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밤 10시가 넘었지만 휘문고등학교 자율학습실을 밝히는 불은 여전히 훤하다. 학교 측과 교사, 학생들은 자율고 전환 신청을 계기로 “변화해야 한다”는 데 생각을 함께했다. [황정옥 기자] | |
글=박정현 기자, 사진=황정옥 기자
5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휘문고. 학교 안에는 골프 연습장이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연습장이 완성되면 골프 실기수업이 이곳에서 이뤄진다. 개교한 지 103년, 종로에서 대치동으로 이사한 뒤 30년이 넘는 건물 구석구석에선 이처럼 자질구레한 공사가 이어지고 있었다.
휘문고는 지난해 졸업생의 4년제 대학 진학률이 50.6%를 기록했다. 그중 4분의 1 이상이 소위 명문대라는 서울대·연세대·고려대에 합격한 것으로 집계됐다. 진학과 관련해 아무런 걱정이 없어 보이는 이 학교에도 지난해부터 ‘자율고’ 바람이 불어 자율고로 가야 할지 아니면 일반계고로 남아야 할지 고민이 이어졌다. 그리고 최근 결정을 내렸다. ‘자율고로 가자’는 것이었다. 과연 잘한 결정인가를 놓고 학생·학부모·교사 모두 아직은 자신 없어 했다.
자율고는 교육청으로부터 재정결함 보조금을 받지 않는다. 학생이 1000명 규모라면 학교법인은 학교에 대략 2억~3억원을 전입금으로 지원해야 한다. 휘문고는 그나마 사정이 좋은 편이다. 이번에 자율고 신청서를 낸 33개 교 가운데 24개 교는 법인 전입급 비율 5%를 충족하지 못한다. 5%를 충족할 수 있어야 자율고에 선정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함께하는 교육시민모임 김명신 공동회장은 “현재 재단전입금을 한 해 500만원도 못 내는 학교가 많다”며 “재단에 돈이 없으면 자율고 신청조차 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아무리 뜻이 좋아도 돈이 없으면 할 수 없다는 설명이다.
교과과정 운영 어떻게=서울시교육청이나 교육과학기술부는 전환 신청 학교의 교과 운영 계획을 심사할 방침이다. 휘문고는 이를 위해 자율고로 전환되면 국민공통기본 교과외에 온고지신(도덕), 문학산책(국어), 신나는 골프(체육) 등의 과목을 만든다는 계획이다. 조남익 체육교사는 “올해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이미 골프 수업을 하고 있다”며 “정규 과목이라 시험도 본다”고 설명했다. 1학년 박상남군은 “학교에서 골프를 배우는 것이 재밌다”며 “2학년 때도 계속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재량활동에서는 세상읽기(사회), 수리기초(수학), 과학유레카(과학), 생각다듬기(창의) 등이 있다. 김 교장은 “과목 수업은 기존의 교사진이 전문적인 교육을 받아 맡을 예정이고, 수업 교재도 직접 제작 중”이라고 말했다. 이 계획에 대해 학부모들은 우려했다. “자립형 사립고 같은 경우 교과 특성에 맞는 교사를 따로 선발해 학생들을 가르친다는데 기존 방식대로 수업하던 교사들이 우수 인재라고 해서 뽑아놓고 그 수준에 맞춰 가르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학부모 K씨는 “교사들이 제작한 교과서의 질을 어떻게 검증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올해부터 운영 중인 ‘학습클리닉반’도 확대할 예정이다. 수학 수업을 맡고 있는 정윤아 교사는 “지금은 신청 학생에 한해 자율학습을 하면서 지도를 받는다”고 설명했다. 이 반에서 지도를 받는 L군은 “일방적으로 수업을 듣게 하지 않고 자율에 맡기니까 스트레스가 적다”고 말했다. 내년부터는 상·중·하 수준별로 학생들을 구분해 정신과 전문의, 심리전문가, 학술 전문가 등의 도움을 받게 된다.
이종철 교무부장은 자율고를 ‘귀족학교’로 인식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 학교에서는 학습클리닉을 통해 하위권 학생들도 포용한다”고 말했다.
