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조트로 향하는데, 전화가 들어온다. 광현이다. 계속 울린다. 리조트에 도착. 체크 인을 하고 룸에 들어와 휴대폰을 열으니, 광현의 음성 메시지가 와 있다. 각이 딱 딱 잡혀진 쪽지와 거품 목욕제가 들어 있다. --- 세정아.. 당신, 요즘 왜 그렇게 힘들어 보이는지 모르겠어.. 암튼, 이번 여행에서 훌 훌 털고 예쁜 얼굴로 돌아 왔음 좋겠어.. 당신은 밝은 모습이 훨씬 예쁘거든.. 될수 있음, 짧게 있다 오길 바래.. 보고 싶으니까.. 세정은 눈물이 왈칵 솟는다. 은은한 허브향의 거품이 그녀의 피로와 팽팽했던 신경줄을 느슨하게 풀어주는 것 같다. 아..따뜻하다. 문득, 남편이 그립다. 그는 그녀가 보고 싶다고 하면 금방이라도 달려 올 것이다. 그녀는 3박 4일, 아니, 그 이상도 걸릴 수 있을 거라 남편에게 말하고 왔다. 그러나 지금의 마음으론 내일 아니,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한다면, 바로 집을 향해 갈지도 모른다. 따뜻한 목욕을 하고 난 세정은 들어오며 사온 맥주와 약간의 음식들을 탁자에 꺼내 놓는다. 캔 하나를 따 들이키며, 술기운을 빌어 잠을 청해야겠다고 생각 한다. 그때 폰이 울린다. 남편이다. 맥주 한잔 하고 있다고 했고, 서훈은 당신이 외로우면 언제든지 달려 갈 테니 부르라고 한다. 세정은 웃음으로 답하며, 가슴이 쓰려옴을 느낀다. 미안함 때문이리라… 세정은 곧 잘거라고 했고, 서훈은 그녀에게 혼자라고 아침 거르지 말고 꼭 맛있는거 먹으라 하며, 혼자만의 당신이 원하던 시간, 잘 보내고 오라고도 했다. 전화를 끊은 그녀는 울었다. 두개를 다 가질 수 없는 욕심 때문에? 아님, 도덕적으로, 정말, 진심으로, 남편 서훈에 대한 미안 함 때문에??? 하… 아닐 것이다. 정직히 말하면 지금 이순간 그녀는, 광현도 내 남자가 되어 줄수 있을거란, 하여, 며칠간이지만, 둘이서 그렇게 완벽하게 비밀스런 날들을 보낼 수 있을거라 자신 했는데, 그것이 이루어지지 못한 상실감 때문인지도 모른다. 도덕적이며, 이지적인 그녀에게도 숨겨진 욕망은 있다. 분명, 사랑한다면서도, 세정의 존재를 세정 앞에서 거부한 광현에게, 그녀는 구겨질대로 구겨진 자신의 모습이 견디기 힘든 것이다. 잠이 오지 않는다. 맥주 한캔을 더 딴다.. 그래도 잠이 오지 않아 괴롭다.. …몽롱해져 왔다. 둔중하게 밀려오는 두통과 기분 나쁜 졸리움… 둥둥 떠 다니는듯 한 기분을 안고 잠속으로 가라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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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아침.
바닷속 깊은 곳에서의 울림 같은 소리에 눈을 떴다.
비바람이 몰아 치고 있다.
바다가 요동치고 있다…
비예보가 없었는데… 어떻게 된일일까…
세정은 무심히 바다를 본다.
사랑은 셋 이서는 할 수 없다.
너와 나, 둘이서만 되는 것이 사랑이다.
그렇다면 광현과의 관계를 과연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아니다.
이건 사랑 놀음이다.
아니, 바람이다.
바람…
아무리 아름답게 포장하려 해도 부도덕한 행각이지, 사랑이랄 수 없다.
세정은 대단히 큰 착각을 하고 있는 자신을 돌아 본다.
