연기를 폭폭 뿜으며 한강 철교를 지나가는 기차와 마포 나루 쪽으로 먼지를 휘날리며 질주하는 자동차를 볼 때마다 치밀어 오르는 울화통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일본은 저런 이기(利器)를 만들어 남의 나라 땅을 휘젓고 다니는데, 우리 조선은 그 동안 뭘 했단 말인가. 시선이 하늘을 향할 때는 더 그러했다. 왜냐하면 작년에(정확히 말해서 1916년) 아트·스미드라는 미국인 비행사가 용산 연병장 하늘에 비행기 한 대를 몰고 와 매혹적인 공중 묘기를 보여준 적이 있었다. 하늘을 나는 비행기가 갑자기 하늘 높이 치솟았다가 뚝 떨어지는 급강하의 묘기는 보는 이의 간장을 서늘하게 했으며, 제멋대로 빙빙 도는 묘기, 서쪽에서 나타났는가 하면 어느새 동쪽 산봉우리에서부터 꽁무니로 뿜어낸 하얀 연기를 가지고 <SMITH>라는 글씨를 쓰는 묘기 등은 비행기를 처음 보는 조선인의 넋을 쏘옥 빼고도 남았었다. 미국인은 무슨 재주가 있어 쇳덩어리를 타고 하늘을 나는가. 우리 조선인은 도대체 뭘 했단 말인가. 거기다가 나라까지 빼앗겨 버린 조선을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만 같았다. \"빌어먹을 일본놈!\" 주먹이 부르르 떨리고 이빨이 으드득 갈렸다. 그런 세월이 2년이나 지났다. \"일본놈을 이 땅에서 몰아내야 해. 그러기 위해서는 독립운동가가 되어야 해.\" 사실 이 무렵은 국내외적으로 독립운동에 대한 선풍이 불고 있을 때였다. 일본에서는 동경 유학생 학우회를 중심으로, 상해(上海)에서는 신한청년당, 국내에서는 민족대표 33인이 발족되는 등 독립운동의 열기가 무척 고조되고 있었다. \"맞아. 독립운동은 어르신들이 필사적으로 하고 있으니 난, 조선인이 배우지 못한 과학 분야에 뛰어들어야 해.\" 이렇게 해서 안창남은 독립운동 쪽보다는 신학문을 배우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어진다. \"맞았어. 난 자동차나 기관차 혹은 비행기를 움직이고 만드는 과학 분야를 공부해야겠어.\" 안창남은 그런 결심을 굳힌 나머지 한동안 손을 놓았던 일본어 학습을 다시 시작했다. 안창남은 일본에 건너가 그러한 학문을 터득하기 위한 기초 지식인 일본어를 열심히 공부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그가 일본에 건너가게 될 것이라는 낌새를 눈치챈 친척들은 서둘러서 구파발 쯤에 산다는 규수를 데리고 와 강제적으로 혼인을 시켜 버렸다. 안창남에겐 정말 흥미 없는 일이 벌이지고 만 셈이었다. \"그래도 난 결코 바보스러운 조선인은 되지 않을 테야.\" 가정을 지키는 지아비로서 조선 땅을 빙빙 도는 귀신이 되라는 친척들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집에 있는 돈 삼천원을 훔쳐 단신으로 일본 땅을 밟는다. 오사카. 안창남이 맨 처음 밟은 일본 땅이었다. 오사카는 조선인이 비교적 많이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돌아가신 아버지의 친구 서대문 김씨 아저씨도 계셨다. 안창남은 아버지의 친구 김씨 아저씨라는 분을 수소문 끝에 찾을 수 있었다. 아저씨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철공소 공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네가 안 의관 아들이란 말이지?\" \"네. 안 의관 아들 안창남입니다.\" 안창남의 아버지는 생시에 의관(醫官)이었다. 아버지를 아시는 모든 분은 보통 안 의관이라고 불렀다. 김씨 아저씨는 안창남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듣더니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안 의관이 눈을 감았구나. 그래, 알았다. 네 뜻이 정 그렇다면 우리 철공소 사장한테 특별히 부탁을 해보마.\" 아저씨가 일하고 있는 철공소의 사장 야마모또 씨는 적어도 오사카에서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지였다. 안창남은 마침내 김씨 아저씨를 통한 야마모또 씨의 영향력으로 오사카 자동차학교에 다니게 된다. 거기에서 자동차의 운전은 물론 자동차의 원리까지 배우게 된다. 오사카 자동차학교의 수업을 몇 달만에 마친 안창남은 동경으로 학습 장소를 옮긴다. 비행기를 만든다는 제작소가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비행기하면 퍼뜩 떠오르는 것은 아트 스미드이고 용산 하늘에서 펼쳐진 공중 비행묘기는 안창남의 기억 속에서 지울 수 없는 일이었다. 동경의 비행기 제작소는 대단한 곳이었다. 오사카의 자동차학교에 설치된 온갖 공작기계를 보고 깜짝 놀랐었지만 거기에 비교해 보면 동경의 비행기 제작소는 몇 백배 잘 다듬어진 공장이었다. 모든 것이 신비스럽게만 보였다. 철판을 자르는 절단기만 해도 그랬다. 스위치만 누르면 절단기의 톱날이 찌르륵 내려와 덜컹하고 그 두꺼운 철판을 불과 몇 초만에 싹둑 잘라냈다. 조선에서는 철판을 절단하기 위해선 불에 익히고 두들기는 힘든 작업 과정을 거친 끝에 작두로 몇 사람의 힘을 벌어 잘라내지만 일본에서는 절단기란 기계가 있었다. 일본이란 곳은 정말 대단한 나라였다. 안창남은 동경 비행기 제작소를 거쳐 소올비행학교에 들어가게 된다. 비행학교의 수업은 몹시 쉬웠다. 왜냐 하면 비행연습 과정 이전에 비행기 제작 과정을 먼저 배웠기 때문이다. 안창남은 3개월만에 동경의 비행학교를 마치고 얼마 뒤 동경 오사카 간의 우편물 배달 비행에 성공을 하게 된다. 이 일은 일본에서 대단한 화제가 되었다. 이 화제는 동아일보를 통하여 국내에 퍼지게 되었고 급기야는 그 이듬해인 1922년 박영효를 위원장으로 하는 <안창남 고국 방문 비행후원회>가 설립되었다. 1922년 12월 10일 일요일이었다. 바로 <안창남 고국 방문비행 후원회>의 배려로 그가 고국에서 시범 비행을 펼친 날이었다. 경성(지금의 서울)의 시내 국민학교는 물론 휘문고보 등 각 학교에서는 단체 관람에 나섰고, 이 날 구경꾼들의 교통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임시열차가 마련되기까지 했다. 노량진역에서 여의도를 통하는 길은 아침 일찍부터 구경꾼 행렬로 미어졌다. 그 날은 바람이 몹시 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꼬하마항에서 인천항으로 운반된 비행기 부품이 <금강호>라는 이름으로 조립되어 여의도 상공을 날고 있었다. 이 날 비행 연습에 대한 국내 신문들의 기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았다. 아! 이십 세의 조선 청년으로 일본 학계에서 교편을 잡기도 처음이요, 넓고 넓은 동경 시가를 내려다보며 높이 떠서 동경 시민에게 조선인의 재주가 이렇다는 것을 보인 것도 안창남이 처음이다. 하며 천재 파일러트, 공중의 의용자 등으로 안창남을 자랑했다. 안창남의 비행기가 여의도 간이 비행장을 이륙하여 하늘로 치솟자 구경꾼들은 함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