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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 작가 열전]58회 김훈 교우
[박해현 기자의 '우리 시대 작가 열전'] 탐미적 문체에 담긴 허무주의의 힘… 그의 글엔 희망도 사랑도 화해도 없다


'칼의 노래' 소설가 김훈

영상이 활자를 말살하리라는 '문학의 죽음' 선고에도 불구하고 한국문학은 아직 살아서 꿋꿋이 버티고 있다. 문학의 열띤 숨결을 독자들의 가슴에 불어넣으면서 2000년대를 대표하는 소설가와 시인을 찾아가는 '박해현 기자의 우리 시대 작가 열전'을 새로 연재한다.

'立春大吉(입춘대길)'.

소설가 김훈(61)은 경기도 일산 신도시의 집필실 문 앞에 이렇게 입춘첩(立春帖)을 내걸었다. 15층짜리 오피스텔의 맨 꼭대기 작업실에서 오늘도 연필로 글을 쓰는 작가 김훈은 올봄 애독자들에게 '크게 길할 일'을 한판 벌였다. 문학동네 출판사가 운영하는 인터넷 카페에 5월1일부터 소설 《공무도하》(公無渡河)를 연재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랑아, 길을 건너지 마라'는 부제가 붙은 이 신작 소설에 대해 김훈은 '신문사의 젊은 사건기자가 약육강식의 세계 속을 좌충우돌하는 이야기'라며 '별의별 놈들이 다 나오는 3인칭 소설로 우리 시대의 '먹이' 문제와 그것을 둘러싼 질서들에 대해 써보고 싶다'고 말했다. 소설 제목은 물에 빠져 죽은 백수광부(白首狂夫)의 아내가 남긴 고조선의 시가에서 따왔다. '백수광부의 사체는 하류로 떠내려갔고, 그의 혼백은 기어이 강을 건너갔을 테지만, 나의 글은 강의 저편으로 건너가지 못하고 강의 이쪽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사전과 법전·고전을 벗 삼아 집필실에서 작업하는 소설가 김훈. 그는“매일 아침 일산 호수공원을 산책한 뒤 집필실에 틀어박혀 겨우 쓴다”고 했다./김건수 객원기자 kimkhans@chosun.com
'멀고 아득한 것들을 불러서 눈앞으로 끌어오는 목관악기 같은 언어'를 소망해온 작가 김훈은 이미 《칼의 노래》 《남한산성》등의 역사소설을 통해 개인의 실존적 현실을 이념적·역사적·낭만적 논리로 재단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단순하고 자명한 일상의 구체성을 비장하고 엄밀하게 그려냈다. 그의 소설은 얼핏 삶을 부정하는 음울한 허무주의 색채를 지니는 듯하지만, 자세히 읽으면 삶의 비극적 조건을 비판하는 허무주의의 힘을 탐미적 문체로 형상화한 것이 보인다.

집필실 벽에 걸린 작은 칠판이 눈에 들어왔다. '君子之道必日新 不日新者必日退'(군자의 도는 매일 새로워져야 하고, 새로워지지 않는 자는 반드시 매일 퇴보한다). 처음으로 인터넷 연재를 시작한 작가 자신을 향한 다짐 같기도 하다. 인터넷 연재라고는 하지만 연필을 온몸으로 밀면서 쓰는 김훈 특유의 집필 방식에는 변함이 없다. 그는 여전히 컴퓨터 자판을 익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훈은 충무공 이순신의 실존적 고뇌를 다룬 《칼의 노래》(동인문학상)에서 병자호란의 치욕을 그린 《남한산성》(대산문학상)까지 화려한 수상경력과 베스트셀러의 행복한 결합을 확실하게 보여준 작가다. 하지만 그는 '내 소설 안에는 희망이나 사랑·화해 같은 메시지가 전혀 들어 있지 않고, 속된 말로 '전망'이란 것도 없다'면서 '사람들이 그걸 읽는 것은 나도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겸연쩍어했다.

김훈 소설을 놓고 숱한 찬반 논란이 제기됐다. 김훈 소설이 '남근주의(男根主義)'나 '파시즘' 숭배를 조장한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하지만 젊은 평론가 신형철은 '김훈은 인간을 긍정하지 못하면서 인간을 말하고, 역사를 믿지 못하면서 역사소설을 쓴다'며 '이 역설(逆說)이 김훈 소설의 힘'이라고 지적했다.

경남 남해에 가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순신을 모신 사당 '이락사(李落祠)'가 있다. 김훈은 해마다 이순신의 기일이 되면 이락사를 찾아가서 소주 한 잔 올린�! �. 김훈�� '나는 '이순신이 떨어진 바다'라는 그 사당 이름과 같은 문장을 제일 좋아한다'면서 '충렬이나 충무라는 말과 달리 그 문장에는 이데올로기가 들어 있지 않다'라고 말했다. '이(李)가 죽은 바다'라는 단순성이 온갖 슬픔보다 더 거대한 슬픔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간결하면서 비장한 김훈의 문체는 '이순신이 떨어진 바다'라는 말 같은 명석성의 세계를 동경한 결과인 것이다. 그래서 김훈 소설의 미학은 '명석성의 슬픔'으로 요약된다. 김훈은 '나는 말의 효용을 전혀 신뢰하지 않으면서도 말을 보듬어야 하는 모순에 가득 찬 인생을 살고 있다'라고 '글쓰기의 지겨움'을 털어놓으면서도 '글은 몸속의 리듬을 언어로 표현해내는 악보'라며 오늘도 계속 연필을 깎는다.

◆ 소설가 작업실에 소설책이 한권도 없네

소설가 김훈은 매일 아침 7~9시 일산 호수공원을 산책한 뒤 집필 작업에 들어간다. 그의 작업실에 없는 것은 담배와 재떨이, 소설책이다. '40년 동안 하루 2갑씩 피우던 담배를 지난해 여름에 끊었다'는 작가는 '처음에는 글이 안 써지고 너무 괴로워서 티셔츠를 2장이나 찢었고, 한꺼번에 금연 패치 15개를 붙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리 힘들지 않다'고 말했다. 소설가의 집필실이지만, 희한하게도 소설책이 한 권도 보이지 않는다.

문학서적은 오로지 《서정주시전집》 《김지하시전집》 《임화연구》(김윤식 지음) 단 3권뿐이다. 대신 법전과 사전이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김훈은 '법전은 어휘의 보고'라고 했다. 국어사전 3종, 영어사전 2종, 한한(漢韓)대사전도 책상 위에 펼쳐져 있거나 가까이 있다. 책꽂이의 주류는 《조선왕조실록》 《연려실기술》 《삼국유사》 등 역사서, 《아함경》 등 불경, 《논어》 등 중국고전 등이다. 《조선수군사》 《활쏘기의 비결》 등의 책도 보인다.

김훈은 최근 노트북 컴퓨터를 출판사로부터 받았지만 사용할 줄 모르니까 무용지물이다. 그는 이메일 대신 팩스로 원고와 강연 청탁을 받는다. 휴대폰은 사용하지만 문자 메시지는 찍은 적이 없다.