광현, 그가 왜 새삼 이만큼 와 버린 시간속에 있는 나를 사랑 한다는 것일까.
그게..무슨 의미가 있을까…
휘몰아 치는 바다를 보며, 그녀는 깊은 생각에 잠긴다.
뒤집어진 바다는 지금 청 푸르지 않다.
오물들을 걸러 내듯 흙빛이다.
그녀의 마음도 같다.
걸러진 바다는 다시 잔잔해 질 것이고, 또 그렇게 본모습의 정화 된
짙고 푸른 바다 색으로 돌아 올 것이다.
세정도 이젠 지금, 여기에서, 이즈음, 종지부를 찍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않음, 고장난 마음의 브레이크를 다스릴수 없을 것이다.
아쉬움 같은 묘한 감정의 정체는 과감히 떨쳐 내야 한다.
그래야 한다.
그래야 그도 세정도 행복할 수 있으므로..
봄이면, 꽃비가 흩날리는 거리를 함께 걷기를 희망 한다 했고,
여름, 장마비가 내리는 날엔 분위기 좋은 찻집에서 향 짙은 커피를 마시자 했고,
세상이 붉게 물드는 가을 날에는 낙조가 근사한 서해로 그 기막힌 석양을
꼭 보러 가고 싶다 했고,
하얀 눈이 펑 펑 쏟아 지는 겨울에는 손을 꼭 잡고 대학로의 거리를 함께
걷고 싶다고 했지만..
모두가 그와 해서는 안되는 일들이다..
너랑…꼭 이러한 것들을 해보고 싶다는 그런 것들을 함께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비 바람이 더욱더 거세지고 있는 것 같다.
모든 문들이 닫혀 있지만 파도 소리와 바람소리가 섞여 웅, 웅 거린다.
나가고 싶지만, 엄두를 낼 수 없다.
며칠을 더 묵을까 말까 생각 중이다.
문득 허기가 밀려온다.
구내식당으로 내려갔다.
식당 두곳 중 하나는 황태 해장국이 주 메뉴다.
한곳은 경양식 집이다.
뜨거운 국물을 먹어야 겠다고 생각하고 해장국집으로 들어갔다.
그때 전화가 들어 왔다.
남편이다.
아침 먹었냐,, 지난 밤 잘 잤냐,
비가 많이 온다고 하던데 당신 괜찮냐는 안부 전화다.
아니, 비가 와서 좋다고 했다..
언제 올거냐는 물음에 며칠 더 있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은 잘 모르겠다.
오롯이 그녀만을 사랑하는 남편, 서훈.
그녀를 사랑한다는 또 다른 남자, 광현.
그리고 거기에 세정이 있다.
.......................................
27.
룸까지 올라 와 준 세정이 그렇게 맥없이 일찍 자리를 뜰 줄 몰랐다.
그래도 선물을 전달 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고 생각 하는데, 룸벨이 울린다.
그녀가 되돌아 온 줄 알았다.
아니다…
낯익은 쇼핑 가방들이 앞에 보인다.
짐작이 갔다.
그녀의 성격은 예전에도 이랬다.
자신의 생각에 분명치 않은, 편치 않다고 판단이 되는 것들은 이런식으로 거부 했다.
ㅎㅎ 헛웃음이 나왔다.
여전하군…
그녀, 세정에게 전화를 하지만 그녀는 받지 않는다.
그녀가 화가 난 것 같다는 생각이 서서히 들기 시작 했다.
속초행의 동행을 조심스레 꺼낼 때, 난 이미 짐작 했어야 했거늘..
아마도 그녀는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거절 당했다는 생각에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그녀가 다소곳이 모았던 손을, 탁자아래로 내려 가만히 힘주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안하다.
다음 날, 윗선과의 아침 일찍 조찬을 겸한 브리핑만 아니었다면, 두말 않고
그녀와 함께 떠났을 것이다.
이럴 때, 광현은 자기가 자유롭지 못한 직장인이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전화를 한다.
받지 않는다.