휘문고는 ‘자율학습실’을 자정까지 연중 무휴로 개방했다. 밤 10시 이후에는 자정까지 학부모들이 감독을 맡았다. 반의환 교감은 “학생들에게 학습 자율권을 준 것”이라며 “자율고로 전환된 이후에도 계속 이어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 선배와의 만남에 참석한 송승환(67회 졸업)씨가 학생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황정옥 기자] | |
자율형 사립고를 신청한 학교들은 일제히 불만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우수 인재를 뽑아 명문대 진학률을 높여야 ‘명문고’로 도약할 수 있다는 계획에 차질이 빚어진다는 것이다. 자율고 신청 학교의 한 교장은 “내년부터 서울에서 고교선택제가 시행되면 현재 상태에서도 우수 학생을 유치할 수 있는데 굳이 지금 시점에서 자율고로 전환할 필요가 있을지 고민이 크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휘문고의 경우 이과 우수 인재가 다수 입학할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토피아 입시전략연구소 이은주 부소장은 “학교가 기대하는 만큼은 아니지만 이과 쪽은 최상위권도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외고에 비해 과학고 선발 인원이 적어 이과 쪽이 강점인 휘문고를 선택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김 교장은 “우수 인재를 뽑겠다는 기대가 줄어든 것은 사실”이라며 “그런 이유에서 다른 학교에서도 신청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차피 순차적으로 자율고로 간다면 먼저 하는 게 낫지 않나 싶어 신청했다”고 밝혔다. 김 교장은 ‘자율고에 자율권을 준다’는 것의 의미를 이렇게 해석했다. “입시 위주로 가는 자율권이 아니라 교육 정상화로 가는 자율권이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특목고·자사고 목표 삼은 학생들은 “자율고요? 글쎄요”
중3 딸아이를 대치동의 특목고 대비 학원에 보내는 김수현(43·서울 강남구)씨는 “자녀를 자율고에 보낼 생각이 있느냐”는 물음에 “글쎄요”라고 답했다.
“일단 성적이 되면 외고를 목표로 공부하는 거죠.” 안 될 것 같으면 차선책으로 자율고를 택하겠다는 얘기다. 이정수(47·서울 서초구)씨도 비슷한 생각이다. 이씨는 “부모들은 의외로 학교 선택에 있어 보수적”이라며 “외고 등은 이미 오랜 시간 검증돼 있지만 자율고는 첫해이다 보니 걱정되는 게 사실”이라고 털어놨다. 그는 지금 중3인 큰애는 아예 생각을 안 하고, 자율고가 운영되는 걸 봐서 초등 6학년인 둘째는 고려해 볼 만하다고 말했다.
학생들은=자율고는 내년 3월 개교를 앞두고 있지만 학교 선정은 7월께 된다. 현재 구체적인 학생 선발 방식도 확정되지 않아 학생과 학부모들의 고민이 많다. 일반고 진학을 생각해 왔던 김지욱(중3)군은 “집에서 가까워 성적이 잘 나오면 한번 도전해 보고 싶은 생각도 있지만 전형이 애매모호하고 정보가 없어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최형석(중2)군은 집 근처 학교가 자율고 신청을 한 것이 불만이다. “가고 싶은 학교가 일반고 중에서 명문고로 알려졌지만 어렵지 않게 들어갈 수 있었는데 자율고가 되면 경쟁을 해야 하는 것이 못마땅하다”고 최군은 말했다. 이솔비(고2)양의 말은 자율고가 누구를 위한 학교인가 의문을 갖게 한다. 자율고 신청 학교에 재학 중인 이양은 “지원 학생들보다는 교사, 졸업생들이 자율고에 오히려 관심이 더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자율고로 지정되지 않으면 삼류 학교로 전락할 수 있다고 같은 학교를 졸업한 언니가 더 걱정한다”는 것이 이양의 얘기다.
학교·학원은=입시학원에서 진학지도를 하고 있는 조용진씨는 “특히 강남권의 경우 자율고에 대한 현장 반응은 언론에 나오는 것보다 대단하지 않다”고 귀띔했다. “공부 좀 한다는 강남 학생들은 이미 특목고나 자사고 등을 목표로 공부하고 있어 딱히 목표를 수정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입시학원 조미경 강사는 자율고를 귀족학교라고 부르는 것은 억지라고 표현했다. “학부모들은 대학 가는 데만 유리하다면 사실 등록금이 비싸더라도 크게 문제시하지 않는다”며 “귀족학교라는 수식어를 달아 무조건 반대하는 건 옳지 않다고 본다”고 말했다.
자율고 신청 학교의 한 관계자는 “물건도 써본 사람이 제일 잘 안다고 학생과 학부모의 학교 검증 자료가 제일 중요한데 이번 평가 항목에서 빠져 있다”며 “자율고 선정과 관련해 교육과학기술부가 무엇을 보고 결정하는 것인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박정현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