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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석작가의 병영일기 4회]<논산훈련소 25연대 3중대>
🧑
이율영
📅
2004-09-10
👀
460
<논산훈련소 25연대 3중대>
논산훈련소에 들어간 날은 2월 28일 수요일 오후였다. 수용연대에서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연병장에 집합하여, 수색 30사단에서 처음 들어 본, 수용연대에서 신체검사 차례를 기다리며 제법 익숙해진 \'앉아번호\'로 머릿수를 맞춘 뒤, 훈련소에서 온 인솔 사병의 지휘에 따라 행군하는 3백명 정도의 청년들 틈에 동창인 김성식 군과 나도 끼어 훈련소로 향했다. 눈이 녹아 질퍽거리는 지저분한 거리는 흑갈색이었고, 회색구름이 음산하게 드리워진 하늘이 나즈막하게 우리의 머리를 덮고 있었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은 익숙해진 일상의 풍경이어서인지 알 수 없는 두려움을 향하여 행군하는 우리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자신들의 거리를 걷고 있었다. 위병의 제지로 우리는 멈춰섰다. 양옆에 희게 칠한 양쪽 벽돌 기둥 위에서 완만한 무지개처럼 걸쳐진 시멘트 구조물 위에 올라앉은 조그만 누각 모형 이마에는 한자로 연무대(鍊武臺)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아름답지도 않고 웅장하지도 않은 괴이하기까진 한 훈련소 정문이 이제까지 보아온 숭례문이나 숭의지문, 지금은 창덕궁이란 이름을 되찾았지만 그때까지도 비원으로 불리던 궁궐의 돈화문, 창경원 명정문, 덕수궁 대한문보다 더 크게 느껴졌던 건 불확실 미래에 대한 공포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를 인솔해온 사병이 위병에게 경례를 부치며 뭔가 바락바락 악을 쓴 다음에야 우리는 그 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장정\'에서 \'훈련병\'이 되었다. 25연대 연병장에 도착한 우리는 중대로 분류되고 다시 소대별로 분리되었다. 수용연대에서 만난 아는 얼굴 중에 고등학교 동창생들 말고 꼭 한 사람이 더 있었다. 공부도 별로 신통치 않은 데다 4학년 때까지 코를 질질 흘리고 다녀 별로 친하지 않았던 국민학교 동창생이었다. 친하지 않았으니 반가울 까닭도 없었는데 그는 수용연대에서 특별한 존재였다. 신체검사를 받고 훈련소로 넘어가기 위한 대기상태인 똑같은 장정 처지임에도 그는 웬일인지 항상 줄을 서서 몰려다니는 60여명 가운데 끼어 있었고, 나중에 도착했음에도 검사장 앞에 이미 줄을 이룬 우리들을 무시하고 항상 새치기로 우선 검사를 받는 그들은 분명히 수상한 존재들이었다. 신체검사 마지막날 예방주사를 맞고 나서는 나를 알아본 그가 먼저 아는 척하며 반가워 하길래 궁금했던 걸 물었더니 유도대학 다니다가 단체로 60명이 입대하였으며 자신들은 훈련소를 마치는 즉시 서울에 있는 수도경비사로 발령을 받기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취미삼아 하는 특활 활동 중의 하나가 유도이고. 특기자로 체육대학에 진학한 학생들이 하는 종목 가운데 하나가 유도라는 정도의 상식이 머리 속에 콱 박혀 있었던 내게 유도대학이란 말도 생경했지만 수도경비사로 배치가 확정되어 있다는 사실 또한 신기하기만 했다. 그날 우리들은 25연대 2대대 3중대와 5중대로 배치되었는데, 유도대학생 60명도 나와 같은 3중대였다. 다만 나는 3소대, 그들은 5소대였다. 인원 배치가 끝난 우리는 키가 아담하고 눈이 동그란 소대장이란 전라도 말투의 하사를 따라 25연대 3중대 3소대 막사로 향했다. 연대의 막사 기와지붕을 얹은 단층 브로크집이었다. 내무반으로 불리워지는 건물 내부 가운데 통로가 양쪽에 맞뚫린 출입문으로 마주 이어져 있었다. 그 통로를 마주 보며 무릎 정도 높이로 침상이 깔려 있어 걸터앉기에 알맞았다. 양쪽 침상의 중앙에는 침상을 양분하며 통로쪽으로 한 팔 간격 정도 폭과 침상 위에 서면 우리 어깨 정도의 높이에서 50Cm 폭의 계단을 이루며 안으로 꺾여 다시 50Cm 정도 높이로 돋구다 상층부가 다시 밋밋해진, 복도쪽에서 보면 사방 1.8m 정사각형 위에 가로 0.8m 세로 0.5m의 직사각형을 얻어 놓은 둣한 용도가 불분명한 낯선 시멘트 시설물이 자리를 잡아 내무반 공간을 자연스럽게 4등분하고 있었다. 그 시멘트 시설물이 방한용 뻬치카라는 것을 안 건 자대에 배치되고서였다. 