계속 받지 않을 모양이다.
음성 메시지를 남긴다.
세정아! 미안..
잘 도착 한거지?!
마음 풀림, 아니, 정정, 언제든 될 수 있음, 빠른 시간 내에 전화 주라..
그리고…아니야… 꼭 전화 주렴. 기다린다..
멜 남길께.. 확인 하고…
‘사랑한다’ 는 말은 남기지 않기로 한다.
그러며 광현, 그는 생각 한다.
왜 늘 세정과는 이렇게 한 발자국씩 엇갈리는 것일까…
아… 저것들을 어찌 할까…
그는 선물들을 생각하며 고민한다.
예뻐서, 혹은 기품있어 보여 산 찻잔들.
특이한 그림들이 있는 입 큰 머그잔.
용기가 신비롭고 오묘한 모양들의 향수.
그녀가 하면 썩 잘 어울릴 것 같아 이태리에 갔을 때 산 실크 스카프.
그리고 에이프론.
깨알 같은 다이아가 촘촘히 박혀 있어 눈꽃송이 같아 구입한
뉴욕에 갔을 때 사 온 귀걸이, 목걸이 세트.
중간 크기의 흑진주를 한알 올려 보기 좋게 세팅 한 팔찌..
그리고, 고민을 거듭 하다 구입 한 초록의 에메랄드 반지…
모두가 세정과 어울 릴 것 같은 것만, 아주 신중하게 생각하며 구입한, 정성?을 다한 선물 들이다.
다른 이에겐 주고 싶지 않은…
어찌할꼬…
……………………
28. …………….. 시장기가 돌았지만 생각처럼 밥이 넘어가 주지 않는다.. 세정, 국물만 몇수저 뜨다가 만다…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긴다. 미쳐 버린 바다를 본다. 뜨거운 커피를 넘기니 살 것 같다… 오늘, 밤 이란 시간은 오묘하다. 하루를 더 묵기로 한 그 밤, 세정은 가져온 넷북을 연결, 컴을 켠다. 그리고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전송을 할지, 안할지는 아직 결정 하지 않았다. 나는요.. 광현씨… 그렇게 친 후 한참을 모니터를 보며 생각에 잠겨 앉아 있는다. 내마음을 당신에게 랜트.. 해 줄 수가 없을 것 같아요.. 미안.. 정말 미안해요.. 우리, 아니, 당신과 나, 지금, 이거, 사랑… 아니예요. 사랑 인거 같지만 아니라는거.. 정직히 말하면, 함께의 속초행 여행을 거부?당했을때, 순간 당혹 스러웠지만, 지금 생각하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요. 냉정하게 돌아 보라는 기회 인 것 같아요. 고마워요. 나를 잊지 않아줘서… 그마음, 그대로 그렇게 간직할께요. 광현씨도 마음 속 그 상자속에 깊숙히 다시 넣으세요. 시간의 여행에서 가끔 꺼내보면 나쁘지 않은 기억으로 떠오르길 바랍니다.. 건강히, 아프지 말고, 잘 지내길 바라며, 이제, 정말, 접습니다… 진심으로 행복 하길 바랍니다…
이 세 정. 이렇게 쓰고, 그녀는 잠시 검은 밤 바다를 보기 위해 발코니로 나갔다. 낮과는 다르게 평온해진 바다는 규칙적인 파도소리만 들릴 뿐 별 말이 없다.. 나, 잘 한거라 말해줘… 방으로 다시 들어 온 그녀는 광현의 이메일 주소를 확인 한후, 전송 키를 눌렀다. 그리고, 그에게서 온 메일은 읽지 않은 체, 자신의 계정을 날려 버렸다. 절차도 무시한체 전원코드를 빼 버린 그녀는 찬 방바닥에 누워 눈을 감았다. 몸도 마음도 바닷속으로 깊숙히 침잠해져 가는 것 같다… 집에 가야지…이제…. ( 다음편 예고 --- 세정의 남편 서훈이 알게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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