침상 끝쪽에 나무로 길게 짜여져 칸막이가 된 사물함 앞에 한 사람씩 앉혀졌다. 사물함은 가로 35Cm, 세로 50Cm 정도의 높이로 되어 문이 달리지 않은 나무상자꼴이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분대당 15명씩으로 나뉘었고 나는 5분대 소속이 되었다. 우리들에게 훈련복 상하의, 군모, 동내의 두 벌, 광목 팬티 두 장, 면양말 세컬레, 통일화라는 훈련화, 손수건 두 장, 판초 우의, 철모, 탄띠, 수통, 반합, 비누, 치약, 치솔 등이 배급되고 서울서 입고 온 사제옷은 팬티까지 모두 벗겨져 나이롱끈으로 꽁꽁 묶어 집주소를 쓴 누런 종이에 싸여 우송될 소포가 되어 모아져 중대본부에 보관되었다. 소대장은 서울에서 가져온 돈들을 모두 내놓으라고 했다. 중대본부에 맡겨졌다가 훈련이 끝나면 반환하겠다는 것이었다. 집에서 준 돈 가운데 수용연대에서 쓴 얼마간의 돈을 빼고 약 1만 2, 3천원 정도의 돈이 있었지만 내놓지 않았다. 나뿐만이 아니라 돈을 내놓는 훈련병은 아무도 없었다. \"양양한 취사장을 바라볼 때에 소고기 돼지고기 장교가 먹고 육군 쫄병 국물도 없다. 세상에 이런 군대 어디에 있나?\" 당시 군인들이라면 누구나 불렀을 비틀린 군가처럼 군대는 아직도 비리 집단이라는 인상과 함께 배고픔의 상징처럼 우리에게도 인식되어 있었고...... 1950년 12월 말, 중공군이 서울을 함락하자 \'국민방위군\'이란 이름으로 선발된 1백만명의 청장년들을 하루에 소금물에 뭉친 주먹밥 두 덩어리를 주는 둥 마는 둥 20여 일의 도보 행군으로 마산, 삼천포로 끌고 가 먹지도, 입지도 못하여 얼어 죽고 굶어 죽고 병들어 죽어 무려 9만명의 장정이 생목숨을 잃고 또 수십만명이 아사 직전으로 몰리거나 병들었던 \'국민방위군 독직사건\'을 기억하는 우리의 부모들은 군대에서 내 자식만은 살아 돌아오기를 기원하며 굶어죽지 않을 만큼의 비상금을 필수품처럼 공급했던 것이다. 내 비상금은 서울서부터 만들어져 옷핀으로 팬티 속에 매달려 온 조그만 헝겊 주머니 속에 꼬깃꼬깃 감춰져 있었는데, 다른 훈련병들도 대개는 비슷했을 것이다. 우리는 배급 받은 의복들과 장비들을 관물함이라는 사물함에 정리하고 정돈하는 법을 배웠다. 맨 아래에는 동내의 상하, 팬티...... 맨 위에 배급된 양말이었던 것 같다. 관물정돈이 거의 끝나갈 무렵 날이 어두워져 내무반에 달린 현광등에 불이 켜졌다. 그런데 우리 쪽의 현광등 하나가 불이 켜지지 않았다. 스타트 전구가 불량인 듯했다. 올라가 보니 불량이 아니라 아주 없었다. 서울서 쓰던 3백원짜리 파이로트 만년필을 가지고 있었는데 뒷쪽이 금색 도금을 한 쇠로 장식되어 무등을 타고 빈 스타트 전구 자리를 쑤석거리자 찌지직 소리를 내며 현광등이 밝아졌다. 누군가가 외마디처럼 소리쳤다. \"으미이......히안쿠마!\" 나중에 알았지만 해남에서 태어난 그는 집에서 가장 멀리 떠나온 날이 오늘이었고, 장소도 논산훈련소라고 했다. 현광등도 수용연대에서 처음 보았고, 더구나 만년필로 현광등을 켜니 신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리라. 결국, 이것이 화근이었다. 우리 중대는 서울 병력과 호남 병력 반반의 혼성이었다. 이미 입대하기 전에 훈련소에 가면 소대를 대표하는 향도든 분대장이든 아무 것도 맡지 말라는 충고를 귀에 딱지가 앉게 들었던 터라 소대장이 \'거짓말하면 죽어!\'라는 협박과 함께 \"대학교 다니다 온 사람 손들어!\"에도 손을 들지 않았으나 소대장은 \"아까 현광등 켠 훈병\"이란 지적으로 결국 5분대장 병기계로 선발되고 말았다. 중대본부에서 \"전달!\"이라는 소리가 들리면 신발도 신지 못하고 내무반 막사 앞으로 달려나가 부동자세로 \"전달!\"을 복창해야 하는 소대에서 가장 바쁜 전달병으로 선발되지 않은 것에 감사해야 했다. 1968년은 윤년이어서 2월 마지막에 혹처럼 달려 있는 29일에도 우리가 기대한 훈련은 시작되지 않았다. 29일 오전에는 중대장의 정신교육과 군가 교육, 오후에는 경례, 차렷, 군모 쓰는 법 등과 함께 제식훈련, 저녁에는 중대장의 명령으로 부모님께 편지 한 장씩을 써야 했다. 대한민국 사내들이 지금도 그날 저녁들만 같았으면 대한민국은 효자 왕국이 되었으리..... 이튿날은 삼일절, 금요일이었다. 몇 명이 전달에 따라 사역병으로 차출되고 나머지들은 한량하게 양지쪽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팡세나 읽을 요량으로 내무반에 들어갔던 나는 관물함에서 이상한 걸 보았다. 뭔가가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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